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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철학이 있는 집

철학이 있는 집 6 : 비밀 기지가 있는 집

by 격암(강국진) 2016. 7. 20.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차창밖으로는 아파트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바둑판처럼 균일하게 창이 난 건물이나 아래층 윗층 할 것없이 똑같이 생긴 건물 그리고 그런 건물들이 다시 복제되어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나는 원래도 아파트들을 싫어했지만 근간에는 아파트를 보면 우울해지고 화가 날 정도로 싫다. 내가 특히 싫어하는 것은 아파트가 가지는 그 균일성이다. 나는 바둑판처럼 균일하게 창이 난 건물이나 아래층 윗층 할 것없이 똑같이 생긴 건물 그리고 그런 건물들이 다시 복제되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이 너무 싫다. 너무 싫어서 오래동안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날 것같은 기분이다. 

 

 

한국의 아파트

 

사실 아파트라고 해서 한국의 아파트처럼 그 균일성이 극단적인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에 나는 프랑스의 아파트 사진들을 소개하는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이 글에서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 아파트라고 해도 모두 한국의 아파트들처럼 균일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랑스의 아파트

 

이 아파트는 하나의 산이나 나무를 연상시킨다. 혹은 여수에서 본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서 건축된 집들을 보는 것같은 느낌이다. 이 건물의 각 부분은 모든 다른 부분과 다르다. 다른 구조를 가지고 다른 전을 가진다. 따라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체험과 삶도 조금이나마 다를 것같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의 체험이 다르므로 만나서 그 체험을 나누고 서로의 집을 구경하기를 원하며 살 것같다. 커다란 나무나 산에 올라간다면 설사 한번 올라가봤다고 해도 여기도 올라가보고 저기도 올라가 보고 싶어지는 느낌이랄까. 한번 본 것으로 신비가 없어지지 않는다. 당신 집이나 내 집이나 서로 복사한 것처럼 똑같으니 궁금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식의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다. 

 

 

여수의 집들

 

 

애초에 한국에서는 모델하우스를 가지고 건물을 짓기도 전에 소비자에게 각각의 집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그 모델하우스의 복사품을 잔뜩 채워서 짓는 건물이 한국의 아파트다. 집이 지어지는 과정이 이러하니 그 결과물은 현기증이 날정도의 획일적 구조를 가진 건물일 수 밖에 없다. 소위 주택선분양제도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다. 전 재산에 해당되는 가격의 물건을 완성품을 보지도 않고 산다. 일단 사고 난 다음에는 가격이 떨어질까봐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그것이 보편적이다. 

 

내가 균일한 것이 싫은 이유는 그것이 또한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균일하다고 해도 저층의 건물은 그다지 싫지 않다. 고층의 건물이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나는 싫은데 그 이유는 그런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와 서로에게 가지는 관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은 모두가 모두에게 같은 관계를 가지게 만든다. 나는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의 사람과 같은 관계속에 있다. 그런데 이런 반복적 패턴은 자연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에서는 그보다는 소위 프랙탈 패턴이라고 알려진 식의 패턴이 자주 보인다. 

 

 

나뭇잎

 

나뭇잎위의 장소들은 균일한 패턴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몇학년 몇반 몇번식의 구조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주변의 존재는 나에게 특별하고 그렇게 모여진 작은 집단들끼리는 다시 끼리 끼리 집단을 이뤄서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고층 빌딩을 한번에 세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흐름에 따라 마을이 형성된 경우에는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게 된다. 나는 우선 우리 가족의 일원이고 우리 가족은 작은 마을의 일원이며 다시 그 작은 마을은 좀 더 큰 지역사회의 일원인 식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을 가지게 되고 결국 전체적으로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것같은 구조다. 우리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면서도 우리의 소재는 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퍼져있다. 우리는 바로 지역이라는 망에 연결된다. 

 

그런데 균일한 구조란 바로 소외의 구조다. 국가도 가족도 민족도 없는 보편성의 세계라는 것은 한편으로 평등한 꿈의 세계같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세계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나아가 존재하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모두가 모두에게 같은 관계라는 뜻은 모두가 서로에게 무서운 타인 혹은 낯선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우리의 존재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 속의 하나의 질점같다. 하나의 점에 국한되어져 있다. 획일적인 아파트는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건물이다. 

 

물론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 해서 그런 아파트에서도 이웃이 생기고 서로 간에 관계가 생기기는 하지만 그 구조를 보고 있으면 그 건물은 엄청난 수의 왕따를 양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무관심은 소속감이나 책임감을 죽일 것이다. 고층아파트 주민의 인간관계는 저층 연립 주민들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집단의 규모가 어느 이상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진다. 따라서 집단의 일부가 집단의 이름을 걸고 어떤 악행을 행하고 있어도 그것은 절제되지 못할 것이다. 집값이 떨어질까봐 쉬쉬하고 있을 뿐 층간소음 문제따위가 긴장감을 만들고 아파트 부녀회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거나 건물관리인에게 몇몇 거주자들이 폭언과 폭행을 행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한국에 가득하다. 그리고 물론 그런 이야기는 대개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우리가 소외의 구조를 가진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고 생각할 때 내가 그토록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프랑스의 아파트

 

 

우리의 획일적 사고는 아파트의 전체적 구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아파트를 짓는 문화가 한국인들의 정신을 파괴해서 다른 것들도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역사회가 균일하니까 집의 내부도 균일해 진다. 아파트건 단독주택이건 우리는 우리의 주거공간을 구분하고 그 안에 다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서도 우리의 획일적 사고 방식은 나타난다.

 

예외도 많이 있지만 내가 본 많은 현대 한국의 집들은 집안의 공간을 대개 균일하게 등분하고 있었다. 공간들의 크기가 고만고만하고 대담하게 공간의 모양과 크기가 다양성을 가지게 집의 내부를 구분하는 일은 드물다. 한마디로 지루하다. 

 

안방이라고 불리는 공간은 작은 방보다 물론 크지만 대개의 경우 그 성격에 그다지 차이는 없다. 거실이 통상 집에서 가장 큰 공간인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귀한 공간들을 아무런 목적의식이나 개성없이 그냥 숭덩숭덩 잘라서 여기저기에 이런 저런 이유로 쓰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공간의 개성이 충분히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집의 공간도 획일화되어 있다. 

 

이곳과 저곳이 모두 같다면 우리는 자기 집에서 갇히게 된다. 방은 여러개인데 마치 똑같은 차를 5대쯤 가진 느낌으로 뭘해도 새로운 기분전환이 될 것이 없게 느껴진다. 아파트 단지는 똑같은 아파트 건물들로 아파트 건물은 똑같은 아파트들로 이뤄지고 아파트는 다시 똑같은 방들로 이뤄진다. 이런 구조는 마치 방한칸으로 이뤄진 원룸들이 엄청나게 큰 빌딩에 똑같이 수천개가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단독주택단지도 종종 그렇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별로 없어서 넓은 부지를 똑같은 크기로만 자른다. 그결과 바둑판이 탄생하고 모든 집사이즈는 비슷해져서 결과적으로 동네가 지루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한옥만해도 요즘에 비하면 공간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가 하면 좁은 툇마루가 있고 마당이 있는가 하면 구들이 놓여진 방들이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도 확실히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옥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이니까 그렇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현대식 주택들도 그 구조가 훨씬 획일화된 경우가 많다.  

 

그 획일화의 한가지 이유는 외부 공간의 활용에 대해 들이는 정성때문이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햇볕이 워낙 뜨거워서 한국에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파리에서는 베란다나 옥상공간이 있는가에 따라 아파트나 집의 가치가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만큼 외국에서도 외부공간은 잘 활용된다. 하지만 그 외국의 집을 그대로 한국에 가져다 놓으면 외부공간은 활용하지 못하는 공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은 그 외부공간을 쓰기 위해 정자를 만들고 긴 처마밑의 툇마루를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파라솔이나 하나 가져다 놓거나 기껏 신경쓴다는 것이 차양을 좀 다는 정도다. 다시 말해 외부 공간에 대한 투자가 줄어든 것이다. 

 

물론 외부 공간의 문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요즘 집은 기본적으로 혼자 사는 집처럼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손님이 한명 오면 집안식구들이 어디 갈데가 없으며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 부모는 숨도 못쉬고 지내야 할 판이다. 이것은 아파트가 더욱 그런데 단독주택을 지으면서도 그런 고려를 하기는 커녕 아파트의 구조를 단독주택에 베껴온게 아닌가 싶은 경우도 많은 것같다. 아파트에 중독된 한국인들은 집을 지으라고 하면 자연스레 아파트 구조를 반복하는 것이다. 옛 한옥은 사랑채에 손님이 드나들면서도 안채쪽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분리가 있었다. 요즘에는 그런 고민이 실종된 경우가 많아 보인다. 

 

획일화되지 않은 집의 공간분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일전에 내가 본 길고 좁은 서재에 대해 말해보자. 그 서재는 길이로는 3-4미터의 공간이지만 폭은 1미터가 훨씬 안되는 공간이었다. 한옥같은 곳에 있는 툇마루정도의 크기랄까. 다만 양옥집이므로 그 공간은 삼면이 벽으로 막혀 있다. 그 벽중의 하나에는 벽에 여러개의 선반들이 달려 있으며 그 선반중의 하나는 의자를 놓고 앉으면 책상으로 쓸 수가 있는 높이다. 그러니까 윗쪽의 선반에는 책을 꼽고 아래쪽의 좀 더 넓은 선반은 벽에서 튀어나온 책상으로 쓰는 것이다.   

 

이 공간은 문이 달려 있지는 않지만 건물의 한쪽 구석에 있고 길고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쪽에 들어가 앉으면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 안에서는 오직 책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만 있을 수 있다. 좁고 집안의 구석에 있기때문에 그렇지 않은 다른 공간과는 다른 체험을 준다.

 

내가 일본에서 본 집들 중에는 층과 층사이에 어른은 서있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공간을 설치한 집도 있었다. 어릴 시절 나는 벽장에 들어가서 놀곤했었다. 이불속에 누워있으면 비밀기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공간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늙어버리지 않은 어른들의 비밀기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에 비밀 기지가 있는 집이란 정말 멋지지 않은가! 

 

공간을 구분하는 것도 멋없이 벽들로 턱턱 막는 것과는 다른 방법도 있다. 소파로 구획하거나 책꽃이로 구획할 수도 있고 높이가 천장까지 닿지 않는 가벽을 세우는 방법도 있다. 근사한 큰 식탁도 집에 있으면 좋겠지만 정말 이런 곳에도 탁자가 있네라고 할 정도로 작은 자리에 탁자를 놓거나 의자를 가져다 놓으면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작은 그곳이 오히려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런 공간들을 보다보면 단순히 크다던가 호화로운 것이 최고가 아니고 전체와의 관계에 따라 정말 작은 공간도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으로 부터 우리는 인간의 가치도 새롭게 생각하게 될 지 모른다. 단순히 돈이 많다던가 잘생겼다거나 성적이 좋다거나 하는 차원에서 사람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며 누구나 올바른 곳에 존재할 때 누구보다도 고마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집이란 멋지지 않은가. 

 

마을의 구획이건 건물의 구획이건 집의 구획이건 그 구획이 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은 망의 시대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망의 시대에 획일적인 정보는 아무 쓸 모가 없다. 다양한 정보가 필요하다. 각자 여러가지 체험을 하고 그걸 소통하고 합쳐서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망의 시대의 가치창조다. 

 

모두가 똑같은 구조의 집에 사는데 한국의 가구 문화에 다양성이 나타날 수 있을까?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는 누가 알아낼 것인가. 모두가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체험을 하면서 산다면 망은 뭘 위해 존재하게 되는가? 어느 동네에서 설혹 치킨집이 장사가 잘된다고 해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가 치킨집을 한다면 치킨집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금방 좋은 장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다양한 체험들이 망을 통해 합쳐지면서 다시 다양한 시도들을 만들어 낼때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획일적인 것이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우리는 다양성을 폭팔시켜야 한다. 그래야 가치가 생산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선분양제도에 따른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모인다. 그 아파트 한채의 구조 자체도 문제지만 그 아파트 한채 한채들이 모여서 이뤄진 전체 건물이 획일적이기만 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세상의 대세를 쫒아 사는 것도 굳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소수파로 사는 것도 멋지지 않은가? 튀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지만 남따라 대세대로만 사는 것을 권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과학의 시대란 탐험의 시대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여기저기를 탐험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그 결과 발전이 이룩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천년전부터 내려오는 종교서적만 들여다보고 외우는 일에 집중하면 어찌될 것인가. 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지구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전같으면 무시되고 사라질 수없이 많은 시도들이 네트웍으로 연결된 세계에서는 기록되고 테스트되고 금새 대세가 될 수도 있다. 다르게 살아보는 것이 가치있고 필요한 시대다. 이런 시대에 모두가 똑같은 아파트에서 획일적으로 사는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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