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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철학이 있는 집

철학이 있는 집 5 : 가난한 방이 있는 집

by 격암(강국진) 2016. 7. 19.

집이란 거기에 사는 사람의 자아에 맞추는 옷과 같다. 집이 그 사람의 생활문화와 가치관에  대응해야 그 집이 편안하고 좋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vN의 리틀빅히어로라는 방송에서 수납전문가 정경자를 소개해 준 일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정리를 못하는 사람의 집을 정리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집의 크기에 비해 정말 엄청나게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또 정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집은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단서를 주는 것같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무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집을 쓴다면 집의 구조따위가 무슨 차이를 만들겠는가 하는 좌절때문이다. 

 

 

정리하지 못한 짐이 많은 집

 

집이란 여러가지 가정과 철학을 근거로 지어진다. 집짓는 사람은 정말 심혈을 기울여 어떤 것을 이룩해 놓았는데 거기에다가 이상한 가구를 가져다 놓거나 짐들을 좀 어질러 놓으면 그런 고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심지어 의미있는 구조를 가진 집이 성의없이 지은 집보다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심혈을 기울인 스프에 고추가루 팍팍 치고 와사비 넣어 먹는 식이다. 그래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같은 유명 건축가들은 자기가 직접 그 집의 가구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사는 방식까지 간섭했다고 한다. 

 

집이란 자아가 입는 옷이다. 종교의 시대에 그 자아는 주로 종교적 자아였고 과학의 시대에 그 자아는 종종 자연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아였다. 이제 상거래가 고도로 발달한 망의 시대에 집과 자아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가져야만 할까.  

 

망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돈만 있다면 물건들을 소유하기가 너무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망의 시대에 우리는 소유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더 많은 소유가 더 좋은 것이라는 답은 점점 더 자주 실패하고 있다.

 

과거에는 뭔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것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개 한번 손에 들어온 것이면 그것을 다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가장 좋은 것이란 말하자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하나의 집이나 하나의 방에 그야말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때 사람들은 여기 정말 너무 좋네라고 말했다.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떤 것들이 꼭 필요한지, 필요할 때가 되면 빌려서 사용할 수는 없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댓가를 치루게 되는지를 꼼꼼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혹시 우리는 마치 요즘 세상에서는 크기만 할 뿐 필요없고 불편한 성에 살면서 엄청난 관리비를 지출하며 사는 사람과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하나 하나의 방이, 하나 하나의 집이 그 자체로 완결되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일까? 정말로 그렇다면 소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과 만나지 않게 되고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서는 다른 사람들이 뭘하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부족한 사람, 유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종종 그저 많이 가지려고만 한다. 그런 노력은 지나치게 되면 더 가지려는 노력이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잃어버리게 만드는데도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종종 구조에 대한 고민이라던가 그 안에 뭘 채우는가는 상관없이 그저 더 큰 평수의 아파트가 더 좋은 것이고 더 큰 방이 좋은 방이라고 생각한다. 단독주택도 되도록 크게 지으려고 하고 주어진 대지도 가득 채워서 짓는 일이 많다. 무엇을 어떻게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더 작은 것이 더 큰 것이다. 옷걸이가 없는 방이 옷이 쌓이는 일이 오히려 없고 쓰레기통이 없는 거리가 쓰레기로 범벅이 되는 일이 더 적다. 뭔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유롭고 더 부자가 된다. 

 

2006년에 한국에서는 베란다 확장을 합법화했다. 베란다는 창바깥으로 튀어나온 허공에 뜬 공간이다. 이 부분을 마치 실내공간처럼 쓰는 일이 합법적인 일이 되자 건설사들은 너도 나도 기다란 구조를 가진 집을 짓는다. 최대한 집이 길게 변해야 베란다 확장으로 인해 생겨나는 공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건평이 똑같이 25평인데도 베란다 확장 공간이 넓어지면 실질적인 집안 공간이 훨씬 넓다. 바깥쪽을 향한 벽쪽에 방이 몇개가 있는가가 베이라고 하는 숫자다. 전에는 집이 정사각형에 가까워서 2베이였던 아파트가 길어져서 4베이이상으로 변한다. 이렇게 집이 길어지니까 베란다 확장을 하지 않으면 각각의 방들은 사용불가능하게 작아진다. 베란다 확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4베이 아파트와 베란다 확장

 

 

그런데 베란다 공간이란게 애초에 존재 의미가 없었다면 우리가 왜 베란다를 가지고 있었을까. 게다가 집이 길든 정사각형 모양이든 상관이 없다면 왜 전에는 집이 정사각형 모양에 가까웠을까. 베란다는 수납의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단열에 큰 의미가 있다. 공기는 아주 좋은 단열재이기 때문이다. 베란다가 없는 집은 훨씬 공간이 커보이는 대신 냉난방에 불리하다. 그리고 당연히 바깥쪽 공기와 만나는 면이 넓어 질 수록 냉난방에 불리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집을 길게 만든다는 것은 적어도 냉난방에 있어서 몰상식한 것이다. 애초에 아파트가 단독주택보다 난방비가 작게 나온다는 것은 단독주택보다 바깥공기를 만나는 면이 작아서가 아니었는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각각의 집을 길게만 지으니 건물의 모양에 무리가 생긴다. 그래서 모든 아파트가 남향일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불가능해진다. 기다란 길이의 아파트건물을 주어진 대지에 넣기 위해 건물은 모양이 구겨지게 된다.  그러면서 각각의 아파트들이 남동향이나 남서향으로 바뀌게 된다. 요즘 대형아파트보다 소형아파트가 인기가 있다고 하지만 분양하는 아파트는 이런 식으로 해서까지 면적을 넓히려고만 한다. 모두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노력이 전체 그림을 보면 모두가 적게 가지도록 만드는 결과가 되어도 말이다. 

 

집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이니 무한소유를 지향하는 탐욕을 상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그런 정신으로 지어진 집이 정말 좋은 집일 수가 있을까? 어떤 집이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몰상식한 소유의 양식때문이라면 나쁘고 고쳐야 하는 것은 그 집일까 아니면 우리의 자아일까?

 

많은 것을 소유하는 댓가중의 하나는 가진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며 특히 우리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들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없는것이 진짜 문제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은 고맙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때로 실패하고 이름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고맙고 기쁜 면이 있다. 우리는 가난할 때 뭐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지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이 뭔지 알고 싶다면 우선 아주 작고 단순한 공간을 생각해 보자. 그 공간은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가진 공간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작은 집짓기 운동인 타이니 하우스 운동은 어쩌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진 최소의 공간에 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돈이상으로 정신에 대한 것이다. 

 

 

작은 집에 산다는 것

 

작은 집을 짓고 꾸미다보면 하나를 버리면 버리는 만큼 이득이 된다. 절제된 공간을 활용하는 것을 고민하다보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해본 사람은 작은 집에 사는 것은 나에게 있어 뭐가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작은 집에 사는 것은 하나의 좋은 훈련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욱 단순함의 극치로 가봐야 할 필요, 집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더 단순함의 극치로 가면 우리는 그냥 작은 골방을 만나게 된다. 발펴고 누우면 이쪽 벽에 머리가 닿고 저쪽 벽에는 발이 닿을 것같은 작은 방이며 무소유를 주장하는 선승의 방같은 방이다. 지금도 이런 방한칸을 집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거니와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는 훨씬 더 많았다. 

 

 

한옥방

 

 

한 작가는 그녀의 에세이집에서 사는게 힘들다고 생각이 들때마다 지리산에서의 가난한 삶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최소의 것을 가지고도 그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세상일에 휘둘려 피곤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것이 있으면 행복하게 살기위한 최소한의 소유가 될까? 최소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최소의 가난한 방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설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어도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 최소의 가난한 방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인 소유와 인생의 덤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유가 작아질 수록 우리의 삶은 단순해 진다. 이런 무소유의 삶은 세상이 빨리 변하고 원하면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망의 시대에 오히려 더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무소유는 많은 경우 비현실적이며 종종 해롭다. 단순하기만한 인생은 너무 단조로워서 우리를 둔하게 만들고 퇴보하게 만든다. 현실적인 무소유의 정책은 단순히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가 꼭 소유해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본질적이지는 않은 것들을 그것들로 부터 분리하여 정리해 둔다. 이렇게 정돈해서 소유를 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막아준다. 어떤 선을 긋고 이 바깥쪽의 것은 엉망이 되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의 핵심까지 망가뜨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핵심적인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2단계 구분이 아니라 이런 구분을 층층히 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마치 옷위에 옷을 겹쳐 입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는 이런 소유의 층층구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맨 바깥의 껍질은 없어지던 말던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안쪽의 껍질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를 한다거나 인생의 큰 변화를 계획한다면 우리는 먼저 안쪽 것들 부터 챙기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다가 짐이 버겁다면 우리는 배가 가라앉기 전에 무엇부터 배바깥으로 던져야 하는지 알고 있다. 

 

망의 시대의 집은 이런 자아의 구조와 닮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일단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유지비용을 요구하는 집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집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더 불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여전히 어딘가에 가난한 방이나 가난한 자리가 있다. 그 가난한 방은 최대한 무소유에 다가가 있는 방이다. 우리는 그 공간에는 가구도 전자제품도 되도록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집의 한쪽부분에서는 절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무성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거나 누우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장 고민해서 만드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 가난한 행복은 우리로 하여금 소비에 휩쓸려 버리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며 복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자기를 지킬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집이란 어떤 의미에서 작은 마을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 집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종종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내 것을 모두 그 안에 가지려는 노력이 무한대로 발휘된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집을 조각조각으로 나눈후 독점적 소유를 주장하고 되도록 더 많은 것을 그 안에 가지려고 한다. 그 결과 그 집은 소통없는 집이 되고 각자가 가난함이 없는 집이 된다. 이건 다시 말해서 각각의 방이 물건들로 넘쳐나는 방이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많은 집에는 학생들이 있다. 그 학생의 방이란 옷장과 책상 그리고 침대를 넣고 거기에 개인물건과 책장을 넣는 일이 많다. 시중에서 파는 학생용 가구들만 봐도 학생들이 필요한 기능들을 모두 갖춰서 학생들이 방을 빠져나갈 필요없도록 심지어 책상에서 일어날 필요도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같다.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이 물건을 넣는 것이 목표다. 게다가 책상 바로 옆이 침대라서 책상에서 옆으로 쓰러지면 바로 침대로 쓰러지게 될만한 구조다. 

 

방이 갑자기 넓어질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방을 가구나 가벽으로 공간구분하여 더 작은 공간들로 나눌 수는 있다. 그럴 때 방도 구조를 가지게 된다. 침실공간은 침실공간이고 책상공간은 책상공간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각각의 방을 줄이고 방을 하나 더 만들어서라도 가족의 옷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옷방이 있으면 어떨까 한다. 내 옷은 내 방에 있으면 편하다. 옷방하나를 여러사람이 공유하려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불편에도 보상이 있다. 방이 더 가난해 진다. 단순해 진다. 또 옷방을 공유하니 옷방에서 서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약 집안 여기저기에 작은 독서 공간들이 숨겨져 있는 집이 가능하다면 또 책들이 누구의 것이냐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책의 공간에 모아져 있는 집이 가능하다면 각자의 방은 순수한 침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는 그런 독서실같은 공간으로 숨어들면 된다. 집에 창고가 있어서 왠만한 물건들을 거기에 집어넣어보면 우리는 한가지를 느끼게 된다. 실은 우리는 그 물건없어도 잘 산다는 것이다.  공간이 구분될 때 대개 그 공간들은 더 가난해지고 순수해 진다. 그것은 물론 더 불편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너무 편해서 문제인 시대에 그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집이 자아가 입는 옷이라면 너무 이상에 넘친 집은 마치 수행하는 종교인의 삶을 강요하는 것처럼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불편한 집은 좋은 집이다. 요즘 세상은 우리를 편하게 만들 물건이 너무 넘쳐나기 때문이다.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산책도 때로 귀찮지만 걷기가 우리 몸에 좋은 것처럼 우리에게는 건강한 불편함을 줄 수 있는 가난한 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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