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도서관 읽기

by 격암(강국진) 2015. 8. 1.

2015.8.1

 

우리 동네에는 전북도청 도서관이 있다. 내가 종종 책을 빌리러 가는 도서관인데 어제는 피서차 도서관에서 머물면서 책을 좀 보기로 했다. 그간에는 신간 부분의 책들을 주로 훓어보곤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리 타율이 좋지 못하다. 어느 정도 골라서 책을 빌리긴 하지만 빌려간 책들이 종종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책들이 분류되어 나열되어 있는 서가로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딜 가야 할 것인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전부터 읽어보겠다고 적어두었던 책들의 목록을 다시 꺼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분류번호 000번으로 갔다. 처음은 철학일반이다. 

 

그 서가 앞에 주저 앉아 보이는대로 책을 꺼내서 뒤적였다. 아는 책도 있지만 안읽은 책이 많고 특히 많은 책들은 죽을 때까지 결코 읽지 않을 것같은 책들이다. 세상에 책은 아주 많고 내가 읽어봐야 얼마나 읽었겠는가. 이렇게나 책이 많은 걸보니 내가 쓴 것들을 모아서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볼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우습다. 안읽히는 책을 한권더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1분정도나 보는 것이지만 이런 저런 책들을 꺼내어 한 한목씩이라도 읽어보는 일은 즐겁다. 한 교수가 쓴 책은 가상의 청중에게 당신은 좋고 나쁜게 뭔지 압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런 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질문이 나쁜건 아니다. 그러나 질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자신의 답을 그저 하나의 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는 객관적 답이 있는데 당신은 그걸 아는가 하는 식의 질문이되고 말아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교수같이 강의를 많이 하는 사람이 가지는 병이다. 강의란 기본적으로 나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를 오래 자주 하다보면, 특히 학부생이나 일반청중대상으로 강의를 하다보면 사람이 점점 더 건방져 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점점 더 무슨 어린애에게 답가르쳐 주는 어른처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청중도 그걸 원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대부분 교수가 와서 이런 질문이 있는데 나도 잘 모르지만 이런게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걸 아직도 모릅니까? 이건 이겁니다. 이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명강의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속에서 책은 한쪽은 지식을 나열하고 다른 쪽은 그걸 열심히 외우는 관계가 된다. 이것은 특히 한국책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 오히려 작가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그런 책을 만들고 그런 책을 산다. 그리고 그런 책을 외워보지만 그건 별로 교양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뿌리가 없는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진다. 자기생각과 지식을 결합시켜줄 뿌리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안에서 자라나오는 것이다. 

 

서가에 책을 다시 돌려놓고 눈을 돌리니 이번에는 독서감상문을 모아놓은 책들이 잔뜩 보인다. 책을 읽기는 해야겠는데 안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또는 좋은 책을 소개받고 싶을 때 쓸모 있어보인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던가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했던 책들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그 옆에는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나 뭐 그런 안내가 붙은 정혜윤의 침대와 책도 보인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잠깐씩 들춰본다. 폴 오스터라던가 발터 벤야민 같은 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검색기로 가서 벤야민의 책을 찾아 다시 잠깐 서가 여행을 떠났다. 발터 벤야민의 책은 한권뿐이었다. 게다가 읽어보니 번역의 문제인지 딱딱하기만 해서 별로 즐거운 독서가 되지 못했다. 아마 다음 기회에 또 인사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관능적인 독서기 운운하는 책을 꺼집어 낸 것이 나이고 보면 그런 것을 전부 상술이라고 욕할 수도 없고, 그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지만 침대와 책이라는 책을 꺼집어 훓어보니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책을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걸 먹는 태도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도 관능적으로 말해보자면 책을 잠시 잠깐의 자위를 위해서 대량소비한다는 느낌이랄까. 책은 환상속에서 단순화되어 후루룩 삼켜지고 던져지고 그다음 책이 다시 무슨 희생자처럼 침대옆에 소환되는 느낌이다. 물론 내가 산 책 내맘대로 읽을 자유가 있다.  하지만 책은 가장 덜 감각적인 매체다. 그림이나 조각이나 음악이나 멀티미디어 매체에 비해서 말이다. 책을 이렇게 소비해야할까? 하기는 출판사는 이 책을 참 좋아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책을 폭식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라는 찬양가처럼 보인다. 

 

그렇게 몇시간을 도서관에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보냈다. 돌아올 무렵쯤에는 가진 돈을 다털어 인구가 5천7백명밖에 안되는 시골 탄광도시에 중고서적을 열었던 사람의 책을 잠깐 읽었다. 나는 이것을 독서를 했다기 보다는 도서관을 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나는 어떤 책도 30분이상 읽지 않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책들을 많이 쳐다보고 종종 그저 제목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곤 했다. 

 

나는 전에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본적이 없다. 000부터 시작해서 마치 도서관의 책을 모두 보겠다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도서관의 책들을 보겠다고 하면 제아무리 대충 본다고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책들을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보니까 도서관 읽기도 꽤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보물찾기 같고 미로 풀기같다. 일단 시작은 000부터 했지만 책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져서 서로를 부른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가도 나는 다시 뒤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매는 가운데 나는 들어본적도 없는 책들을 보게 되고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것같은 책들에 눈길을 주게 된다. 전에는 다 읽지 못할 것이니 명작만 읽어야겠다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듯 서가를 구경한다. 나는 차분히 이 책들을 다 읽어줄 만큼 독서에 중독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한번씩 둘러봐 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전에는 단점을 보려고 했다면 이제는 장점들을 보려고 한달까. 책들에 대해 조금 덜 엄격해 진다. 

 

도서관 읽기도 꽤 괜찮다. 하지만 이 세상에 도서관 읽기에 도전할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감옥에 있는 사람들처럼 다른 걸 할게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걸 하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도서관 읽기는 그래서 더 괜찮은 일인것같다. 

 

 

 

 

 

 

 

 

'독서와 글쓰기 > 쓰고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글쓰기의 조건들  (0) 2017.02.01
글을 쓰는 힘의 원천  (0) 2015.10.11
우화와 우리들의 세계  (0) 2015.07.23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  (0) 2015.04.28
오늘날 우리는 뭘 써야 할 것인가.  (0) 2015.04.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