나는 요즘은 정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나 나름대로 한국의 정치문제에 대해 결론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 결론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 볼까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정치의 결론은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은 이미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과대평가되어져 있고 그들이 과대평가가 되어진 만큼 중요한 시민들이 가려져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 배워본 적도 깊게 고민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꿈을 꾸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빼고서는 한국 정치는 앞으로 갈 수가 없다.
사랑이 부족하면 어떻게 되는가. 공포에 떤다. 세상이 모두 적이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서 믿을 것을 찾아 나선다. 믿을 것중의 하나는 뭔가를 소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공포를 없애주지 못한다. 사람이 가진게 없으면 짐승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공포에 빠진 인간은 가진 게 있으면 더 짐승이 된다. 누가 그걸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하고, 누군가가 가진 것뒤에 숨겨놓은 진짜 자기의 모습을 알까봐 두려워해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은 미래를 보고 모두의 이익을 보기 보다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 따라서 공공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은 실종된다. 밥을 배식하는 것이 곧 영원히 멈출 것같고 안먹으면 죽을 것같은데 얌전히 줄을 서 있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늘상 금방 큰일 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떤다. 먹고 살만한 사람도 자기 연민에 눈물을 흘린다. 공포를 없애려고 발버둥치다가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불쌍한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사기꾼에게 당한다. 사기꾼은 이미 당신이 가진 것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위험한 일을 하라고 한다. 이미 늦었습니다라던가 이렇게 어떻게 사냐고 호들갑을 떤다. 큰 길을 걸어가기 보다는 위험한 뒷길을 가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투기에 빠져들고 불법에 빠져들고 몰상식에 빠져드는 사람은 나중에 금전적인 손해를 보고, 세상사람들에게 못믿을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나서야 그때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살았으면 지금 참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대개는 본전 생각에 다시 위험한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인 예일테지만 그거 아니라도 한국사람들 참 많이도 한꺼번에 뭉쳐서 움직인다. 자기처럼 안하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질 못한다. 자기가 불안해지니까 모두 다 똑같이 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다.
논리나 지식이나 법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거라고 믿는 사람도 사실은 공포에 떠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논리나 지식이나 법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동차나 망치처럼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 뒤에 서있지 않을 때 일은 반드시 잘못되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공포를 제거해 주지 않는다. 실상은 공포를 키운다. 세상에는 헛된 말이 점점 많아지고 지식 부스러기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많아지며 법이 정의를 억압하는 것같은 때도 많다. 그러니 공포는 날로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다.
공포는 언제 없어지는가. 공포는 자기를 믿고 세상을 믿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세상도 기본적으로 괜찮은 곳이라고 믿기 전에는 우리는 공포에 빠진다. 언제나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세상을 악으로 파악하면 그 모르는 부분도 악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악의를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공포에 빠지게 되지 않겠는가.
사기꾼은 대개 세상 사람들 알고보면 다 괜찮은 사람이니 우리 서로 믿고 살자고 안한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빼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테두리를 만들고 그 테두리 바깥의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만든다. 좋은 예는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다. 공포와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가지는 것은 필요악같은 것이다. 그런 것이 절대 필요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 상태에서 그런것이다.
한국 사람은 공포에 떤다. 삶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없어질까.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믿고 세상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인가.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두 손을 들어서 우리가 빈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천천히 접근하면서 말한다.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천천히. 천천히.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접근 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이 급하고 때로 일을 대충 대충 처리하는 것을 한국인의 타고난 성격으로 안다. 그건 사실 공포로 인한 병증이다. 사람들은 무슨 병인줄은 몰라도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뭘 치료해야 하는가를 모르거나 오해할 때도 힐링이니 치유니 하는 말을 할 때가 많다.
힐링과 치유의 기본은 간단하다. 느리게 느리게다. 빈방에 앉아 하루종일 꼼짝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으면 느린게 아니다. 공포에 질려있으면 느린게 아니다. 숲에 가는 것도 좋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으며 다 여의치 않으면 그저 천천히 소음이 좀 적은 곳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리에 앉아서 심호흡을 하거나 명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형식이다. 기본은 결국 느리게 느리게다. 공포에 질린 자기에게 다가가는 것이니까.
느리게 느리게 마음을 가라앉혀서 자기를 봐야 한다. 슬픈가. 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은가. 뭔가가 걱정되는가.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느리게가 아니다. 다만 느리게 해야 자기를 느끼고 세상을 느끼게 된다. 이거 정말 다 필요한 일일까. 내가 이걸 왜 하는가. 이렇게 느리게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공포를 키운다. 느리게 생각하면 우리가 아둥바둥거리는 대부분의 일이 사실은 필요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내가 주변에서 보는 한국 사람들은 어찌나 빠르게 빠르게가 많은지 모른다. 뭐가 그렇게 이건 원래 이렇고 이건 당연히 그렇다는 것이 많은지 모른다.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면 그 생각들의 대부분은 엉뚱한 생각이 되기 마련이다. 그 생각들이 옳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엉뚱한 생각들을 하는게 바로 느리게 느리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반응하는 자기를 느끼는 것이다.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만 채우면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엉뚱한 생각들에 대해 용서가 없고 두번 생각하지 않는다.
느리게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반드시 빈둥거리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을 단순하게 해서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게 뭔지 알려면 자기를 찾아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간단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상 옆길로 빠진다. 늘상 비본질적인 것에 빠진다. 영화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영화를 보러 외출했는데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자꾸 다른 일에 빠져서 결국 영화는 못보는 식이 된다.
정치 이야기를 해보자.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의 사람이 필요하니까 정치인도 있어야 한다. 그들은 분명 지금도 미래에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한국을 바꾸는 사람은 지금 시대에는 정치인이 아니다. 정치인은 지금보다 좀 더 단순하게 사회적 공복으로 인식되고 단순한 일을 하는 공무원처럼 취급되어야 한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없다. 정치는 가장 과대평가되어 있는 직업이다.
나라는 정치가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들이 공포에 젖어서 인생을 잘못살면 자기도 계속 공포에 젖어있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공포에 빠지게 만든다.
시대는 이미 지역자치의 시대고 소규모 공동체의 시대다. 우리는 자기 주변에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사회적으로 거시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눈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회적 활동을 하면서 정작 자기 주변의 아이들과는 대화하고 감정을 나누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과거의 시대는 사실 이런 사람을 더 선호했다. 개인은 말살되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라를 구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거리에서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은 실상 누군가에게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는 믿음을 주면서 나라를 망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로 산다는 것이 세상에 눈을 감고 이기적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는 세상의 일부인데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중의 일부는 살다보면 우연히 사회적으로 큰 소리를 내는 확성기 앞에 선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꼭 부러워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살다가 그런 자리에 서야할 일이 생기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나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로 사는 것의 자연스런 결과라면 말이다. 그러나 기본은 그저 자기로 사는 것이다. 느리게 느리게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주변 사람들을 챙기면서, 자기와 주변사람들의 공포를 조금씩 덜어주면서.
일찌기 간디는 자신은 정치가지만 자신의 정치적 행위는 그저 종교적 진리찾기의 연장이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즉 스스로는 그저 개인적인 진리의 추구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로 산 것이다. 실제로 간디는 여러번 그저 단순한 험한 일을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적이 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알아서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반면에 세상이 그런 사람을 비웃고 그저 나서기 좋아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개혁만 떠드는 사람만 주목할 때, 세상에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 없을 때 세상에서 합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누군가의 특정한 입장에서만 합리일 뿐이니까. 정의나 합리는 어떤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공허한 개념이다. 이미 공동체가 없을때, 공포때문에 모두가 흩어져서 개인으로 살아갈때 거기에는 이미 정의니 합리니 하는 것의 의미가 없다. 사랑과 믿음이 항상 먼저인 것이다.
지금 한국이 부족한 것은 논리도 지식도 아니고 정치적 지도자도 아니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러나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뭔지를 계속 고민하는 사람은 적다. 사고가 멈춘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단순하다. 자기와 세상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상이 왜 이러냐고 좌절하고 불평한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이미 군인이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교수들도 아니다. 그런 시대는 지났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이고 그런 사람들의 네트웍이다. 우리 모두 의미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서로 그렇게 하자고 권하는 것, 그게 가장 빨리 세상이 좋아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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