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9.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독재의 구분은 윤리적인 것이라 이해한다. 다시말해 사람들은 종종 민주주의가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재는 그와 다른 것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그대로의 그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가질 권리 그리고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분명 윤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또다른 방식의 견해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독재는 경쟁적, 자연선택적, 시장논리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조건에 따라 민주주의가 더 효율적일 수도 있고 또는 독재가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다만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이 견해다.
독재
정치적 시스템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고 이 글에서 중심적으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정보다. 우리가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보를 많이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상황에 맞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존재하는 정보의 양이나 그것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한 사람 수준에 있는 경우에는 민주주의보다 오히려 독재가 더 합리적 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걸 독재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지 독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전문가의 일이 그렇다. 여기 만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중에 제빵사가 단 한명이라면 빵을 만드는 데 있어서 우리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을 결정해야 할까 아니면 제빵사가 독단적으로 일을 하게 해야 할까. 이경우 모두가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발상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가지의 전문적 영역을 설정하고 그 분야에 있어서 비민주적인 발언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정한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경험과 정보를 특정한 사람만 가지고 있으므로 그가 모두를 위해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가 더 효율적인 것은 전문가가 등장하는 경우만이 아니다. 동창모임이나 친목모임같은 작은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다보면 우리는 종종 회장이나 총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단체가 너무 큰 것이 아니라면 그 회장이나 총무는 어느정도 독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반드시 그 회장이나 총무가 독재자가 될만한 위대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작은 단체에서 다뤄야 할 정보의 양은 한 사람이 다루기에 충분한 양이며 그런 경우 그 일을 누가 하건 정해진 책임자가 있어서 주어진 상황에따라 책임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빠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정보를 모든 회원에게 일일이 알리고 사소한 판단도 전부 다수결투표에 의해서 판단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일이 엉망이 된다.
작은 집단에서 다수결에 의존하는 민주주의란 무책임과 비효율이 되기 쉽다. 그 회원들은 항상 그 모임의 일에 대해 많은 에너지와 생각을 투자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수결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어떤 일에 무관심한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은 많이 모아본다고 해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가정 내부의 일에 대해 인터넷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움이 되질 않는다. 조언을 얻더라도 그 가정을 잘 알고 그 가정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얻어야 한다.
인류가 과거에 독재라는 형태를 자주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의 교육수준도 낮고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기술도 없을 때 그리고 전체 집단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때 강력한 지도자가 존재하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경쟁에 이기는 집단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에서는 그 독재자나 그 독재자를 돕는 사람들이 아니면 발언권은 거의 없다. 그들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설사 그들이 꽤 똑똑하다고 해도 그들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정보 자체를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재는 독재를 강화한다. 어설프게 정보가 흘러나가면 사람들이 착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독재자는 모든 정보를 더더욱 독점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정보독점의 결과 더더욱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지고 그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므로 그들의 의견을 더욱 무시하게 되는 결과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황제는 신하가 황제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하가 황제를 모두 이해한다면 황제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하는 황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언제 화를 낼 것인지 몰라야 한다. 신하는 다른 신하의 정보에 대해서도 무지해야 한다. 그래야 황제의 권력은 안전하다. 반란을 일으키면 성공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신하가 모르기 때문이다. 백성도 지금 이게 공평한 건지 아닌지 잘 몰라야 황제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내시가 종종 권력을 크게 잡았다. 황제와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내시는 황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지도를 제작하고 유포하는 일은 대역죄였다. 정보는 독재권력과 충돌한다. 권력의 본질은 정보독점이며 따라서 정보는 그 본질이 민주적이다.
민주주의
문제는 기술의 발달과 집단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만들어 진다. 특히 정보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발달, 인쇄술의 발달같은 것이 이뤄진 후다. 이제 다뤄야 할 정보의 양은 너무 많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더구나 정보를 차단하고 독점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진다. 따라서 중앙독재는 반드시 실패하고 더구나 그런 실패의 이유가 대중에게 전보다 더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된다. 뭔가를 독점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독점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독재가 유지되기에는 너무 환경이 안 좋은 것이다.
독재의 모순이 축적될 때 정보는 마치 마약처럼 달콤하다. 앞에서 예로 든 지리적 정보를 생각해 보자. 그런 정보는 분명 독재자에게는 위협이 되겠지만 대중에 의해 잘 사용될 길이 있을 경우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발명품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일 수 있기에 비밀로 해야 하지만 실은 산업적 목적으로 쓰일 때 아주 큰 쓸모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기술적 개혁으로 정보의 흐름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갈망하게 된다. 독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대중을 가난하고 힘들게 살게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점점 더 분명해 지는 것이다. 결국 개혁자의 메세지가 전체에 퍼지고 독재는 공격받는다. 기독교 내부에 있어서의 독재타도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도 인쇄술의 발달로 가능했던 것이다. 마틴루터는 95개 반박문을 써서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는데 이 반박문은 2주만에 유럽전역에 퍼졌다. 이는 마틴루터가 반박문을 쓰기 전에 쿠텐베르크 인쇄술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재를 깨려고 하는 사람들은 우선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바로 계몽이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식인과 교육받아야 할 대중이라는 구분이 나온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진실을 퍼뜨리는 것이 지식인의 윤리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거꾸로 이 진실을 절대적이고 변할 수없는 객관적 진리라고 선언하게 만든다. 뉴튼 같은 현대 과학의 시조는 자연의 운동 법칙을 발견해서 이걸 발표하고 아담스미스 같은 경제학의 시조는 경제적 법칙을 발표한다. 이제 세상은 성스런 신을 뒤에 가지고 있는 왕권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은 지나치게 되기 쉽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절대적 법칙들에 대한 자신감에 넘쳤다. 유럽사람들은 그들이 식민지 개발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비유럽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교육받아야 할 사람들, 해방 시켜줘야 할 무지한 사람들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침략을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은혜로 파악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보가 흐르는 기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파괴적인 간섭이 아니더라도 정보는 퍼지기 마련이고 민주화는 자생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히려 오늘날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에 존재하는 혼란을 보면 간섭은 비극만을 양산하고 정보의 흐름을 막는다. 길게보면 오히려 독재를 조장하고 민주화를 막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린 나라에서 그것을 찾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그걸 지배하는 나라간의 관계는 독재당하는 시민들과 독재자와의 관계와 같다. 정보의 분포가 비대칭적이고 독재자는 자기만이 가치있는 정보를 알고 있어서 자신의 판단만이 가치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독재자는 반드시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한다. 독재자는 여전히 세상의 일은 자기만이 제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있기 때문에 독재자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그들은 나라에 경제 발전같은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 반대로 민주주의를 윤리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업적을 과소평가한다. 민주주의 운동을 도덕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종종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경제를 위해서는 해가 되는 일로 이해한다. 그래서 형편이 좋아지면 민주주의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민주주의를 해야할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것은 경제를 망치는 것이며 그 경우 민주주의 운동이야 말로 가장 경제성장을 위해 이로운 행위다.
독재는 그 본질상 정보를 독점하려고 하고 정보가 흐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경제를 망친다. 경제가 성장해서 민주주의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니까 경제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경제성장의 결정적 공로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가져야 한다. 시장이라는 경기장에서 1등을 한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노력만 기억할지 몰라도 애초에 어느 정도 공평한 규칙이 유지되는 시장이라는 곳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왕이 상거래를 막아버리고 심한 세금을 물리고 화폐의 유통을 막으며 사람이 모이는 것을 막고 부패가 만연해도 그 전모가 알려지기 어려운 나라에서 시장 경제의 승자란 있을 수 없다. 시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우리가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해 이런 시장주의적, 진화론적 관점을 택하게 될 때 우리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이분법을 포기하게 되거나 적어도 상당부분 그것을 완화해서 이해하게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윤리적인 견해는 그것을 어기는 것을 나쁜 행위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고정된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의미한다라는 식으로 이러저러한 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분명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재는 절대악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절대선이 된다. 일단 이런 식의 관점을 가지면 과거의 독재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로 대체되었듯이 앞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도 뭔가 다른 것에 의해 교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라는 관점에서 독재와 민주주의를 보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다와 크다의 이분법처럼 쓸모없어 보이게 된다. 정보의 양이 증가하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고 할 때 정보의 양은 0에서 어떤 고정된 값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증가하며 물론 지금 우리가 다루는 정보의 양보다 미래 사회에서 다루게 될 정보의 양은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도달할 수가 있겠는가.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왜 몇개의 이름을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가.
설사 사회적 변화가 패러다임의 변화처럼 혁명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단계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고 해도 오늘날의 우리는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이분법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제2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배워야 하며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또 다른 종류의 독재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시대에 인쇄술과 과학혁명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지금 4차산업혁명과 망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통신과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우리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크고 빠르게 바꿔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제2의 구텐베르크 혁명이라고 할만하다. 책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대중은 오직 남의 입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책이 보편화되자 이제 더 많은 곳에 정보가 보내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책을 쓸 능력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책을 읽고 해석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을 요구했다. 요즘에는 오지의 문맹자도 얼마든지 세계의 구석 구석을 높은 해상도의 화상으로 구경할 수 있다. VR를 쓰면 아예 그곳에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삼국지같은 소설이나 성경은 오랜간 알게 또는 모르게 일종의 윤리적 체계를 사람들에게 주입해 왔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양의 멀티미디어 매체를 거의 무료로 배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미 와 있다. 태블릿을 가진 아프리카의 한 소년이 무선인터넷을 기반으로 무한대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소년은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를 보면서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울런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태블릿으로 인기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지능을 가진 망을 통해 즉각적으로 현실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능은 인공지능이기도 하고 망에 접촉하는 다른 사람의 지능이기도 하며 그것들이 융합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 하나의 정보가 가지는 가치는 즉각적으로 평가되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시도가 성공하기는 어렵다. 정보자체가 현금처럼 보일 때 그걸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페이팔 회사처럼 인터넷에서 돈을 주고 받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며 망의 발달로 인해 그 사업 아이디어를 거의 즉각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이 만약 성공한다면 전 세계적인 부자가 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을 법으로 규제하려고 하는 중앙의 시도는 엄청난 분노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누가 상상하기 힘들정도의 부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는 그럴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페이스북을 만들었는데 그걸 정부에서 좌절시키고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여 엄청난 이득을 만들어 낸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문제의 핵심은 다시 정보의 양과 예측의 불가능성으로 돌아간다. 지금 세계는 그 복잡성이 폭팔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여기서 정보를 독점하거나 정보의 흐름을 조절하려고 하는 시도는 또다른 종류의 독재로 인식되어야 마땅할 것이며 그같은 독재행위의 모순이 누적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현재의 세상이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낡은 독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타도하고 세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우리안의 독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새로운 해방과 자유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이상적으로 말했을 때 우리는 이미 자유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해진다. 우리는 오직 낡은 독재의 잔재나 부활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가치판단과 우리의 사고는 중앙의 기준과 객관주의적 관점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그 결과는 다양성이 억압되는 것이고 이것은 망의 시대에 아주 중요한 가치의 원천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
객관주의적 관점이란 우리 모두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똑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학의 법칙에서 경제학의 법칙, 사회적 법칙과 심리적 윤리적 법칙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같은 법칙이 통하는 세상을 살고 있으며 계몽주의의 이상이란 바로 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서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와 물고기 그리고 인간은 과연 객관적으로 똑같은 세상을 살고 있을까? 어떤 극한과 이상에서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개미와 물고기와 인간은 모두 인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의 일부분에만 집중하고 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인식적인 한계가 학습과 망각에 의해 어느 정도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 살 수는 없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걸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데 모든 것을 투자한다면 그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개미에게 국가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태어난 개미는 이런 위기상황에 대해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성공하기 어렵겠지만 설사 그것이 성공한다고 해도 과연 그 개미가 살아생전에 행복할 것인가, 좌절하고 불행한 개미가 대한민국에는 도움이 될 것인가는 의문스럽다.
지구전체가 하나의 망으로 통합되어지고 그 사회적 복잡성이 날로 증가하는 시대에 객관주의적 관점은 몇몇 제한 된 경우를 제외하면 날로 무능해지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넓어져만 가는 인식의 테두리를 목격하면서 그 안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건 잘되지 않는다. 금방 뭐가 뭔지 모를 어려운 이야기에 좌절하고 자주 분노하게 된다.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상에는 도둑놈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며 자신의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기 쉽다. 어느 새 민주적 시스템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해지고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하나의 집단을 죄책감도 없이 지적으로 독재하게 되거나 우리는 애초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처신 따위는 포기하게 될런지 모른다. 즉 불행하고 불편한 진보주의자가 되거나 둔하고 비윤리적인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드디어 이 객관적이고 유일한 전체 세계에 대해 뭔가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개혁하려고 하는 사람은 종종 왜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는지, 왜 사람들이 개혁에 호응을 보내지 않는지 혹은 개혁이 성공했는데도 왜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지, 진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종종 세계의 아주 일부만울 인식하고도 자기가 볼 수 있는 것을 세계전체로 착각한다. 게다가 그가 워낙 뛰어난 인물이라 엄청난 폭의 세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대부분의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인식의 폭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시스템, 상식이 통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시스템일 뿐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에게 꼭 맞는 지식과 도움으로부터 소외되어져 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세상은 특히 가난하고 바쁜 사람들에게 나쁘다.
오늘날의 독재라는 것은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사상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객관주의적 이상속에서 대학이나 연구소 그리고 언론사등을 통해서 지적 권위를 세우고 자신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보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생긴다.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 경우는 많은 사람들은 지적인 고문을 당해야 한다. 자기 앞마당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수긍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미치게 한다. 게다가 뛰어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설사 그런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경우에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 이유때문이다.
망의 시대는 망이 주도하기 때문에 망의 시대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사회를 주도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 미래사회를 주도할 것이며 미래사회에서는 다양성의 가치가 지금보다도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아보면 과학의 시대 이전의 시대는 신이나 영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신이 아니라면 진짜 소수의 독재자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과학의 시대에는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정치적 리더와 학자와 사업가의 시대였다. 그들의 숫자는 독재자의 수보다는 클지 몰라도 그들은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이고 승자였다. 이 지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엘리트들이 구성하는 객관적이고 단일한 세계 속에서 훨씬 많은 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모범이 되기에는 부족하며 교육되어지고 계몽되어져야 할 사람들로 존재했다.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이전과 다르지 않다. 법을 세우고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단 하나의 법이 많은 사람에게 예외없이 적용될 때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힘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것은 기계의 힘을 통한 진보다. 그것은 한편으로 침략과 규제의 역사다. 이 시대에 세계는 정밀한 시계와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시계를 세울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불량품이고 억제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얼마전의 폰켓몬 고 열풍은 누군가가 피카추 캐릭터 같은 것을 팔아서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이스 북으로 성공한 주커버그의 예는 더 극적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것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에서 피카추 캐릭터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가상의 세계 속의 가상일 뿐이다. 사람들이 농담이나하고 사진이나 서로 보여주는 카카오톡같은 메신저도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일반론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종종 오타쿠의 세계, 매니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완전히 시간의 낭비이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거듭 거듭 그런 매니아들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한 매니아의 세계가 주류 문화에 편입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꼭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불량품같은 것이 아니다.
발달된 망은 지방자치적이고 공동체 생성적인 삶을 장려한다. 하나의 망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연결하지 않는다. 하나의 망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산다는 것을 전제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반대를 원한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를 획득해서 그들의 규칙을 강제하지만 망의 성장은 그와 다르다. 동의하지 않으면 소통하지 않을 뿐이다. 망은 망 자체의 성장을 통해 자기의 힘을 증명한다.
종교의 시대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그 집단의 힘을 결정했다면 과학의 시대에는 지적 정치적 경제적 영웅들이 집단의 힘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 망의 시대에는 우리는 훨씬 더 많은 불완전한 보통 시민들이 전체 집단의 힘을 결정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는 한 명의 뉴튼과 아인쉬타인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면 망의 시대에 우리는 다수의 괴짜를 원한다. 세계를 이끄는 것은 더 이상 노벨상 수상자같은 사람이 아니고 유튜브 스타나 인터넷 동호회의 스타다. 마을 만들기를 하는 사람들이나 협소주택을 짓는 사람이나 지역 협동조합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 하나 하나는 우리가 과거에 지도자나 영웅으로 불렀던 사람들이 가졌던 위대함과 완벽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세계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주변에서 필요했던 어떤 것을 해결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망으로 연결되어 활동할 때 망은 과거의 어떤 지도자나 영웅보다 더 강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했을 때 그런 사람들을 가진 집단이 번성하는 것이 망의 시대라는 뜻이다. 진취적으로 삶이 던지는 질문을 자기나름대로 풀어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망에 접속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그런 사람들이 연결된 망을 가진 나라가 망의 시대에 번성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망의 시대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보다 더 강력한 민주주의, 더 강력한 자유를 지향한다. 그리고 다양성의 확장과 유지를 위해서는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좀 다른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질적 의미에서 객관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우리의 규칙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우리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학교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학교를 다니지 말아야 한다. 페미니즘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면 실제로 그렇게 살면된다. 강력해진 노동자의 권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부자들끼리만 살아서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가 전체를 보고 있다거나 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진 무지의 벽 너머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겸손한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 대해 어떤 사람은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얽혀있고 학업과 직장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싫은 사람도 참고 살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 이런 미래가 1년이나 2년안에 오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미래에도 정도의 문제일뿐 문제는 있고 싫은 사람을 참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얽힘은 점차로 느슨해 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란 바로 우리가 원한다면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살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우리는 과도기를 살고 있으므로 그 일이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망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가정과 이웃, 직장과 지역사회가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는 이미 망 자체에 의존하는 비중은 높지만 서로에게 의존하는 비중은 줄어든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과도기를 살고 있다. 과거는 해체되었지만 미래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서로 동의하는 사람끼리 서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남과 경쟁하여 이기기보다는 동의 하는 것을 서로 도와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망의 시대가 지향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그런 망의 시대가 올 리가 없다고 비판하고 멈추는 대신, 내가 그런 망의 시대가 마음에 든다면 그런 시대를 만들기 위해 나는 뭘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것, 내가 모든 것을 다하지 않아도 망의 다른 쪽에서 다른 사람이 이것을 완성해 줄거라고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것이 이 망의 시대가 지향하는 삶이다.
물론 이 시대의 핵심은 망을 건설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망의 성질에 따라 윤리적 정치적 경제적 판단은 결정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한국인들이 어떤 망에 참여하고 어떤 망을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한국인들이 망에 참여하는 삶에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매우 미래지향적이며 망속의 삶에 참여하는데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망의 시대에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 빨리 미래사회로 변해가는 노력을 해야 진정한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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