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민주주의의 역설

by 격암(강국진) 2015. 12. 14.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다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이 운영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해서 민주주의란 다수의 욕망이 얼마까지 자제될 있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 사회가 좋은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에는 이것이 있다. 우리는 독재에 저항하는 것만 배웠을 다수파의 횡포에 저항하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


독재란 무엇인가. 사람 혹은 소수의 지배계층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옳지 않다. 그래서 독재에 반대해서 싸우다보면 우리는 다수의 뜻에 의해 일이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평범한 인간, 평범한 군중에 대해 환상을 가지게 되면  독재는 돌아온다. 독재는 정당화 된다. 독재세력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바로 대중의 욕망은 조절할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독재자가 있어야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평범한 보통사람은 성인군자가 아니고 욕망을 가지고 건망증도 심하고 게으른 존재다. 대중은 위대하고 성스럽기만 존재가 아니다


다수결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봉천1 주민과 봉천2 주민이 모여서 매주마다 어느 지역을 청소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하자. 그런데 편의상 봉천1 주민이 다수파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 대중의 욕망이 조절되지 않고 다수파의 뜻대로 일이 결정된다는 원칙만 따르면 청소는 매번 봉천1 지역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는 소수파의 피를 빠는 민주주의다


한국사회에서 단순한 일이 너무도 많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목격해 같다. 최근 안철수의 탈당선언으로 야권이 시끄럽다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나는 사태도 근원으로 가면 이것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다수파는 온갖 핑계를 대고 일단 자신들의 욕망과 의지만 추구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다수결에 의한 결과라고 정당화한다. 그들은 언제나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나 다음번에는 그들도 양보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대개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의 욕망이 달성되고 나면 흩어지기 쉽상이다. 약속은 계속 부도가 난다. 소수파의 동력은 항상 파괴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새로운 정치세력은 나타나기 어렵다. 선거때만 되면 3등은 2등으로부터 선거패배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된다. 단합하지 않아서 1등이 이기게 해줬다는 것이다. 3등도 이런데 4 5등쯤 되면 사회파괴세력쯤으로 불리기 쉽다


악순환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정치는 소수의 우두머리들의 게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의롭지 못한 우두머리는 흔히 독재자로 불린다. 정의로운 우두머리는 대개 순교자가 된다. 안철수든 노무현이든 어떤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지지를 받을 때는 괜찮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하려면 세력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소수파가 된다. 그러면 그들은 앞에서 말한 벽에 부딪힌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그들은 압살되게 된다. 일만 하고 희생만한다음에 성공하면 영광은 빼앗기고 실패하면 같이 망한다. 아니 소수파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소수파라도 세력이 되고 보면 우두머리는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빚을 지게 된다.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인데 그들이 이용만 당하게 만드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쯤 되면 일은 금방 흙탕물이되고 많다. 개혁적인 인사는 금새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창출해낸 세력에게 거꾸로 공격당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은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싶은데 그가 주장하는 것은 언뜻보면 소수파가 다수파의 의견을 꺽겠다는 것으로 보이게 되고 결국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세력을 아예 모으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대신 많은 적을 만든다.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설렁탕도 사주지 않는다고 욕을 먹는다. 국민적 지지가 계속되면 많은 좌절과 위기를 넘길 있지만 그게 끝나면 국가적 수준의 압력을 세력없이 개인의 입장에서 받아야 한다. 이건 집안을 망하게 하고 순교자가 되기 좋은 입장이. 한마디로 미친짓이다. 사람들은 정치가의 변절에 실망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러면서 자신이 앞에 나선 정치가에게 나가서 죽으라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존경합니다. 그러니 나가 죽으세요. 아니 안죽습니까 당신도 나쁜 놈이군요하는 식의 논법이 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는 등떠미는 대중만큼 무서운 사람들도 없다


문제의 근원은 집단의 구심력이 이익에서 나온다는 것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많이 포기하기 위한 노동자 단체라는 것은 아주 엽기적으로 들린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세력이란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아주 당연하게만 생각한다. 정치세력은 집권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같은 말은 마치 기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같은 말처럼 쓰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당연해 보이지만 은근히 정치세력이 권력만 추구하고 기업이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말들이다. 말하자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폭력남편들이 폭력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남자란 원래 폭력에 익숙한 존재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식인 것이다. 이건 기괴하고 은근한 정당화다. 그리고 앞의 두가지 말도 그렇다


일찌기 맹자가 말했듯이 국가를 논할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이득이 아니라 정의와 선같은 것이다. 우리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지 이득을 성취하기 위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모여서는 안된다. 그런 집단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안철수가 해설자의 입장에서 가치를 논하고 정도를 논할 그의 입장은 탄탄했다. 그러나 그가 일단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가가 되고나자 입장은 달라진다. 그는 정치를 안할 한국정치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권바깥에서는 우리는 정의와 선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정치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익에 지독히 중독되어 있다


이익분배, 경제, 욕망 따위는 세상에서 피할 없는 현실이지만 그것은 상위의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어야 한다. 정신이 이익을 지배해야지 이익이 정신을 지배하면 안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점에서 문제가 있다. 망한 나라가 순전히 자력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구심력이 약하다. 그러니까 이익이 정신을 지배하기 쉽다


최근 이스라엘의 반재벌법의 시행과 결과가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재벌독점이 이스라엘에서 문제가 되니까 국회가 반재벌법을 시행해서 실재로 몇년만에 많은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핵심 정신이 이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공동체의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핵심적 가치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현실에서 반영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한 민주국가의 법전을 베끼는 것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지 못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와 맞질 않으면 혼란만 생길 뿐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되고 만다. 변해야 하는 것,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높은가. 거의 이런 말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다. 일의 핵심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나 법같은 형식에 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가득하다. 야권이든 국가든 지방자치든 정치든 어떤 제도를 고치면 일이 좋아질거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흔하다. 그러므로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모순이나 독재로의 회귀가 자꾸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너무 추하게만 보고 어떤 사람들은 가당치 않게 장미빚 환상만 가지면서 결국 다수에 의한 소수의 착취가 일어나게 한다. 이래서는 탈출구는 없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