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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학

by 격암(강국진) 2015. 11. 5.

내가 물리학도 교육받은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국의 지적 풍토내지 지적 전통에 대해 불만을 가져왔다. 한국의 지성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것을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인은 언어에 갇혀서 체험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더 비합리적이고 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회로 남는 것이다.  세상이 더 답답해 지는 것이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대개 예절에 대한 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던 조선 주자학자들을 좋게 보지 않으며 그들이 세계를 열린 눈으로 보지 않고 경전속의 언어에 갇혀서 살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활동이란 어디까지나 경전속의 언어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조선은 세계의 발전에 뒤쳐졌고 결국 망했다. 


우리는 대개 이런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서구와는 달리 주체적으로 과학이 발달되었다기 보다는 한꺼번에 서구 과학을 받아들인 것이 사실인 한국에서 과연 오늘날의 한국사람들은 정말 조선시대 사람들과는 많이 다를까? 우리는 지금 과학적 전통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사농공상같은 수준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와 뉴튼같은 인물들이 대표하는 서구의 과학혁명의 근본은 사물을 구분하는 것에서 측정하는 것으로 관점을 전환한 것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에는 그저 탁자에 앉아서 이리저리 말만 하던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측정하고 실험해 보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과학은 발전했다. 


그런데 전에는 그저 생각만 하던 사람들에 비해 직접 실험하고 측정하는 일을 하던 현대과학의 선구자들은 그럼 갑자기 부지런해진 것일까? 그 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게을렀을까? 이런 차이를 단순히 게으르다라던가 부지런하다라는 인성의 차이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적, 철학적 차이로 생각해야 한다.


그 차이는 결국 직접적이고 새로운 체험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과 성장을 준다라는 믿음이 강해졌다고 봐야 한다. 당신이 만약 도서관에 갔는데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체험이 이미 그 책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떤 가치있는 진리를 찾기위해 그 도서관의 책들을 파고드는데 집중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그리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와서 여행기를 썼으니 내가 그리스에 가서 새삼 다시 살피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그리스 여행기들을 다시 읽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는 일이 그리스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게되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는 애써 돈과 시간을 들여서 그리스에 가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지식으로 정론을 흐트러뜨릴 수도 있는 일이 된다. 


이 이야기들은 조선시대의 사문난적 논란과 닮아 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오래전에 눈이 밝으신 성현들이 다 살피셨으니 그 관찰결과를 다시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이면 충분하지 어설픈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직접보고 이리저리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서구의 중세이전의 사고방식과도 같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직접적 체험 즉 실험적 검증을 강조하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과학기술을 철학적 도덕적 가치 수준에서가 아니라 돈을 벌고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도구의 수준에서만 파악한다. 그러나 그 시작에 있어서 과학기술이 가지는 의미는 그런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체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모험의식이다. 거기에 있는 게 뭔지는 이미 다 밝혀졌다는 사고 방식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준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뉴튼이 과학연구를 했던 것은 자연법칙의 발견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걸로 물건 만들어서 돈을 벌려고 했던게 아니다. 한마디로 과학도 기술도 진리나 구도의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제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그것이 인터넷이나 핸드폰이나 로켓이나 비행기가 주는 체험을 대신 할수 있을까?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체험을 대신할 수 있을까? 현대의 자본주의적 교육에 중독된 우리는 그것들의 경제적 이득이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그것들을 이 세상에 가져온 과학 기술자들은 그 것들이 이 세상에 보여주는 새로운 진리에 흥분했을 것이다. 달에서 지구를 보는 체험, 시속 5백킬로로 하늘을 날아보는 체험이 괴짜 과학기술자들을 흥분하게 만든 것은 돈계산이 아니었다


나는 인문학 고전들을 읽는 것을 추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새로운 기술이 인류를 이 정도 수준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즉 직접적 체험을 통해 세상을 보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가운데 인문학 고전이든 신간이든 필요한 것이지 언어 속에 갇혀서 니체니 가다머니 화이트헤드니 혹은 그 어떤 누군가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일에만 빠져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공부를 일종의 구도자가 하는 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정신적 가치를 위한 것으로 새로운 체험을 통해 인생과 세계의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과학기술에 경제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걸 그렇게만 볼 때 우리는 결국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던 선비는 제일 고귀한데 왜 기술자들은 천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 장인들이 있었는데 왜 그들은 예술가로 취급받지 못하였으며 일본은 도공들을 빼앗아 가서 도자기 수출로 엄청난 이득을 올렸을까? 혹시 현대의 한국도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수 기초과학은 무시하고 응용분야만 후원하면 돈이 벌리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과학 기술에 대한 비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과학 기술의 경제적 이득도 누리게 되지 않는다. 돈되는 프로그램 만들라고 프로그래머들에게 호통치는 경영자가 있는 나라와 프로그래머가 세계를 바꾼다면서 그 사람들을 사회개혁에 대한 비전을 가진 지도자같이 바라보는 나라중 어느 나라에서 정말 돈되는 프로그램이 나올까?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도공들을 내쫒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나라에 미래의 먹거리가 없다는 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지적 풍토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조선시대처럼 반쪽이다. 인문학에서 쓰는 말도 언어고 과학 기술분야에서 쓰는 것도 또하나의 언어라고 하면 세상을 보고 기술하는 언어는 여러개가 있는데 그 중하나에만 빠져서 그 안에서 계속 답을 찾는다. 그것은 과학전공자가 보면 별로 쓸모 없는 추상화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당연히 학문분야 바깥 사람들의 인문학공부도 말하자면 고등학교 참고서 보듯이 공부하는 것이 되고만다. 나를 보고 나의 체험을 보고 지금 서있는 곳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공부가 아니라 백과사전외우듯이 지식을 머리에 집어 넣는다. 한줄의 문장에서 얻는 체험을 얻으려고 하고 거기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인문학공부는 과학기술과는 다른 것이며 과학기술은 전문직종의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들과 산으로, 지방으로 나가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통상 인문계와 이공계로 전공을 분류해서 이공계의 학문이란 인문학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분야를 위해서는 따로 과학철학같은 분야가 있다고 할지도 모르며 애초에 분류 자체가 만악의 근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수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하는게 인문학공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일까? 사실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결여되어 있는 인문학 공부라는 것은 그것일지 모른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세상에 돌아다닌지도 오래되었다. 나는 특히 한국에서 이런 말이 더욱 실감나는 것은 한국의 지적풍토가 아직도 반편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미 세상은 과학기술분야의 발전때문에 급격히 변해가게 된지가 너무도 오래다. 그런데 인문학분야가 자기안의 언어에만 빠져 있으면 그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다. 태블릿의 정치적 의미, 가상현실의 미학적 의미, 유전공학의 윤리적 의미, 빅데이터 기술의 역사적 의미가 훨씬 더 많이 강조되어야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야에 대한 논의가 모두 외국서적의 번역에 매달리게 될때 한국의 인문학은 쓸모없는 죽은 언어의 유희로만 여겨질 것이니 결국 인문학의 위기는 더 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체험의 중요성을 잊은 한국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진취성의 상실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직접 경험하면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모험심과 진취성을 만든다. 진짜 세상은 광대하게 펼쳐져 있으니 정신은 그것을 추구하라고 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의 지적풍토는 그것을 권위로 억누른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것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한국에서의 과학기술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인문학공부라는 게 뭔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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