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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노자 문제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5. 11. 3.

최근에 외노자 문제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자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외노자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제가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글은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니까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도 아닐 것입니다. 


외노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저는 외노자 문제를 일본 개국과 둘러싼 메이지 유신의 문제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개국파와 쇄국파로 나뉘어 싸웠지만 답은 개국도 쇄국도 아니었습니다. 답은 하나 된 일본이었죠. 왜냐면 사실 개국파의 주장도 쇄국파의 주장도 모두 옳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동시에 자신이 틀려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개국파는 개국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말하고 쇄국파는 개국을 하면 일본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둘은 서로 어느 쪽이 더 옳은가를 가지고 싸우지만 사실은 둘 다 옳고 둘 다 틀렸던 겁니다. 개국은 피할 수 없는 대세였고 개국을 하면 일본은 죽는 겁니다. 왜냐면 당시의 일본은 번이라는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주는 각자 왕이나 마찬가지였죠. 외국이 들어온다면 일본이라는 국가공동체의 개념이 약한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국을 무조건 막는다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결국 개국은 이뤄졌죠. 


메이지 유신이란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을 하나로 뭉치는 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표면적이라도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통치한다라는 형식을 달성하는 것이었죠. 개국은 시대적 대세이니 개국을 하되 일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개국의 정도가 제한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정없이 외세가 밀려들어와서 개국을 어떤 제한적인 수준에서 멈출 수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공동체에 대한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없이 개인으로 있으면 그 지역에 경제적 이익이외에는 관심과 애정이 없는 외세가 들어와서 그 지역의 질서와 이익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외세에도 종류가 있고 여러 얼굴이 있습니다. 친구가 들어올 것인가 도적이 들어올 것인가는 외세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상황에도 달려 있습니다.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 즉 외노자가 들어오는 문제는 이미 시대적 대세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현 상황에서 법하나 고치는 것같은 것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막으려는 노력은 죽창들고 미국인들과 싸우자고 하던 일본 쇄국파와 비슷합니다. 또 법적인 장벽은 아마 만들어 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정치적 엘리트는 좌나 우나 모두 개국찬성파이기 때문입니다. 개국파 쇄국파의 싸움은 금새 극우정당의 부상이니 파시스트들이 한국을 지배하려 한다느니 하는 비판을 사방에서 받을 것입니다. 


지금도 답은 공동체에 있습니다. 한반도 지역의 질서와 이익을 지킬 공동체가 없으면 외세가 지나치게 그 지역에 들어와서 그 질서와 이익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친구의 얼굴이 아니라 도적의 얼굴을 가진 외세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답은 개국과 쇄국중의 하나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공동체란 문화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화적 질서는 하나의 필터로 작용해서 그 지역의 삶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사람만 그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합니다. 즉 문화적 질서가 한국인을 보호하는 필터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은 그 문화적 질서, 공동체가 약하다는 것입니다.미국만 해도 이민때문에 문제도 많지만 결국 무슬림이 가건 유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이민을 가건 미국문화의 틀에 압도되기 마련입니다. 세계적 문화패권을 가진 미국문화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중국인 아랍인 미국인 일본인등 여러나라사람이 와서 어느 정도나 한국문화를 존중하게 될까요. 부자나라는 당연하고 중국인들도 한국을 문화적으로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조선족도 중국에 더 애착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한국이 식민지시절과 가난한 군사독재시절을 거치면서 공동체에 관련된 많은 정신적인 부분을 파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맞게 발전적으로 과거를 수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한국에 넘쳐나는 것은 결국 시장주의이고 자유주의입니다. 인간은 없고 그냥 사람을 우르르 집어넣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무한 경쟁주의입니다. 그러면서 노벨상이나 닌텐도 게임기나 애플 같은 회사는 왜 한국에 없냐고 질문합니다. 짐승의 규칙은 짐승을 만들 뿐입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짐승이 어떻게 만듭니까. 공동체가 파괴된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괴롭지만 젊은이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진게 없고 아는 것도 없는데 살아갈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공동체가 없고 무한경쟁이라면 기성세대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공동체가 없고 문화적 질서도 없으면 외세는 문제가 됩니다. 친구의 얼굴을 가진 외세와 도적의 얼굴을 가진 외세가 구분되지 못합니다. 남북분단에 의해 고립된 것은 북한만이 아닙니다. 한국도 고립되어 자기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두려움과 욕망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치가들중에 군대문제가 이렇게 가볍게 다뤄질 수가 없습니다. 국가공동체를 위해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공인으로 나와서 선거에 당선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애국심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때가 올 때 한국은 망할 것입니다. 


한국의 과거는 한국의 지적 혹은 실천적 풍토도 망쳐놓았습니다. 성장이라는 개념이 왜곡되었습니다. 한국은 선진국들이 이룩한 것을 쫒아오는 일을 수십년이나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일본에서 온 것을 열심히 외우고 베끼는 일이 곧 발전이라는 생각에 익숙합니다. 정답은 교과서에 있으니 그것만 외우면 시험성적 잘받는 것입니다. 지금 서있는 여기에서 주변을 살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는 저쪽에 있으니 어떻게 하면 그리로 뛰어갈까를 생각하는데 익숙합니다. 남을 베끼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리나 정답은 생명이 성장하는 것처럼 단계적으로 성장한다는 개념은 잊혀지고 그냥 객관적으로 정답이 떡하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로또 맞듯이 한방에 정답으로 직행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답은 하나니까요. 사람들은 종종 너무 쉽게 보편주의에 빠져듭니다. 그저 여기서 1킬로그램인 것이 유럽에서도 1킬로그램이듯 인간은 인간이고 국가는 국가입니다. 그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파시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을만들기를 해서 성공하는 지역들이 있습니다. 그런 지역사람들은 마을이나 공동체가 키워 나가는 생명체 같은 거라는 것을 잘 느낄 것입니다. 마을 공동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마을의 노인들과 술마시고 고스톱쳐드리는 마을 이장은 프랑스 마을이나 일본마을이 이렇다 저렇다하는 말이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지금 있는 인간을 먼저 볼 것입니다. 공동체가 깨져버리면 더 이상 성장하고 변화하지 못하니까요. 마을은 키워가는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립하는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은 화려한 선진국의 사례에 중독되어 너무 쉽게 한국인이라는 이 지역의 인간을 그냥 바라보는 일을 포기 합니다. 공동체 만들기를 실천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화려한 외국의 결실을 부러워만 하고 위에서 아래로 법을 바꿔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의도가 좋아도 결국 자유시장주의 중독자들과 다를게 없어지기 쉽습니다. 그들은 다른 인간들을 체스말처럼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성장하려 하고 인간을 보기보다는 정답으로 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물론 체스말이 아니니까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든 보수든 한국에서 정치적 엘리트로 구분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개국찬성파로 보입니다. 그들은 법하나 바꾸고 길만들고 건물세우면 발전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심고 인간을 키우고 마을을 키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외노자 문제에 관련된 한국인의 입장들


외노자 문제에 대한 한국의 솔직한 현실은 기괴합니다. 외노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이 노예를 수입한다는 말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보면 외노자가 들어오는 것에 찬성한다는 말이 노예수입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한국에서는 임대아파트 주민은 분양아파트 주민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니까 서로 왕래를 막자고 벽을 세우는 일도 벌어지곤 합니다. 한국의 노동자도 인간적인 모멸감에 자살을 하기도 하고 부당해고로 고통받기도 합니다. 경제수준은 몰라도 문화적으로 한국은 유럽 미국 일본같은 선진국보다 훨씬 덜 민주화 된 나라입니다. 나이 학벌 직업같은 조건들에 따라 사람을 차별합니다. 권위주의가 넘쳐 흘러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군대에서 부하다루듯하는 일이 많고 갑질이 많아서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자살률이 전세계 최고고 출산률과 행복지수는 바닥입니다.


외노자에도 여러종류가 있습니다. 외국인 프로야구선수도 외노자고 외국인 대학교수도 외노자죠. 그러나 숫자로 보았을 때 다수를 이룰 것은 저소득층 외노자입니다. 우리가 미국같은 세계패권국가도 아닌데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한국이 문제가 될정도로 많이 올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은 외노자를 무슨 혐오시설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입니다. 즉 외노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찬성하지만 내 집이나 내집옆에는 아냐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죠. 이건 외노자를 들여오는 것에 찬성하는게 아니라 노예를 수입하는것에 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위선적이거나 자기성찰이 없습니다. 즉 사실 노예를 데려오고 싶은 거면서 그렇게 말을 하지 않습니다. 또는 지금보다도 더 열악한 노동조건을 노동자에게 주려고 하면서 그걸 시장의 논리로 피해가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의식하면서도 욕심에 외노자가 증가하는 것에 찬성한다면 위선적이고 몰라서 찬성한다면 자기성찰이 없는 것입니다. 외노자가 아주 많은 동네는 이미 한국에 여러곳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가족데리고 거기가서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노자가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없고 한국인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을 바꿔야 한다면서 열심히 캠페인을 합니다. 한국인이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가정이 가정폭력과 폭언과 불화가 넘쳐난다고 해봅시다. 이 상황에서 가정의 평화를 먼저 챙겨야 하겠습니까. 거기에 입양아까지 던져넣고 입양아 사는데 환경이 나쁘니 우리 더 좋은 가정이 되도록 해봅시다라고 해야 겠습니까? 입양아는 가족의 화합을 달성하는데 더 큰 장벽이 되어 입양아를 받아도 큰 문제가 없는 가정이 되는 미래는 영영 사라지고 마는 거 아닐까요? 자기 문제도 넘쳐나는데 문제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할까요? 지금도 사회적 통합이 문제인데 날로 더 분열하는 사회로 가는 것이 당연할까요? 


우리는 정말 한국인을 미워 하는가. 


이제 핵심적 질문을 던지고 이 글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공동체는 만들어 지지 않거나 약화되거나 하는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문화적 구심력을 강화하여 국가와 국가로 인력이 움직이는 시대에 한국을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짧게 말하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은 제가 내릴 수 있는게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작은 공동체란 친구나 부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친구사이나 좋은 부부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제3자가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제한적일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여러 차원에서 사귐을 원한다면 공동체가 생길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안되는 일이겠지요. 


다시말해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서로를 좋아하면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지만 한국인들이 서로를 미워하면 무슨 짓을 해도 문제는 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한국인을 좋아하는가 미워하는가를 흑과 백을 가르듯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인이 한국인을 미워하는 모습 참 많이 보았고 그에 당하는 증거도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 일본 이스라엘의 세나라에서 교포사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한국안에서는 어쨌건 돌아가는 문화적 관습이 외국이라는 무대에서 실패하는 것같은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패거리를 지어서 싸우고 뒤로 나쁜 이야기하는 것이죠. 한국사람의 일상에는 상상이상으로 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호형호제 쉽게 하고 서로 꼭 직급이나 학위를 부릅니다. 의사의 아내는 레지던트의 아내에게 높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것들이 외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문제를 안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주된 주거는 아파트입니다. 저는 그 의미도 한국인들이 한국인을 미워하는 증거가 아닌가 의심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의 최대특징이 서로 얼굴 안보고 살수 있는 주거라는 것입니다. 구조가 그러하고 작은 공간에 엄청난 주민을 집어넣는 것이라서 이웃이 의미가 별로 없어집니다. 군중속의 고독이랄까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가 편하다고 하고, 아파트에 안사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 모습은 종종 인간혐오로 보입니다. 즉 주변사람 안보고 사는게 너무 편하다는 식인 것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좋아하는거 사실일까요?


세월호 사건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고 그때문에 가슴아파하는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경찰과 정부가 그 부모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던가요? 경찰이 감시부터 시작하더군요. 학생들 빈소에 가서 행패부리는 사람도 나타나던데 그런 일에 충격받는 국민들이 납득이 갈정도로 그들에 대한 보호가 이뤄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처받고 이민가겠다는 부모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저는 한국인이 한국인을 미워한다던가 좋아한다던가 하는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질문의 핵심이 공동체일때 우리는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을 수 있지만 결국 그 궁극에 가면 답은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좋아하면 문제는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긋지긋해서 안보고 살겠다고 갈수만 있으면 한국인들없는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있습니다. 그 애정은 산과 나무와 강에 대한 것일 때도 있고 산책길에 대한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가던 가게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을을 지키고 살면서 나이들어가는 이웃들에 대한 반가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고장의 특별한 음식에 대한 것일 때도 있고 명절 관습에 대한 것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한국을 보면 개발로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집들도 밀어 버립니다. 오래 가는 가게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국보다 이사를 더 많이 다녀서 아는 사람들도 다 흩어져버립니다. 주거 안정, 직장안정이 안되니 추억이고 애정이고 공동체고 다 파괴된 면이 있습니다. 


명절 풍경은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한복입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강이고 산이고 다 밀어서 개발하고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딜가나 정답으로 점프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을의 모델을 베껴서 건물을 우수수 세우고 가게를 줄줄이 만들면 거기가 좋은 동네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생기는 것은 돈벌려는 장삿속만 잔뜩 보이는 거리입니다. 공동체가 없으니 서로 싸우고 경쟁만 합니다. 그래서 가끔 좋은 동네가 생겨도 금방 상업화로 볼품없어집니다. 방문객으로 그런 곳에 가보면 볼품이 없습니다.  


외노자 문제를 생각하다가 결국 저는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끝내게 됩니다. 한국인은 정말 한국인을 미워하는걸까요. 이 질문에 멋진 반론이 나오지 않는다면 문제는 점점 꼬여갈 것입니다. 반론이 나오려면 물어야겠지요. 우리는 정말 서로를 미워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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