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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자유로운 사회와 그 적들

by 격암(강국진) 2017. 5. 31.

17.5.31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드문 것같다. 그 결과 자유를 위한 행동이라고 흔히 생각되는 것들이 오히려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같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서 그 적이 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거론해야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다. 우리는 흔히 부자유를 억압의 결과나 어떤 악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는데 부모님이나 사회나 어떤 악당 국가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식이다. 물론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에도 분명 일정부분의 진실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자유를 파악할 때 우리는 제대로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면 사실 자유는 그 반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부자유하게 태어난다. 자유란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억압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억압이 없는 상태란 불가능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환경속에 있으며 모든 억압이 없는 자유를 꿈꾼다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지배하겠다는 꿈을 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유는 곧 타인의 구속과 환경의 지배를 말한다. 말하자면 내가 세상 사람들을 싹 다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 자유 같은 거 말이다. 이런 게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다고 한 들 그걸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와 끝없이 싸우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가 아닌 것을 권리로 주장하고 그 행동의 책임은 지지않으려는 태도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남의 집 사과를 그냥 먹고 난 사과를 먹을 자유가 있다고 하면 싸움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원시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유인에 대한 환상은 그 인간이 거의 무한대의 환경적 자원을 즐길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자원이 넘치는 낙원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상상이다. 게다가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면서도 현대 도시생활을 하는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연속의 인간은 대개 불쌍한 짐승일 뿐이다. 자유는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자유란 우리가 타고나는 권리라기 보다는 우리가 인위적인 노력으로 달성해 내는 질서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자유를 이룩하는 첫번째 조각은 사상적 구성이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장소에 집을 지어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과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는 정부를 타도해서 자유를 성취하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만큼의 자유를 지킬 정부를 세움으로써 그런 자유를 성취한다. 



자유가 타고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교통 신호가 없는 나라에서는 자유롭게 운전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다. 그런 나라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운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없다.  공권력이 무너진 아프칸 같은 나라를 인간이 자유로운 나라로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동네 깡패를 두려워하며 살게 되는 것인데말이다. 뭐가 자유롭겠는가. 



자유는 질서의 반대말이 아니라 비슷한 말이고 질서는 사실 일종의 억압이다.  억압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자동차는 우리에게 빨리 달리고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동차는 이러저러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필요가 있다. 미끄러운 길에서 전속력으로 커브를 틀면 사고가 날 것이다. 상식적인 운전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상식적인 운전법도 결국 억압인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억압이 우리에게 같은 수준의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자유는 하늘이 준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성취이며 사상적 구성인 것이다. 자유의 개념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뉴튼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다. 뉴튼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모두 하늘에 있는 별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뉴튼의 물리학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뉴튼이 말하는 법칙이 훨씬 더 보편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며 무엇보다 훨씬 더 작고 당연해 보이는 가정에만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서는 수십개의 원들이 중첩되어 사용되어서 별들이 하늘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설명하는데 그게 꼭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다. 



물리학과 자유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런 비교를 통해서 보다 보편적이고 강력한 법칙이 우리의 환상을 제거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부엌에서 음식이 썩은 것은 부엌신이 노한 것이고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은 제우스가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설명들은 매우 제한적이고 그래서 설명이 길고 구차해 지는 특징이 있다. 자꾸 설명에 설명이 붙는다. 이런 복잡한 이해는 여러가지 금기와 환상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개하는 세상속의 질서가 훨씬 더 단순하고 보편적이라서 우리로 하여금 수없이 존재하는 금기를 벗어 던질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억압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는 우리의 타고난 권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환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 역사때문이다.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는 혁명가들은 그 새로운 자유를 우리의 타고난 권리라고 주장하고 본래부터 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건 사건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혁명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은 실상 자신이 부자유하다는 개념도 없다. 그건 그저 원래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가 이미 혁명을 만들만한 어떤 요소를 악이나 억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면 사실은 혁명은 이미 거의 막바지에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새로운 질서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저항이 아니다. 유치원생의 투정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 될 수 없다. 자기 나름의 책임있고 사려깊은 생각없이 그저 온갖 것을 단순하게 억압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부자유가 거기에서 나온다고만 파악한다면 그런 행동은 오히려 우리의 부자유를 계속 연장시킬 뿐일 것이다. 교통순경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자유를 준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그 사람은 사고를 당하던가 사고의 위험성때문에 사회적으로 처벌받을 뿐이다. 



자유는 사상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자유에 대한 두번째 조각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어느정도 암시되었는데 자유는 동의와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중 인간이 가장 중요한 환경중의 하나지만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여러가지 환경적 요소에 둘러쌓여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즉 내 생각과 내 행동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속에서 타협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 세상은 본래 왕과 백성으로 이뤄져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의 윤리관은 적어도 현대에는 잘 맞지 않는다. 자비로운 왕도 한 개인일 뿐이어서 오늘날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독점적 권력을 가지고 책임있게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그 사람이 봉건적 사고방식을 끝끝내 유지한다면 자유의 성취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일단 봉건적 사고를 하는 그 사람의 자유가 제한당한다. 현대의 사회적 환경에 맞지 않는 질서란 결국 비효율적이라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 비효율에 대한 비난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의 존재는 공화정을 믿는 사람의 자유도 제한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21세기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대다수가 봉건적 사고를 하고 있으며 소수파만이 공화정을 믿는다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되는 것은 오히려 이 소수파일 것이다. 



자유는 주관적인 것이다. 인간은 꼭같은 환경에 있어도 자유를 느낄 수도 있고 속박을 느낄 수도 있다. 내 가족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 내 연인에게 뭔가를 해주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자유인데 반해서 꼭 같은 일을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 그것은 지긋지긋한 노동일 수도 있다. 따라서 똑같은 헌법을 가지고 똑같은 관례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회가 있다고 해도 그 안의 시민들이 어떤 사고를 하냐에 따라서 시민들은 자유를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억압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 성취는 대부분 동의와 공감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나온다. 봉건적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공화정을 주장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공화국 내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그렇게 살아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감하게 하는 일이다. 



이 자유의 두가지 요소인 사상적 구성과 공감을 합치면 설득이 된다. 자유는 공권력에 의한 협박이나 제한이 아니라 설득에서 나온다. 설득이란 설득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설득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자유는 설득에서 나온다라는 문장을 앞에서 말한 내용없이 그대로 읽는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거리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의 적은 이제까지 말한 것 안에 들어 있다. 자유를 그저 댓가없이 노력없이 타고난 권리로 말하는 사람도 자유로운 사회의 적이다. 어떤 종류의 질서이건 그저 질서를 파괴하면 자유가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유로운 사회의 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범죄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보편주의에만 빠져서 대안에 대한 고민도 없이 기성질서를 파괴하면 자유가 온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서양식 동양식, 한국식, 외국식을 맘대로 섞어서는 자기 편할 때마다 바꿔서 말한다. 그건 자유를 추구하는게 아니다. 있는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 



설사 대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대안이 그럴듯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은 아직 설득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부자유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데 억지로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려고 하는 것도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적대적 행위다. 그것이 설사 왕비로 사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노예는 동의와 공감없이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억압만을 본다. 설사 프랑스나 독일같은 어떤 외국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라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사고가 프랑스나 독일인과 다르다면 꼭같은 나라안에서 한국인은 억압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중적 접촉이 항상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해야 한다. 자유는 행복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이러저러한 조건을 달성하면 오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설득에 실패하고 있으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피차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설득의 최대의 적은 권위주의다. 권위주의는 차별이고 대화를 거부하는 장벽을 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주의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이유로 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특정한 사람끼리만 만나게 만드는 일은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청년층을 배려하지 않는 노년층도 문제지만 노년층과 대화하고 만나지 않으려고 하면서 자기만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청년도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적이다.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적은 무엇보다 정신적 게으름이다. 물론 정신적 게으름은 육체적 게으름에서 종종 나오기도 하니까 그냥 게으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서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도 그냥 하던대로 살고, 던지던 질문만 던지는 사람은 어느새 억압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 사람이 소시민적으로 외롭게 산다면 그나마 큰 사회 문제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중대한 권력을 가지는 자리에 올라서서 게으르게 사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가장 큰 적이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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