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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이 오는 징조

by 격암(강국진) 2015. 7. 13.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다보니 국내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집권당 원내 대표로 뽑혔느니 야당이 분열되었느니 하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저런 말은 많지만 적어도 아직은 희망이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는다. 


사실 먼저 기억해야 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한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좋아질 수는 있을지언정,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꽤 살기 좋은 나라다. 물자가 넘치고 문화가 넘치며 정의가 살아있고 공공의식이 있다. 문제는 어디와 한국을 비교하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그것도 그 나라들의 어느 한쪽 편하고 비교하거나 상상속의 가능한 미래한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가 못난 것이다. 한국은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도 다 나름의 문제가 있다. 스위스도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도 못한 면도 있다. 적어도 미국과 일본에서는 살아보니 그렇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낭비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낭비되고 피해입지 않아도 될 것같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때 분노하게 된다. 교육이 망가지고 희망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같을 때 분노한다. 비관적 미래에 대한 상상은 현실이 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는 지옥같은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질 때 분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이 안나도 주유소에서 불쑈하는 사람에게는 분노가 일어나는 법이다. 이런 것들이 꼭 이래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 일들은 서로 서로 얽혀 있어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지만 그래도 보다 본질적인 원인에 해당하는 것은 있다. 봄비가 내리면 겨울이 끝나고 초록이 시작될 것을 느끼듯이 지금 사는 세상이 그래도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증후는 있다.


그건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주류가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가망없는 인간말종이나 정신병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이성적이며 적어도 그렇게 변해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주류가 되는 것이 느껴지면 그것이 봄이 오는 증후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글쎄 그걸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큰 부분이다. 이명박과 노무현을 나란히 세워놓고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다. 이명박보다 노무현이 훌룡한 공인이 될 자질이 있다는 말을 무슨 빠돌이니 신격화니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세상은 아직 더 좋아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이다. 


사람에게 아직도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언행은 적어도 사람에게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보인다. 사람에게 희망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의 꿈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선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소통을 하려고 한다. 즉 내 뜻을 전달하면 상대방이 이해를 해줄 것으로 믿는 것이다. 


물론 소통은 거의 번번히 실패한다. 사람은 때로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도 희망이 아직은 저 밑바닥에 남아있는 사람은 소통을 하려고 한다. 진짜 자기를 들어내 보인다. 더 투명하게 자기를 들어내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언행에는 어떤 일관성과 고민의 흔적이 뭍어난다. 우리는 고민하고 흔들리지만 거기에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을 보게 된다. 고민하고 흔들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지 않은 것같은 모습은 인간이 아니다. 


대화하지 않거나 동문서답하거나 무의미하게 현학적인 말로 소통의 본질을 피해나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철가면이나 돌조각같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를 철저히 숨기기만 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악의에 가득차 있으며 어리석어서 절대로 소통같은 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것이 들어난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사람 하나 하나가 좋아져서 좋아지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 들어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개 어떤 법을 만들거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따위를 하지 못하니까 제약을 가하고 억압해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되도록 적은 정보만을 세상사람들은 가져야 한다. 많이 알면 또 딴 생각해서 세상을 더 엉망으로 만들테니까. 그들의 철가면과 돌조각위로 떠오르는 것은 그저 원초적인 욕망과 공포의 감정 뿐이다. 일관적인 인간이 들어나지 않는다. 인간이란 욕망이 아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니까 고민하고 성장하려는 몸부림을 보이고 가치를 찾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로보트나 짐승이다. 


세상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로보트나 짐승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란 원래 로보트나 짐승이라고 믿게 되기 쉽다. 그러나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 로보트나 짐승은 아니다. 그들은 욕망과 공포에 눈이 멀어서 자기를 잃어버린 것뿐이다. 자기를 잃어버렸으니까 뭐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같은 것도 스스로 모른다. 그냥 어떤 객관화된 뭔가가 좋은거라는 생각에 매달려 공포에 쫒기고 가상의 욕망에 빠질 뿐이다. 


희망의 촛불빛은 언제나 같은 빛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며 영영 꺼져버리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그러니까 이렇게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나도 이명박 같은 사람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현실을 보고는 반년정도는 한국 소식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희망의 표식은 논리가 아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구호가 아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들어난다. 나는 소통이 그 증거라고 말했지만 소통도 정도 문제가 있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때로 소통을 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그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통이란 그냥 자신을 들어내는 것이다. 허세를 부려서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자신없는 것을 자신있다고 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자기를 보이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를 들어내고 천천히 판단하면 가장 빠르게 옳은 결정이 내려지고 가장 좋은 세상이 온다. 상식적인 세상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떤 묘수로 세상 사람들을 확 휘어잡으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는다. 마치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 지는 인형인 것처럼. 누구도 100% 흰색일 수는 없다. 언제나 흔들리고 고민하고 회의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완전히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 문제다. 


세상에 희망이 없지는 않다. 아직도 세상에는 켜있는 불꽃이 많다. 그러나 더 좋은 세상이 정말 올 수 있을 것인가는 누구도 확신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불신이 가득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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