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중간고사를 보는데 역사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성장한 아이에게는 국사공부가 가장 어려워서 그야말로 재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도 외워야 하는 판이니까. 그렇게 해서 조선의 역사를 중학교 교과서 기준으로 화이트 보드에 쭉 쓰고 아이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를 아래층에 내려보내고 나는 조선 역사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조선의 역사에는 빠져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뭘까.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술적 발전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기술발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쭉 써놓고 보면 1392년이래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의 사회적 변화에서 기술의 역할을 느끼기 거의 어렵다. 고작해야 조선말엽에 모내기 법이 보급되어 이모작이 가능해졌다라는 부분정도가 눈에 보일 정도다. 식량생산이 많이 늘어나면 그로 인해 사회적 변화가 오니까 말이다.
조선의 역사를 적어도 교과서에 나온대로 나열하면 권력의 변천사가 그 줄기로 읽힌다. 즉 권력싸움에서 누가 누구에게 밀리고 누가 누구에게 이기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사회의 본질은 5백년간 그대로다. 조선의 역사는 왕과 신하와의 싸움, 신하와 신하간의 싸움으로 정리된다. 조선의 건국과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은 모두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새운 사건이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기득권이 생긴다. 그러면 왕은 이 기득권에게 휘둘리거나 이 기득권의 힘을 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은 집현전, 홍문관, 규장각 같은 기관들이다. 이것들은 왕의 정치적 친위 세력을 기르는 역할을 한다. 집현전은 세조에 의해 폐지되는데 일단 세종이 죽자 집현전이 기득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홍문관이 서는 식이다.
권력싸움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권력의 변화에 과연 기술적 사회적 사상적 변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런 것이 별로 눈이 띄지 않는다. 결국 조선 역사는 미래 지향적으로 흘렀다기 보다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무한 반복의 이야기처럼 보여진다. 조선은 애초에 유학적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세워졌다. 그리고 그 이상은 세종에 이르러 잘 꽃핀다.
문제는 기술적으로 사상적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 시간이 지나면 모순이 누적되고 그러면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주장이 나오기 마련이다. 국토를 팽창하거나 외국과의 무역으로 더 강성한 나라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은 그런 사회적 이득이라는 차원에서, 사상적 수준에서 변하지 않았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도덕정치를 이야기하다가 끝났다. 조선말엽에 이르러서야 실학이니 서학을 배운다느니 동학이니 하는 이야기가 좀 나오다가 망했을 뿐이다. 조선 시대의 사상논쟁이란 마치 찬잔속의 싸움처럼 좁디 좁은 세상안에서의 차이를 논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순이 산처럼 쌓이고 그걸로는 문제가 더 이상 해결이 안되는 상황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답만 계속 내놓는다.
이런 조선의 역사는 교육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조선을 주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인데 이들이 승리하는 이유는 서원이나 향교의 형태로 계속 제자들을 불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림이 승리한다. 동인이니 서인이니 북인이니 남인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림세력 내부싸움이었다.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이 분열할 때 그 주제는 왕은 사대부 수준인가 아니면 그 위인가를 가지고 싸웟을 정도다. 즉 사림의 건방짐은 이미 왕조를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사림세력이 인간평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할 구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적 정체의 근원은 중국 정확히 말하면 명을 사상적 권위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즉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사상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충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명나라같은 나라에서 알아서 생각해 봤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비약이 불가능해진다. 안그래도 기존의 패러다임은 눈을 멀게 하는데 작은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질문하고 파고들어야 새로운 패러다임이 보이게 되는데 잘 모르는 것은 막연히 남에게 기대면 위화감을 무시하게 된다. 주자나 공자같은 성현의 말씀 혹은 명같은 선진국 학자의 말은 틀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권위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얼마나 미국 혹은 서양을 사상적 권위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의 머리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어떤 개념들을 수입하고 그 개념들의 지엽말단적인 조정에만 머리를 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선거란 무엇이고 복지나 교육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어느새 그런 것들은 서양에 의해 정의된 방식으로만 생각된다. 그런 개념을 줄줄이 늘어 놓으며 이런 것도 모르냐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의 후예들이며 우리는 사상적으로 발전이 없다는 증거다. 어느새 우리는 책을 읽지 않는다. 읽어도 한국작가의 책을 안 읽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작가의 책을 읽는다. 한국사람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지혜란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것이고 사상은 역사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경험과 내 역사를 무시하고 보편론만 보는 척하면서 실은 남의 경험과 남의 역사만 보는 사람은 지혜고 사상이고 정체된다. 한계가 발생해도 내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내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사람들 교육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시스템을 가져와서 안되면 미국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이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는게 아니라 남이 주입한 형식에 집중한다. 물론 문제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외국의 시스템에 맞지 않아서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인간적 성장이 필요하다.
해방이후의 한국을 보면 조선역사의 반복인 것같다. 전국은 빨간 십자가로 덮혔다. 무수히 많은 교회는 기독교도들을 양산했다. 우리는 완전히 서구화되어 서구적인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많은 학교가 또 서구형 사고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우리는 극빈의 삶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서구적 지식의 도움을 크게 얻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우리는 정체되기 시작한다.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양극화가 심해진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살률은 크게 늘어났다. 주입식 교육은 미친듯이 강화되어 이제는 초등학생도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가 없다. 창의력도 주입받아야 하는 시대다.
조선이 망하는 것처럼 우리는 천천히 망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금내는 것이 문란해지고 기득권층은 군대에 가질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날로 쓸데 없는 것같고 현대의 과거시험이라고 할 인재 등용문은 공평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세간의 법감정과 법원의 판단은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얼마전에 순수문맹률이 매우 낮은 한국은 실질 문맹률은 오이시디 국가중 최고로 높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즉 글자는 알지만 내용이 있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최저라는 것이다. 이것도 한국이 사고에 있어서 정체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뭔가를 배우고 생각하는 것의 효과를 믿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차피 목소리 크고 돈 많은 놈이 이기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홀로 광야로 가는 용기와 그걸 아끼는 풍토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말로만 혁신을 외치는게 아니라 진짜로 시야가 넓어야 한다. 스스로의 일탈과 남의 일탈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인생 어떻게 살까를 결정한다면서 평생 가본 것 해본 것이 지극히 제약되어 있다면 뭘 기준으로 인생진로가 결정되는 것일까.
그러나 현실은 점점 숨막히듯 우리를 죄어오기만 하는 것같다. 아파트처럼 우리의 삶도 똑같이 찍어낸 삶이 되는 것같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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