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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과 별에서 온 그대

by 격암(강국진) 2015. 7. 24.

몇일전 뉴욕타임즈는 중국에서의 한국 컨텐츠 열풍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이 기사의 주요내용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 특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이때문에 중국에서 외국 컨텐츠에 대한 제약을 더 강하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치맥열풍이 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은 스스로도 노력하고 한국 기업과 합작해서 한국 드라마를 대체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려고 한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은 한국 드라마는 왜 재미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와 그 기자가 인터뷰한 중국연예사업 관계자들은 상당히 한국 드라마를 폄훼하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물론 기사에서는 중국인 스스로가 한국 드라마는 세부사항이 강하고 중국은 그런 로맨스를 못만든다고 인정하는 인터뷰를 내보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한국 드라마에 대한 폄훼의 느낌을 받았던 것은 장점은 단순하게 말하고 단점에 대해서는 뇌가 빈 사람이나 좋아하는 것 정도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미국 드라마는 지성인이 좋아하는 것이고 미국의 마블코믹스 영화 시리즈는 유치하지 않은 것들인데 한국드라마는 그렇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를 크게 얻은 것이 사실인데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도 존중하는 느낌이 없는 것은 폄훼로 느껴졌던 것이다. 아마 스파이더맨이 별에서 온 그대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면 그리고 그것을 뉴욕타임즈가 보도한다면 거기에는 훨씬 더 컨텐츠 자체가 우수해서 인기가 있다라는 식의 표현이 넘치지 않았을까.


이 기사를 읽다보니 나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미국에서 만들면 슈퍼맨인데 그걸 한국에서 만들면 왜 우뢰매 이상이 안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슈퍼맨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에 대해 그리고 비싼 돈을 받는 작가에 대해 우리는 길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특히 20년전이나 30년전의 한국에서는 제 아무리 비싼 돈을 들이고 좋은 시나리오를 쓴다고 해도 슈퍼맨의 이야기를 무대를 한국으로 옮기고 출연진의 국적을 한국으로 바꿨을 때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면 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리핀에서 슈퍼맨을 만들면 당신은 그걸 재미있게 볼런지 생각해 보라. 


과학적인 사고가 문화자체에 깊이 스며있을때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의 결실을 만들어 냈을때만 공상과학만화의 줄거리도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컨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 컨텐츠 이상으로 그걸 보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난 30년동안 많이 성장했다. 그래도 아직 과학의 세계에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30년전의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이미지가 아니라 과학적 문화를 통해서 대중에게 주입된 과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과학을 배경으로 한 동화를 만든 이야기를 재미있고 그럴듯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 전부가 약간 과학오타쿠가 된 사회랄까. 그건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차이를 이해하는 사회다. 스타트랙에 쓰는 클링곤 말을 실제로 문법적으로 완벽하게 만들기도 하는 사회다. 


이제 여기 진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슈퍼맨은 한국에서 못만드는데 한국의 로맨스는 시나리오만 가져다가 그 배경을 외국으로 바꾸면 외국에서 만들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간단히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 힘을 얕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로맨스가 진짜 로맨스가 되기 위해서 한국은 오랜 시간 노력했다. 전통의 힘뿐만 아니라 87년 민주화운동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민주정권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서야 겨우 지금의 한국 문화적 문법을 만든 것이다.


그 문법이 반영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섬세함이다. 인간은 단순히 고깃국에 흰쌀밥 먹는 걸로 행복해 지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반지나 큰 집한채가 인간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을 지켜준다는 것은 보다 섬세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이라고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섬세하게 보는 노력을 하는 문화운동이다. 인간이란 짐승과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민주화 운동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초록물고기가 나오기 이전의 한국 영화는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랑이야기도 무기력하다. 희망보다는 도피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괴짜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거나 아니면 어디 깊은 산골의 무지렁이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초록물고기의 주인공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지 않는다. 초록물고기는 주인공이 죽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 이전의 영화에 비하면 오히려 희망에 넘치는 것같은데 그 이전의 영화는 자기로 부터 현실로 부터 눈돌리고 솔직하게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야기에는 고난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그냥 좋아한다는 결론으로 끝나버릴테니까. 그런데 여기 부자와 가난뱅이의 사랑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애인을 잘만나 팔자고친다는 행운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뱅이가 인간대 인간으로 대화가 되는가 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극복되는 것이 있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살건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결론을 주는 로맨스가 된다. 


사랑의 장벽이 되는 것은 돈뿐만이 아니다 인간적인 금기, 무지, 트라우마등 여러가지다.  그런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돌파하는 것이 감동을 주고 로맨스에게 현실감을 준다. 저런 부분을 도와주고 같이 극복해 주는 사람이면 사랑에 빠질 것같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에 실패하고 껍데기만 남을 때 한국식 로맨스는 바로 재벌3세만 맨날 나오는 단순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그과정에는 한국 사회에서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온 여러 사람들의 피와 땀이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바로 껍데기만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중국에서 미국 로맨스보다 한국 로맨스가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중국의 남자들은 중국여자들이 한국로맨스를 좋아하는 것을 단순히 머리가 비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의 섬세함이 부족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괴한 껍데기만 지적할 뿐이다. 그게 다라면 베끼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그게 다라면 슈퍼맨 영화를 한국이나 중국에서 국적만 바꿔서 만들어도 세계적인 히트를 칠텐데 왜 할리우드 영화만 세계적인 히트를 쳤겠는가. 남이 하는 낭만적 이벤트 내가 똑같이 따라했는데 왜 내 여자친구는 나를 미친놈 보듯할까를 모두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로맨스 드라마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물론 중국에 선남선녀가 없어서가 아니다. 인생에 뻔한 고민밖에 없고 사회적 모순에 대해 눈을 돌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 중국정부로 부터 반체제 영화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에게 마치 중국에서 찍은 슈퍼맨 처럼 보일 것이다. 


한국은 문제가 많다. 한국도 이제 로맨스를 잃고 낭만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것도 같다. 시대는 이명박 정권이래 아주 많이 뒤로 후퇴했으니까 그렇다. 요즘 재미있는 드라마는 현정권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는 KBS나 MBC에서 보기 어렵다. 이것도 문화의 문제이며 문화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이제까지 이뤄온 것도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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