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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위한 인문학

by 격암(강국진) 2015. 8. 27.

인문학 전공의 사람들은 죽겠다고 하는데 사방에서 인문강좌가 열풍인 것이 사실이고 인문학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채사장의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도 얇은 지식이라는 책이 출판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들었다. 무려 4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워낙 사방에 인문이라는 말이 붙은 강좌가 흔하다보니 인문학이란 잡학이나 상식사전같은게 아닌가 싶은 인상이 든다. 사실 애초에 인문학이란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는데 사상과 문화가 아닌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현실은 정리되어질 필요가 있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고 어쩌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먼저 말하고 싶은 말은 인문이라는 말의 남용은 사실 진지한 인문학도들에게 실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이학을 공부합시다라는 말은 드물게 쓰인다. 사람들은 물리학이나 분자생물학 혹은 자동차공학을 공부하자고 하면 어렵게 느낀다. 이런 상황이니까 우리는 모든 이공계의 학문을 묶어 이학공부합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자고 쉽게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문학을 가볍게 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문학이라는 자체가 인문학에 대한 모독 있다.

 

이것에 대해 인문학이란 원래가 얇고 넓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인문학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 거론한 채사장처럼 말이다. 말에는 진리가 담겨있고 장점이 있지만 거짓도 있고 단점도 있다. 어쩌면 이글에서 정리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그런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문이라는 단어의 남용만 문제가 아니다. 그걸 넘어서는 다른 문제는 우리는 두개의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공부해야 하는가, 우리는 공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거나 들리는데로 보이는데로 공부하다가 말다가 한다면 그런 공부는 쓸모가 없을 것이고 심하면 아니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논리적 구조상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우리는 공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야 우리는 공부할까를 답하기 쉬울 것이다. 그럼 질문해 보자.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나는 이유는 주로 소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이란 남과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다. 사람과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다른 시간과 다른 지역간의 소통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통의 중요성과 인문학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오늘날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있을 것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아무런 개념도 지식도 없이 우리는 소통을 없다. 남과도 자기 자신과도 이야기가 안된다. 자신과 소통이 안된다는 말은 말하자면 어제의 자신, 다른 상황에 있었던 자신과 이야기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짐승같다면 지금 배가 고픈데 밭에 뿌릴 씨앗을 아껴두지 못한다. 나중에 굶어죽어도 씨앗을 먹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기억력과 판단력을 가진 인간, 농사와 노동의 댓가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인간은 그렇게 먹어버리고 나면 후회한다. 씨앗을 뿌려서 농사를 짓고 그걸로 먹을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나와 배고프니까 먹겠다고 하는 나가 서로 싸우고 원망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정말 바보같은 놈이다. 그걸 못참고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현재를 사는 나는 어쩐단말인가. 이런 한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짐승같지 않아지는가. 바로 우리가 계속 자기 자신과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 학교에서, 직장에서, 부모의 자식으로서, 배우자나 친구로서의 나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서로 이어주는 것이고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과 개념과 학문이 필요하다.

 

이웃과 함께 사는 것도 그렇다. 오늘 내가 한번 양보했으면 내일 나도 한번 양보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회적인 질서다. 내가 남의 앞에서 쓰레기 버리지 않으니까 사람도 집에다가 쓰레기 버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보통 상식이라고 말해지는 공유하는 이해와 기대가 있다. 예를 들어 길에서는 옷을 입고 다녀야 하며 옆집 여자가 예뻐 보인다고 몽둥이를 들고가서 약탈해 오면 안된다는 규칙같은거 말이다.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상식이 깨지기 쉽다. 상식이 하나로 합쳐지질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인사로 입술을 대는 키쓰를 잘도 한다. 그런 일을 한국에서 남의 배우자에게 마구 하면 미친 짓이다. 형수하고 반갑다고 입술 키스하는 남동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안되는가는 과학이나 논리가 아니라 소통으로 결정된다. 이탈리아 사람은 하는데 우리는 안되냐고 묻는 것은 문화적 침략이나 자폭이다. 단지 모두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상식세계에서 같은 사회적 법칙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하고 공감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란 결국 짐승처럼 시간적 공간적으로 작은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써서 소통을 한다. 멀리 보고 넓게 본다. 그렇게 해서 자아를 만들고 인간이라 부를만한, 짐승이나 벌레와는 확실히 다른 뭔가가 된다.

 

이렇게 대단한 인류문명도 실은 도구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여기와 저기의 소통을 위한 도구다. 아무리 멋진 전투용 칼도 시대가 바뀌어 총으로 싸우는 시대가 되면 별로 쓰지 않는 과거의 물건이 되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제까지의 인류문명이라는 것도, 대단한 철학도 당연한 윤리적 상식도 언젠가는 그저 한계가 많았던 과거에 어쩔 없어서 썼던 도구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구 중세시대의 종교를 보듯이 말이다. 문명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본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통이다.

 

인문학의 실패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인문학의 실패는 사회적 복잡성의 증가로 인한 전문화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아서 대중이 뭔가를 배우는 것을 실패하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라는 앞에 개인은 빌딩앞에선 개미보다 작은 존재다. 그래서 부지런히 자기 앞의 흙을 모아 작은 둔덕을 만들지만 둔덕은 인류 역사 전체와는 비교할 없이 작고 엉성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문학의 모순적 상황이 생긴다.

 

우리는 인문학을 누구에게 배워야 것인가. 아마도 당신은 당연히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것이다. 마치 인문학이라는 학문이 하나 있고 그게 인류의 사상과 문화를 모두 설명하며 그걸 아는 전문가가 어디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은 없다. 세상에는 그저 자기 분야를 깊게 전문가들이 있을 뿐인데 많은 전문가들은 종종 자기 분야를 깊게 파느라 자기 분야바깥의 세상에는 무지하다. 무엇보다 자기분야라는 그것 하나만도 아주 넓고 복잡하다. 그러니까 세상에 인문학 전문가란 없는 것이다. 각자의 전공을 가진 전문가만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어느 편에서는 전문가지만 어느 편에서는 형편없이 무지한 사람들이다. 그나마 지금 이순간에도 사회적 복잡성은 커지고 있고 전문화는 세분화되고 있다. 박사받는 사람들이란 말하자면 말단의 말단의 말단의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연구해서 전문가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을 없다.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재능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따라서 누구도 확실하게 답은 모른다. 아니면 답이 하나가 아니다. 다만 내가 보기엔 인문학을 공부하는 길에는 두가지가 있는 것같다. 하나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걸 넘어서는 장인이 되고 사상가가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를 파지 말고 하나만 계속 파라. 파고 파서 전문가가 되고 장인이 되라. 자기가 특정분야를 제외하면 무식하다는 것을 기억만 한다면 무식해도 된다. 그러다가 자기 세계에 대해 익숙해지면 몰랐던 세상에 대해서도 자기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있는 뭔가를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갑자기 이제까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다른 분야의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고 할말이 많이 생기며 그런 분야로 폭을 넓히는 것이 가능해 것이다. 전문가의 길이란 장인의 길이다. 통섭이란 말도 전에 인기가 있었는데 통섭을 행하는 현실적인 길은 이것저것 공부하는게 아니라 하나를 제대로 알아서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자기 실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 실천의 길이란 부단히 자기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남의 한줄 읽을 자기와 대화하는 열줄을 쓰고 남과 한마디 나눌 자기 자신과 열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많이 읽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여러번 읽는 것이다. 자기 실천의 길이란 자기를 찾는 길이고 자기에게 조금씩 살을 붙여가는 것이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묻고 스스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두가지의 모두 매우 어렵다. 그러나 진짜로 결과를 보기 어려운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전문가, 스승, 맨토에게 가서 조금 듣고 다시 저쪽으로 가서 조금 듣는 것을 계속 하는 것이다. 우물을 힘도 없고, 자기 자신에게 귀기울일 시간은 없으면서 열명 백명의 스승을 동시에 따라간다. 열개 백개의 길을 동시에 따라간다. 잡스런 지식만 잔뜩 모아서 무슨 뜻인지도 생각도 안해보고 외운대로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소통을 하고 있으며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한다. 내적 일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니체의 책한권의 의미를 풍부하게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인문학이라고 하니 수학공부와는 다른 것일것 같지만 수학도 열심히 하면 수학이상으로 배우는 것이 있다. 철학이 된다. 대학교 일반물리 교과서를 매년 강의하는 교수에게 가서 물어보라. 일반물리 교과서를 매년 강의하다보니 교수도 계속 거기서 배우는게 있지 않더냐고,  자기는 20 30 공부한 미학을 한시간 정도에 강의하는 강사에게 뭔가를 배우면 지식은 확실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이 정말 소통에 도움이 될까? 거기서 멈추면 안된다. 오해와 자만감때문에 소통은 더더욱 안될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뭔가를 알고 싶으면 하나를 길고 열심히 해야 한다. 눈사람 하나 만들고 이제 나는 조각가가 되는 것이 뭔지 알아라고 말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공부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운이 좋아야 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 자체도 운이지만 적절한 환경에서 일찌감치 시작하지 않으면 길을 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 가야 하는 것은 확실한 주체로 살아가는 자기 실천의 길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 이런 것은 당연하다,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자라는 말에 저항하면서 생각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화를 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부품만 빼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남의 학문을 배우기 보다 자기 이름이 붙은 학문을 만드는 것이다. 강국진의 행복학, 격암의 삶의 원칙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자기가 직접 점과 점들을 잇는 것이다.

 

요즘은 자기 실천의 길을 가기가 힘들다. 세상이 우리를 그냥 혼자 내버려두질 않아서 그렇다. 초등학생이 입시학원에 가면 어머니 이미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같은 말을 하는 시대다. 그러니까 깨지던 구르던 자기 판단으로 일을 해나가도록 놔두지를 않는다. 그저 정신없이 지식을 삼키게 한다. 소화능력에 비해서 부어져 들어가는 정보가 너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있는 전문가도 되질 못한다. 자기 생각이 있는 전문가란 요즘 말로 하면 오타쿠고 광신도다. 돈이나 취직을 위해 뭔가를 배우고 일하는 정신으로는 진짜 전문가가 되기 힘들다. 재능이나 운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애초에 아예 나는 성공따위는 생각해 본적도 없고 그저 이것이 좋다라고 해야 진짜 전문가가 된다. 그게 아니면 결국 말만 번지르르하게 말뿐 내적인 일관성도 없어서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모르는 그런 전문가가 된다.

 

전문가의 길이건 자기 실천의 길이건 결국 어느 수준에 이르면 같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자기 실천의 길이 현실적이다. 정신과 집과 마을에서 시작하고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배움에도 서두르지 말고 판단도 항상 느리게 느리게 해야 한다.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드는 사람처럼 장기적으로 보고 기다려야 한다. 자기와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을 권장한다. 

 

어디서 이거 한권만 읽으면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말을 들으면 조심해야 한다. 그럴듯한 지름길을 보여주는 듯한 꾀에 넘어가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심사숙고하면서 판단하고 공부해야 한다. 이것은 이것입니다라고 명쾌하게 말해주는 것이 항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면 단한명의 정직한 천재가 이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는 책을 썼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답보다 질문이다. 우리는 항상 질문이 마음에 남아있어야 한다. 질문을 깨끗히 지워주는 말이나 책은 좋은게 아니다.

 

뭐가 되었건 중요한 것은 내가 거기서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을 , 어떤 공부를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있는 수준이 넘어선다면 나도 내가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한 혼돈에 빠진다면 책이 잘못된 것이거나 내가 책을 읽을 준비가 안된 것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이해가 될만한 쉬운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좋다. 다른 길보다 좋은 길은 있을지 모르지만 빨라 보여도 막힌 길은 있어도 공부에 쉽기만한 길은 없다. 길은 내가 걷기엔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는 말은 때로 오만이다. 왜냐면 그것보다 쉬운 길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길은 외면하고 작은 길로 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실은 작은 길이 힘든 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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