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고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한다.

by 격암(강국진) 2017. 3. 6.

아침에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전날에 했었다는 방송 이야기를 했다. 그 방송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방송을 보지 않았지만 그 제목에 대해 약간의 논평을 했다. 한마디로 나의 의견은 우리는 질문을 그렇게 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보다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핵심적인 원인은 우리가 어떤 것의 의미를 묻기 위해서는 그 질문이 행해지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삶의 경계는 시간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라서 정해진 경계가 없고 따라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이 뛰어난 학자로 살았기 때문에 당신의 삶의 의미를 학자적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혹은 당신은 남달리 이성에게 인기가 좋아서 바람둥이나 풍류남아로 당신을 기억할지 모르며 그렇게 만난 여자들과의 로맨스야 말로 당신의 인생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것은 물론 어떤 다른 것도 곰곰히 생각하면 다 테두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학자는 성리학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적인 학자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가 뉴튼과 비교해서 어떤 학자라고 해야 하는가. 당신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라고 해도 당신이 유럽이나 한국에 온다면 그 잘생김은 인정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어떤 테두리를 가정하고 그 안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비교와 평가에는 반드시 테두리가 있다. 당신은 스테이크를 좋아하면서도 당신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지 모른다. 그것은 당신이 인간의 생명은 소의 생명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윤리적인 테두리를 인간에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문맥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심지어 이론적으로도 그런 상상은 결국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 인간이 기억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삶의 경계란 결국 그런 공허한 테두리보다 형편없이 작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21세기에 지구를 좁게 느낄 과학기술을 가졌고 따라서 인간의 평등을 쉽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과연 우리는 미국인과 일본인과 한국인과 중국인과 시리아 난민과 아프리카 빈민국의 인간을 평등하게 보면서 살아가는가? 시리아 난민은 고사하고 우리는 북한 주민들이나 재외조선족에게도 국경을 쉽게 열지 못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을 평등하게 생각하고 대우하고 있는가? 어딘가에 있는 어떤 어린애의 죽음은 내 가족의 죽음과는 달리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에서도 벌써 우리의 삶은 구분되고 제한된다. 그러니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에 펼쳐지는 범 우주적 보편에 근거한 삶의 의미운운은 아주 공허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삶이란 아주 복잡하고 때문에 아주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란 이것이다라고 최종적인 말을 할 수 없다. 이런 질문은 많다. 정의라든가 민주주의같은 것도 다 추상적인 말들이다. 우리는 단지 그런 말을 자주 쓰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을 알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민주주의란 좋은것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머뭇거릴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좋다고 답하는 셈이다. 사람들의 행동으로 보면 대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래서 다수의 뜻대로 일이 처리되게 만들면 그걸 민주주의를 하는 거라고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게 민주주의 일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가 겨우 그거라면 그렇게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대문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그 모양이 어때야 하는가를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까 아니면 관련된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할까.  당신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할까 말까하는 것은 당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인가. 이런 지적을 들으면 사람들은 물론 그런 건 당연히 옳지 않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모습을 맘대로 다시 조금 수정한다. 문제는 바로 그 당연히 뭐뭐인 것이 사람마다 혹은 그 사람의 삶의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벽과 테두리때문에 말이다. 세월호 피해자 부모를 좌파라고 공격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오류는 우리는 쉽게 민주주주의 선배국가들에게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란 좋은 것이지요? 라고 물어보고 답을 들은 후에 민주주의란 서구국가에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유럽이나 미국 민주주의를 보편적 선으로 여기는 논의를 계속하기 쉽다는 것이다. 뭐뭐뭐는 원래 이런 것입니다라는 말들이 나열되는데 여기서 원래란 그 제도를 처음 만들었던 다른 나라에서 그랬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이란, 헌법이란, 의회란, 사법부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논의가 계속되면 우리는 어느새 독일처럼 사는 것, 프랑스처럼 사는 것, 미국처럼 사는 것이 정답이며 그와 다른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고 그걸 뒤집기도 어렵다. 이미 민주주의는 좋은 것입니다같은 답을 여러번 말했기 때문에 쉽게 그 단계 단계의 논리적 문제를 지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은 추상의 세계로 발돋움해야 하지만 구체적 세계, 내 주변의 세계에 기초해서 가끔 그렇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가 나쁜 정치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추상적인 질문에 답 비슷한 것을 만들어 대다수 국민에게 교육하려는 것은 낡은 계몽주의적 이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아주 훌룡한 분에 의해서 그런 질문의 답이 주어지면 그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좋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만 그런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한다. 결국 그것은 어딘가에서 지적인 독재가 된다. 누군가의 맘속에 있는 상식과 테두리가 모든 사람에게 강제된다. 


결국 우리의 살아온 과거가 우리에게 관습을 남기고 상식을 남긴다. 고조선 이래의 우리 문화가 그렇고 해방이후의 공화정의 역사가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살아봤더니 참 싫더라, 누구만 좋더라. 그러니 우리 그렇게 살지 말고, 이것은 꼭 지겨야 하는 금기로 남기자고 하는 것이다. 삶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남의 경험을 가지고 쉽게 살아보려는 노력은 결국 나중에 큰 댓가를 치루게 만든다. 우리가 아직도 낡아빠진 박정희와 반공정권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댓가의 일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하기 보다 정답을 말해줘 왔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부끄러울 만큼 협소한 관점을 정답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