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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선을 그으면

by 격암(강국진) 2015. 10. 31.

미래예측이란 결국 이제까지의 추세를 바탕으로 선을 이어서 긋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을 긋는다는 것이 항상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미래로 선을 그어보자. 


우선 미래에는 결혼이란 제도가 없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늦게 결혼하고 점점 더 아이를 낳지 않는다. 결국 아무도 결혼을 안하고 아무도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뒤집어 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이 옳고 그른게 중요한게 아니다. 우리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런 생각이 옳다면 왜 추세가 뒤집어 질까? 어디까지 간 다음에 뒤집어 질까? 물건을 외상으로 사면, 집을 대출로 사면 어떻게해서든 돈을 지불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사실일수 있다. 다만 그 댓가는 상상이상으로 비쌀 수도 있다. 


오늘날 도시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늦게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에는 뻔한 이유가 있다. 성공한 도시인이 되면서 그렇게 하기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큰 재산을 물려줘서 능력이 넘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그렇지 못한 젊은이는 대개 대학졸업하고 취업하고 살면서 결혼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일단 일이 많아서 바쁘고 두번째로는 돈이 든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렇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행복한 부부도 있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결혼의 의미의 절반이상이다. 물론 우리는 게이결혼을 결혼이라 부를 수도 있고 아이없는 결혼도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나는 만약 어떤 병때문에 모든 남녀가 불임이 되어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게 된다면 결혼제도는 사라질거라고 믿는다. 그건 그냥 동거다. 뭐하러 재산적인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사회적인 의무와 권리를 만들어 그것을 소중하게 강조하겠는가. 결국 결혼제도의 핵심에는 두 남녀가 만나서 아이를 만들고 혈연으로 이어지는 가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의 여러 변형도 가지로 인정되는 것은 몸통이 있기 때문이다. 몸통이 무너지면 결혼제도의 기본 존재이유가 사라질 것이다. 결혼이란 말이 남더라도 그 의미는 한없이 진공에 가까워 질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더 비싸질 것이다. 특히 현재의 사회 패러다임을 유지하면서 그 패러다임 속에서 좋은 직장이라고 불리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일은 더 그럴 것이다. 이제까지 점점 그렇게 되어 왔으니까. 1980년대에 대학생 해외연수는 재벌집이나 꿈꾸는 것이었다. 요즘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를 서넛씩 키울 수가 없다. 돈이 너무 드니까. 이것도 미래로 추세에 따라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태어나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과연 미래에 그들의 부모처럼 아이를 낳아 기르는 가정을 가지려고 할까? 이미 한계상황이다. 결혼연령이 너무 올라가서 여성들이 첫아기를 낳는 시기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 나이 40의 남자가 결혼하면서도 그 이유때문에 자신은 20대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경우를 본다. 아니면 아이없는 결혼을 설계하기도 한다. 50에도 은퇴하는데 40에 결혼해서 아이를 어떻게 낳겠는가. 이러다가는 소수의 부유층이나 자식낳고 사는 결혼을 하고 나머지는 그냥 연애나 하면서 살겠다고 하지 않을까? 


게다가 대개 더 어린 세대로 갈수록 사람들은 돈 안들이고 사는데 익숙하지 않다. 즉 1970년대의 부부처럼 살면서 아이를 키우라고 하면 할 수 있다고 해도 키우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바캉스도 모르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아니라 해외여행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다. 그들이 더 많은 소비와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기꺼이 아이를 키우겠다고 할 것인가? 


미래로 선을 또 그어보자. 미래의 한국인들은 쪽방에 살 것이다. 물론 그 쪽방은 지금의 쪽방과는 다르다. 아마도 거의 우주선처럼 보이는 대단한 장치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서 현대식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낡은 성이나 한옥에 사는 사람들을 종종 불쌍하게 생각하듯이 그 쪽방에 사는 사람들은 현대의 아파트를 불쌍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다른 것은 창조해도 공간자체를 창조할 수는 없다. 화성이니 달에 사람이 사는 미래는 아직 멀다. 게다가 지금도 지구에 공간이 없어서 뉴욕이나 서울의 집값이 그렇게 비싼 것이 아니다. 


결국 공간을 절약하고 그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매우 대단한 장치들로 채워진 작은 방들이 미래의 주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 방은 어딘가 지금의 피씨방을 닯아 있을지 모른다. 일본에 있는 캡슐호텔도 닮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바깥에서는 여러가지 서비스를 구매할 것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욱 더 집의 많은 부분이 시장화된 세계일 것이다. 식당이든 거실이든 다 시장화된 미래다.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비싸고 작은 쪽방이다. 결혼하지 않았으니 가족도 없다. 벌통같은 쪽방에 들어가 잠을 자면서 사는 것이다. 


미래인들은 빚이 엄청날 것이다. 결혼제도가 없고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지 않으니 아이들은 외부에서 유입되어야 한다. 20세기에만 해도 대학교 학비는 부모가 내는 것이 상식이었다. 아니면 아예 대학을 못가던가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거의 모두가 대학을 가고 학비대출이 쉬워졌다. 대출이 쉬워지니까 학비는 더 빨리 비싸진다. 부모가 돈을 내지 않고 학생들이 대출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미래로 선을 그으면 아이들은 아예 초등학교때부터 자기의 양육비를 빚으로 쌓아갈 것이다. 그러니 사회로 나올 무렵쯤이면 평생갚아야할 빚이 이미 엄청난 것이다. 누가 이런 일을 하겠냐고 하겠지만 지금도 가난한 나라의 학생들을 재능을 보고 뽑아서 미국같은 나라에서 키워주겠다고 하면 조건이 나빠도 아이들을 유학 보낼 사람은 많다. 한국사람도 엄청난 돈을 써서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자식을 유학보내는 사람이 많다. 거기서 한발만 더가면 아이가 유학비용의 일부를 대출로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겠냐고? 20세기에는 대학교 학비를 융자로 빌려서 졸업할 무렵에는 몇천만원씩 빚이 생기는 미래도 믿기 힘들었다.  


이런 미래는 우리에게 끔찍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로 선을 하나만 더 그어보자면 미래인들은 지금의 우리를 보면서 현재를 사는 우리보다는 그들의 방식이 더 좋다고 말할 것이다. 이상하다고? 지금의 한국인들중에 1970년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벌통같은데에서 외롭게 사는 삶을 어떻게 견디며 그것을 더 좋다고 하는게 말이되냐고? 한국에 아파트가 지어질 때 한국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느꼈다. 지금 전국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칸칸이 많은 사람들이 살며 대가족은 무너지고 핵가족이나 일인가족이 그 칸칸에 행복하게 산다. 사회가 바뀌면 좋다는 기준도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야 그런 미래가 온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미래가 온다고 해도 미래인들은 그걸 그다지 나쁜 것으로 생각할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세는 뒤집어 질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간단히는 아니다. 모순이 축적되어 사회적인 큰 변화가 오기 전에는 그렇게 되기 힘들 것이다. 경제적 정신적 변화가 폭발하지 않으면 추세는 뒤집어 지기 힘들 것이다. 언제 그런 변화가 오는가. 현재를 사는 나로서는 그런 폭발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안좋아지는 것이 보이니까 그렇다. 


그러나 실은 그런 폭발이 언제 오는가는 둘째치고 올지 안올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미래에 안착할지 모른다. 우리는 과거의 가부장적 대가족을 떠올리거나 봉건제도를 떠올리면서 미개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인들도 그들의 삶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지금의 우리 삶, 예를 들어 아이가 있는 가정속의 삶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인간이란 자유의지가 있고 선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맞다면 미래가 바뀔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것도 진실이 아니라면 희망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면 미래가 우리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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