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 은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걱정하는 바이며 이것이 답이라고 간단히 답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요즘 참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문제다. 요즘 한국에서 50살이 넘으면 대개 은퇴를 걱정한다. 다니던 곳은 나가라고 하고 재취업도 어렵다. 그런데 100세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이기도 하니 짧으면 30년 길면 50년은 더 남은 것이 1차 은퇴 후의 삶이다. 어떻게 보면 청년시대에 시작한 직업생활보다 그 이후의 삶이 훨씬 길어서 은퇴자의 고민을 청년때부터 해야 한다.
이 질문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아무 일도 안하고 아파트 뒷방에 앉아서 외롭게 살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먹을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일을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의미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야 잘 살수 있다. 은퇴한 남성들 중에는 직업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잡담도 못하고 취미도 없고 자기 손으로 라면도 못끓일 정도로 직업에 전문화된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 직업을 잃으면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종종 참으로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을 산다. 티브이 시청 이나 게임 혹은 술 담배같은 것들에 깊이 중독된다. 스스로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마는 그런 삶이 건강에 좋을 리가 없고 행복한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망각되는 것이 있다. 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인데도 그것에 대해 완전히 좌절하거나 혹은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대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교육시키고 있어서 그렇다.
그게 뭔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시작해 보자. 한국에는 자영업자들이 엄청나게 많다. 바로 퇴직한 사람들이 빵집이며 닭집을 해서 그렇다. 상가를 걷다보면 빵집이며 카페며 호프집이 어찌나 많은지 그리고 그 가게들이 얼마나 자주 생기고 망하는지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 나면 그나마 있는 약간의 돈으로 뭘할까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답이 자영업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재취업 아니면 자영업인데 재취업은 힘드니 자영업을 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자영업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무한 경쟁의 시대에 경쟁에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 이 논리를 아무리 봐도 틀린데가 없다. 그러니 이 질문도 이 답도 재검토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평생 빵집만 한 사람도 아닌 사람이 파리 바케트 같은 체인점을 시작했는데 같은 골목에 빵집이 몇개나 된다고 하자. 과연 그 사람이 몇년이나 그 빵집을 유지할 것인가. 최초의 투자금액을 뽑아낼 때까지는 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는 그 빵집을 안한 것보다 퇴직 자금이 더 빨리 소진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무한 경쟁시대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다. 누군가를 이길 생각을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다. 내가 경쟁에 이기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또한 내가 뭘하건 누군가는 이미 그 분야에서 많은 것을 쌓아 올렸는데 후발주자인 내가 그들과 정말 무한 경쟁이라는 게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세상은 무한히 경쟁하는 곳이며 정글이라는 말을 절대적 진리나 무슨 종교적 교리처럼 반복학습한다. 주변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자기자신을 반복 교육한다. 그러나 애초에 무한 경쟁 사회라는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답은 없다. 우리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질문을 시작할 수 있고 그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현실사회에서의 교육때문에 그 이야기가 황당하거나 때로 무모하게들리더라도 말이다.
우선 무한 경쟁의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정말 무한 경쟁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도 있는가?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 어떤 의미로는 세상의 대부분의 곳이 그렇다. 시장경제의 세뇌에서 깨어나면 말이다. 사람들이 경쟁없이 서로 그냥 봐준다는 것이 아니다. 생존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달려 있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사는 전주에서도 한옥마을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논쟁이 벌어지지만 내가 전에 살았던 일본의 여러 지자체를 봐도 그렇다. 인간 사회는 경쟁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자유주의는 사실이 아니며 실은 협동에 의해 경쟁을 얼마나 제약하는가에 따라 생존율이 올라간다고 봐야 한다. 사실 무한 이기주의를 발휘한다면 공중도덕은 왜 지키겠는가. 그런데 부자나라는 공공의식 수준이 높다. 이것자체가 무한 경쟁을 안할 수록 부자가 된다는 증거다.
우리가 한옥마을에 가장 한옥마을스럽지 않은 가게를 낸다고 하자. 그 가게를 나만 낸다면 어쩌면 큰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 명품옷가게나 커피숍을 하거나 일식집을 하면 돈을 벌테니까. 예술 문화의 거리라고 알려진 곳에 나혼자 술집을 열면 나는 돈을 벌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사람들이 한옥마을이라는 곳을 찾는 것은 어떤 특정한 하나의 가게나 집때문이 아니라 그 지역이나 거리가 가지는 문화적 특징 혹은 정체성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지켜가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그 지역 공동체인 것이다. 즉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지역을 이렇게 개발하고 보존해 갑시다라는 합의와 협력이 있어야 그 지역이 유지되고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유지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환경과 우리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경쟁하는 관계인가 협력하는 관계인가. 경쟁한다고 생각하면 자연과 투쟁하고 정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협력하고 공생한다고 생각하면 나만 좋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수 있을 것인지, 나뿐만 아니라 환경에게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 있는 거리나 도시에 대해서도 한 3년 바짝 돈벌고 그 지역이 파괴되면 다시 어디로 이사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50년 100년가는 마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할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거 어디서 듣던 소리같다. 맞다. 바로 수없이 많은 은퇴자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던가. 인간은 개인으로서 약하다. 때문에 기업의 일원으로서건 어떤 지역공동체의 일원으로서건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어 역할을 찾을 때 삶이 안정되게 된다.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오만한 것이다. 그는 그를 도와주는 인적인 환경이나 자연적 환경의 힘에 대해 감수성이 없는 것이다. 재벌3세가 자기가 열심히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잘난체 하는 꼴이다. 집단의 일원이라는 말은 바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원래 은퇴후의 삶도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무한 경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것을 100% 받아들여 버리면 우리는 싸움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젊은이들도 그렇지만 은퇴자들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해 보자. 귀농이나 귀촌은 농사기술의 문제일까? 나라는 개인이 가진 돈이나 농사기술이 귀농이나 귀촌의 성공을 결정할까? 실은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있고 그 마을 사람들과 그 사람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있다. 세상에는 혼자의 힘으로 마을을 바꿔버리는 영웅들도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냥 수많은 사람중의 하나일뿐이며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가 그 사람의 역할과 의미를 결정한다.
여기 옛날식 집성촌이 있다고 해보자. 이 마을에서 태어난 대추나무집의 둘째는 가진 능력이 크면 큰데로 작으면 작은데로 이 집성촌에서 자기의 존재의미와 역할을 찾을 것이며 노숙자가 되어 굶어죽는 일은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친인척으로 이뤄진 이 집성촌의 안쪽은 우리가 익숙한 단기적 시각의 무한 경쟁의 시장논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훨씬 더 긴 안목과 정으로 계산이 이뤄지는 곳이다. 즉 당장은 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느리고 돈도 들 수 있지만 주변에 베풀고 살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 나를 기억해 줄거라는 기대가 있다.
여기 어떤 노인이 살고 있는데 그 이웃 사람들이 그 노인을 가끔 도와준다고 하자. 약을 산다거나 전구를 간다거나 벽에 못을 박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 댓가로 노인은 또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인맥을 동원해서 소개를 해준다거나 금전이나 먹을 것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한마디로 서로 돕고 산다. 이런 풍경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은 이런 인간적 교류를 통해 높아진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우리가 이런 것을 시장경제로 모두 대체하려고 하면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효율이 떨어지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인에게 약을 사다주는 것이나 벽에 못을 박아주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정식 직업으로 삼으려면 시장이 충분히 커야 한다. 실은 그런 서비스를 가지고 장사를 시작하면 대개의 경우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이 없어서 폐업하고 그 서비스를 쓰는 사람은 서비스 비용이 너무 비싸서 생활비가 크게 증가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장 만능주의에 중독되어 있기에 모든 것이 시장에 의해서 해결된다고 과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인과 이웃의 도움이란 있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 망치를 빌려주는 것은 내가 새로 망치를 사서 빌려주는게 아니다. 최소한의 투자가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이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방식이다. 그런데 비지니스로 해서 없는 망치들을 사서 멀리에 있는 망치를 빌릴 사람을 찾아서 망치를 빌려주는 서비스를 하려고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결국 비지니스로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거대한 도시에서 자살하거나 소외되어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양산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작은 사회들을 해체하고 점점 더 큰 집단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슈마허는 그것이 실수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한국의 은퇴자들의 삶이 아닌가 한다. 한국인들은 작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무한 경쟁을 도입했는데 그것이 빠른 경제성장을 하던 시대에는 풍요로움을 가져온 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제 수출은 한계에 달하고 빠른 경제성장이 벽에 부딪히자 우리는 우리가 불태운 것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들의 은퇴후의 삶을 파괴하고 그것으로 생긴 돈으로 파티를 벌여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은퇴할 무렵이 되자 한국이 보여주는 풍경은 무섭기만 하다.
동네 닭집과 동네빵집이 무너지고 지역적 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 그곳을 대규모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채워서 무한 경쟁이 기본 법칙인 게임을 하면 지옥이 되는 것이다. 소비자로서는 이게 좋다고 할지 모르나 실은 소비자와 생산자를 구분하는 이데올로기적 말장난에 속는 것이다. 그 사회에 뿌리박고 사는 인간은 소비자나 생산자 둘중의 하나가 아니다. 무한 경쟁으로 고생하는 인간이다. 오직 소통이 일방적인 외부세력만이 100% 소비자거나 100% 생산자 일 수 있다.
자영업을 하려고 하는 은퇴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빵집을 해야 할까, 닭집을 해야 할까. 새로 만들 가게 주변에 사람은 얼마나 다닐까? 그런데 이제까지 해온 이야기에 근거해 말하지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에 있을 수 있다. 즉 나는 어떤 장사를 할것인가나 어떤 직업에 재취업할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와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전환은 보다 정확하고 일반적이지만 좀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투쟁에서 공존으로의 전환이다. 사회적 인적 자연적 환경을 모두 포함해서 나는 어떤 환경속에서 더불어 살아갈까를 고민하는 것을 첫째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세부적 실천사항에 대해 전혀 다르게 접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업종을 할까를 질문하지 않고 서울에 살까 제주도에 살까, 한국에 살까 미국에 살까를 고민하게 된다. 또한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나 형태를 고민하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는가를 찾게 된다. 이것은 마치 암벽등반을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암벽등반 동호회에 가입해서 그 안에서 삶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구들 사이에서 뭘할까는 두번째 질문이다. 우선은 더불어 살고 싶은 친구들을 찾는 것이 더 급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 많기만 하다고 해서 그것이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소통하고 서로의 공감이 어떤가를 확인해야 한다. 당신은 여러지역을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간을 들이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신뢰나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기다리고 설득하는 그 과정이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만드는 과정이다. 학원을 할 것인가 빵집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인테리어에 대한 고민에 들어가는 사람은 뭔가 많은 일을 한 것같고 그저 기다리고 대화하는 사람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다.
우리는 오랜동안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건물같은 물질이다. 인간은 소비자나 고객이라는 애매한 말로 뭉뚱그려 표현되었다. 따라서 내가 빵을 팔때 그 빵을 사는 사람과 내가 어떤 인간적 관계를 가지는가는 무시된다. 그저 이 사거리에는 매일 몇만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는가, 가장 싼 빵은 누구의 빵인가 같은 식의 생각에 등장하는 변수로 인간이 이해되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의 시작은 사람이며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하면 한편으로는 뜬금없는 말인것 같고 한편으로는 너무 어려운 말인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시말하지만 우리가 파괴해온 인간적 교류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다양성감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서 우리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애초에 패배를 인정하고 나서 승리할 방법을 찾는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당신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 이기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로또맞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경쟁에 이긴 개선장군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기려는 노력을 안한다는 말인가? 그 몇몇 개선장군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아이를 서울 강남같은 곳에 데려가서 무한경쟁시대에 이길 인재로 키우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을까? 무한 경쟁시대를 만들어 가면서 이웃도 친척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낸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 미래도 파괴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친구고 사람이고 네트웍이고 자연이며 가치관이며 철학이다. 모든 좋은 것도 그것들에서 나오고 모든 나쁜 것들은 그것들이 잘못될때 생긴다. 씨를 뿌릴 때 사막인지 비옥한 토지인지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는 농사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인적 사회적 자연적 환경에 대한 고민없이 학원이냐 빵집이냐하는 식으로 고민해서는 쉬운 길은 놔두고 어려운 길만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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