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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철학이 있는 집

철학이 있는 집 7 : 인간의 집

by 격암(강국진) 2016.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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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집에서 살았다.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시대마다 나라마다 같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인간이란 신에게 복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 인간을 위한 집도 그것에 맞춰서 지어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의 시대에는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가장 종교적으로 성실하고 훌룡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집이 좋은 집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당대에는 인간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거나 원래 이런 존재라고 생각했었기에 그런 집이 인간의 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게 되면 그것들은 이제 인간을 위한 집이라기 보다는 신을 위한 집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지금은 인간의 집에서 살고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관념, 우리의 생각을 위한 집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보수적인 분야인 건축은 사고의 변화를 뒤늦게 쫒아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일부러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대에 뒤진 생각을 위해 지어진 집에 살게 되기 마련이다. 


거대한 종교건축물들은 우리가 신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여기에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훗날 부유해진 종교적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지을 멋진 건축의 예를 찾을 때 그들이 참고한 예는 역시 종교건축물이었다. 예를 들자면 중세 교회의 형식을 따라서 고딕형식의 주택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개인을 위한 건물에도 널리 쓰이게 되는 식이었던 것이다. 종교적 지도자는 종교의 시대에 최고의 지식인이고 최고의 권력자였으므로 당연히 많은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광고나 언론뉴스를 보고 유명인들이 입거나 먹는 것을 따라서 입거나 먹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가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을 당대의 부자들이 자기 집에서 뭘 원했을까는 분명하다. 


쾰른 대성당


오늘날의 관점으로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사고 방식이 인간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신에게서 인간으로 돌린 르네상스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변한 것은 인간 중심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 이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점에서 신에게서 인간으로 사고의 중심을 바꾼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 과학의 시대의 중심은 인간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인간이 발견하는 자연의 법칙이나 진리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이성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과학시대의 문제였다. 이성이 극도로 추구되자 거대해진 시스템 혹은 이념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일하기 보다는 인간이 거대한 시스템이나 이념을 위해 희생되기를 요구했다. 극도로 전문화되어 굴러가는 시스템은 이제 어느 한 인간이 이해가능한 수준을 넘어섰고 따라서 인간의 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손대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최적의 답을 찾아준다는 시장에 대한 믿음은 허구다. 인간은 인간이 만들었으되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과학의 시대에 대부분의 인간은 신을 대신하는 어떤 관념, 어떤 이데올로기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떤 관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에게 바쳐진 건물대신에 어떤 관념, 어떤 이데올로기에 바쳐진 건물을 짓는다. 노동자의 집이나 페미니스트를 위한 집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들이 인간을 위한 집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 사부아를 현대적 감각으로 지었지만 그 건물에 들어간 건축주 사부아 가족은 제발 이 건물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고 빌어야 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건물에는 비가 샜고 사부아 가족은 가구도 마음대로 들여놓을 수 없었다. 결국 모더니즘 건축은 인간을 위한 집이 아니라 건축가의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빌라 사보아


인간을 위한 집이 무엇이고 신이나 관념을 위한 집이 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집의 크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방의 크기는 10제곱미터쯤 되지만 천정의 높이가 20미터쯤 되는 방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매우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바닥면적이 10제곱미터인 방이 너무 좁아서가 아니다. 바닥면적에 비해 천정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높이가 2.5미터쯤 되는 천장을 가졌지만 바닥면적이 400제곱미터쯤 되는 구조물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높이에 비해서 바닥이 너무 넓다. 그런 면적의 공간이 비어있다면 이런 구조의 공간에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혹은 그 비일상성이 주는 예술성이나 성스러움에 감동하거나 말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감각의 반구를 만든다. 통상 땅밑에서 뭔가가 솟아나는 일은 별로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어떤 반구를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신경을 쓰고 감시를 한다. 이것은 유전적 결과일 것이다. 우리가 위험한 맹수의 습격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려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주변의 변화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과거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습관은 우리를 피곤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동굴처럼 우리 주변을 벽이 둘러싸면 우리는 관찰을 계속해야 하는 그 반구의 크기를 줄일수가 있다. 저 벽의 너머로는 이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낀다. 물론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너무 작아질 때 인간은 폐쇄공포증이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한계까지는 예를 들어 가로세로높이가 2미터정도의 공간에 들어가 있을 때까지는 그곳을 아늑하고 안전한 곳으로 느낀다. 그정도 크기 까지는 대개 공간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 수록 좋다. 벽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므로 우리는 긴장을 풀 수가 있다. 재미있는것은 단순히 공간의 부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쪽으로 그 공간이 길면 우리는 여전히 피곤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조화가 맞지 않는 공간이나 지나치게 큰 공간의 의미가있다. 신이나 관념을 위한 건물들은 인간이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의 규칙을 일부러 어겨서 만들어 진다. 바로 우리를 긴장과 공포에 빠뜨리게 만들기 위한 구조다.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권위를 느낀다. 백미터이상 솟아오른 탑은 이른바 휴먼 스케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엘레베이터가 있지도 않던 시절부터 종교구조물이 거대화되었던 이유는 우리가 그앞에서 굴복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마천루 높이 경쟁이 벌어졌는데 왜 하필 빌딩의 높이가 능력을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것은 단순히 그것이 만들기 어려워서가 아니며 심지어 땅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하기 어려운 일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앞에서 경이에 빠지기 때문이다. 마치 신전에 간 것처럼 말이다. 마천루가 솟아 오른 도시의 풍경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똑같은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의 관념에 대해 권위를 느끼고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높은 빌딩은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멋지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자의 소박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작은 방보다는 엄청나게 큰 거실이나 다이닝룸을 보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괜찮지만 괜히 권위를 지나치게 세우느라 본인이 인간이며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고급 스포츠카를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있고 오래된 성당을 보고 감동받을 수도 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멋지다. 그러나 스포츠카 안에서 살거나 성당안에서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멋지다는 감각이 나에게 좋은 것, 내가 행복한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망각한다. 신은 멋질지 모르지만 인간은 신과 계속 있을 수 없다. 이때문에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집이 실은 초라하지만 아담한 집보다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요즘의 집에 비하면 전통적 주택인 한옥은 인간적인 스케일을 잊지 않는다. 바닥이 넓은 대청마루는 천정이 높지만 작은 골방은 천장도 작아서 더 아늑하게 만든다. 그래서 집안에서 천장의 높이가 장소에 따라 다르다. 반면 요즘 아파트는 대개의 경우 집안의 층고가 모두 같다. 이것은 아파트의 공간분할이 단조로울 수 밖에 없는 한가지 이유다. 그게 아니면 작은 방이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개의 아파트에 비하면 한옥이 더 인간을 위한 집인 한가지 이유다. 


그래도 시장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현대에는 시장의 힘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으니 우리는 전보다 인간이 살기 좋은 집을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시장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와 같다. 시장은 오직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판매하기를 원한다. 시장이 원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행복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우리가 크고 높은 것을 멋지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빚까지 내가면서 비싼 돈을 주고 큰 집을 산다. 그런데 그렇게 큰 공간에 살아보면 불안증이 느껴지니까 이번에는 그것을 물건으로 채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된 것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 낸 소비하는 기계가 된 것일까? 


이른바 휴먼 스케일은 문화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세계화가 진행된 현대에서 오히려 더욱 망가지고 있다.  인간은 애초에 반나절이면 지구반대편까지 날아가고 전세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살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어떤 특정지역에서 작은 숫자의 인간들과 소통하고 그 지역의 기후와 재료에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주변의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는 것이다. 집이 제 역할을 해주는가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이상으로 그 지역사회의 특성에 달린 문제다. 나가면 얼마든지 싸고 맛있는 음식을 구할 수 있는 동네에서는 큰 주방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손님이 찾아오는 동네라면 큰 응접실이 필요할 것이며 마당에서 일도 해야 하고 농기계도 보관해야 하는 농사꾼의 집은 도시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회적 관점에서는 우리들은 그 지역사회 혹은 그 지역의 인간망이 그 지역에 가장 적합한 주거형태를 탐색하고 짓도록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이웃들의 답들을 보면서 우리의 답을 조금씩 수정해 나아갔던 것이다.  주거의 문제는 공동체의 문제였고 세계화된 시장이 발달하기 전에는 오히려 이런 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이뤄진 세계에서 지역망은 무력하다. 그리고 탐욕스런 시장이 그 대신 작동한다. 이런 시대에는 땅이 얼마든지 있는 지역에 고층아파트를 짓는 일을 해도 시장성은 있을 수 있다.  사막한가운데에 스키리조트를 지어도 시장성은 있을 수 있다. 


요즘의 집들은 전통의 소재나 그 지역의 소재보다는 주로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로 지어진다. 더 문제인 것은 그 집을 짓는 형식이 전 세계에서 쏟어져 들어온 문화적 영향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것이다. 집을 하나의 기계로 보았을 때 우리는 도대체 이 기계가 뭘하는 기계인지도 모르면서 시장의 선전과 유행에 따라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요즘 인테리어는 북유럽풍이 유행이라거나 요즘 대세는 이탈리아풍 맨션이니 미국풍 전원주택이니 하고 말한다면 당연히 기후를 포함한 현지사정이 어떤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게 충분히 있어보이지 않는다. 많이 있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인척 해보겠다는 태도뿐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 몸사이즈는 잊어버린 채 슈퍼모델들이 나오는 광고를 보고 그들의 몸에 맞춘 옷을 마구 사들이는 것과 다를바 없지 않을까? 좋아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에 이글루를 짓고 유지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혼란이 생기는 근본원인은 우리가 매우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인간적인 규모의 사회적 공동체와 영향을 주고 받고 그 망을 통해서 삶의 방식을 배우는데 익숙하다. 이런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고려없이 무한 확장된 망은 더 좋은 답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망각하게 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집이 지어질 리가 없다. 


신 또는 관념과 사람이 다른 것은 또 있다. 바로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에게 특히 그렇다. 인간의 특징중 하나는 놀이를 즐기는 것인데 이것도 결국 인간이 환경의 변화를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한마디로 심심하게 변화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변화를 모색한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활동과 자극이 필요하다. 


이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극을 주고 변화가 무쌍한 집이다. 집이 아무 자극도 주지않고 아무 변화가 없을 때 그것은 감옥이 되고 그 안에 있는 것은 고문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신이나 관념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그들의 위대함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자연의 법칙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이나 관념을 위한 집은 오히려 변화를 거부한다.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집은 애초에 살아있는 인간을 위한 집이 될 수가 없다. 신과 관념에게 놀이란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쯤되면 우리들중의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집이란 고정된 것인데 어떻게 변화가 있을 수 있냐고 말이다. 우리는 우선 몇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중의 하나는 집이 고정된 것이라도 인간의 생활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집을 볼 때 나는 서양의 귀족들이 계절에 따라 다른 집에 살 곤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름이면 여름 별장으로 떠나는 것이 유럽귀족들의 삶이었다. 즉 그들은 계절에 따라 집을 포함한 생활환경을 바꿔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집이 변화가 없어도 문제가 덜 되었을 것이다


변화하는 집에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또다른 사실은 변화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현대인의 삶은 전보다 더 열악해 졌다는 것이다. 농사꾼의 삶은 계절에 따라 변화가 있다. 농번기가 있는가 하면 농한기도 있다. 유목민족은 아예 계속 돌아다닌다. 전에는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작은 가족공동체나 지역공동체 안에서 일어났고 나이가 들거나 주변환경이 변하는 것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된 역할들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생길 때 당신은 그에 준하는 역할을 할 것이 기대된다. 반면에 전문화되고 시장화된 현대인의 삶은 아주 단조롭다. 역할에 변화도 거의 없고 특정 역할만 반복한다. 부모의 역할도 이웃의 역할도 단순해 졌다. 시장은 우리들의 역할을 거의 모두 빼앗아 갔다. 


아이들의 삶도 단순해졌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골목에서 나무 막대기나 돌멩이 정도면 아이들은 즐겁게 놀았는데 이제는 아주 많은 돈을 들여서 이런 저런 곳에 데려가지 않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이 친인척을 만나거나 친구랑 노는 것은 종종 시간낭비로 여겨진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들은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아이는 오직 공부하는 존재로서 존재의 의미가 단순해 졌다. 


우리는 돈을 지불하는 일로 대부분의 일을 대체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삶은 더 단순해 진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단순함을 이기지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해서 여러가지 체험을 사들여야 한다. 유흥비를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삶을 종종 더 단순화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 악순환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흩어져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좋다는 게 뭔지, 아름답다는 게 뭔지에 대해 기준이 없어진다. 뭘 지켜야 하고 뭘 줘버려야하는지도 알 수 없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있으려는 노력은 어느새 중단되고 만다. 직장일에 매여서 지불만 하고 수십년을 보내는 동안 사람이 아주 바보처럼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현대에서 쉽게 발견한다. 단조로움이 그들의 생명을 약하게 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내부는 이전에 죽은 것이다. 


과거에는 변화하지 않는 집의 문제가 작았다. 삶은 휴먼스케일로 출렁거렸다. 그런데 오늘날 삶은 전혀 출렁거리지 않고 단조롭다가 이따금씩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스케일로 뒤집어진다.  때문에 오늘날 인간적인 규모로 변화하는 집의 가치는 옛날보다 오히려 더 크다. 모든 음식을 사먹을 수 있다고 해도 직접 요리하는 일이 소중해지고 모든 채소를 살 수 있다고 해도 직접 그것을 길러 먹는 일이 가치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집바깥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해도 행복한 집을 꾸밀 필요가 있게 되었다. 텃밭이 있는 집을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변화하는 집, 노는 집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래에서 말하겠지만 현대인의 집은 오히려 종종 더 단순화되었다. 이래서는 열심히 돈을 버는 동안 뒤로는 돈과 자아가 왕창 왕창 새어 나가는 식이 된다. 


이제 변화하는 집이 뭔가를 말할 때가 되었다. 나로서는 여기서 오늘날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단정적인 답은 줄 생각이 없고 주려고 해도 줄 수도 없다.  다만 집이란 본래 고정된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우리는 좀 어처구니 없지만 한국의 전통집인 한옥에서 변화하는 집이 뭔지, 집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편견이 뭔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한옥은 극단적으로 말했을 때 지붕과 기둥 그리고 창과 문으로 이뤄진 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벽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양옥보다 훨씬 적다. 창과 문은 단순히 열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을 개조하는 수준으로 다르게 만들수 있다. 제일 극명한 차이는 여름과 겨울에서 한옥의 쓰임새와 모양이 변하는 데에서 온다. 한옥은 겉에서 보이는 지붕의 넓이에 비해 실상 구들이 있는 집의 부분은 아주 작다. 원래 지붕처마가 길게 나오는 건물인데다가 외부로 열린 마루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것이 집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현대의 데크같은 실외공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옥에 있는 들어열개문 혹은 벼락치기문은 공간들을 나누고 합친다. 한옥의 마루를 실내공간으로 만들것인가 실외공간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래서 여름에 걷어 올리면 집이 아주 단촐하다가 닫으면 집이 커진다. 게다가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옥은 본래가 문이 많고 벽장같은 것들도 있다. 그래서 문들을 어떻게 여닫는가에 따라 집의 공간이 굉장히 여러가지 방식으로 통하게 된다. 서양사람들은 문하나 옆에 또 문을 내는 한옥의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들어열개문이 있는 한옥


게다가 한옥은 생활공간을 육면체로 가두는 구조가 아니다. 한옥은 ㄱ자나 ㄷ자 혹은 ㅁ자로 중간에 마당을 두고 집과 집이 서로 마주 보게 만든다. 여러분이 만약 동심을 잃지 않았으며 한옥이 준다는 온갖 문제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을정도로 선입견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ㅁ자로 중간에 작은 중정을 두고 사방을 툇마루로 둘러 싼 집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가슴이 뛸 것이다. 그런 집은 위 아래로 굴곡이 있으며 숨을 곳이 많다. 어딘가 문을 열면 이런 곳에도 방이 있네 하고 놀라게 되는 집이며 각자의 공간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면 서로의 공간이 보여서 저기서는 무슨일이 있을까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구조다. 요즘 집에 비하면 한옥은 놀이동산같은 곳이다.  


한옥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동안에도 변한다. 이것역시 한옥이 반 개방된 주거이기 때문이다. 한옥의 대청에 앉아 있거나 방문을 열고 바깥을 보면 햇볕에 따라 여러가지 그림자가 집의 모습을 변하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집이 한옥이다. 따라서 유리어항처럼 변해 버린 집과는 달리 우리는 기후의 변화, 시간의 변화를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로 노출되어 한옥이 반드시 더 춥고 더 더운 집인 것도 아니다. 한옥은 긴 처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햇볕을 가리고 해가 낮게 뜨는 겨울에만 햇볕이 들어오게 만든다.  한옥이 많은 창과 문을 가진 이유는 통풍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름에 시원한 집이다. 겉으로만 멋진 서양식 건물들은 대부분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한옥보다 훨씬 더 더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에어콘을 돌리는데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그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열기로 온 동네가 뜨거워진다. 


한옥의 겨울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식은 바로 요즘은 전국 어디나 가면 있는 찜질방을 떠올리는 것이다. 찜질방이란 결국 황토구들방의 호화판이기 때문이다. 전원주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마당에 황토방을 따로 한칸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짓고 나면 비록 한칸짜리 집이지만 본채 전부와 버금가는 쓸모를 느낄 수도 있다. 


나는 한옥이 완벽한 미래의 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옥은 짓기 비싸고 서양식 입식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이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싸게 빨리 그리고 크게 짓고 많은 냉난비를 내는 현대식 건축이 반드시 더 인간을 위한 집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환경을 위한 집도 아니고 말이다. 한 한옥연구가는 외국의 건축에는 철학이 보이는데 한옥에서는 그걸 볼 수가 없다고 불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철학이 없는 집이란 있을 수 없다. 철학이 안보이는 것은 그 배경의 철학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망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한옥을 보면 한옥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집이다. 변화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중정이 여러 방들을 이어주는 구조도 그렇다.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간의 집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는 여러가지 신기술과 신소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한옥을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제일 좋은 집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한옥의 의미를 고민하고 그것을 현대의 집에서 재현하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변화하는 아파트에 대한 소개를 얼마전에 본적이 있다. 그것은 전혀 한옥처럼 보이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한옥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한옥처럼 생겨야 한옥의 정신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트랜스포머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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