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는 아프리카의 모로코 제벨이르후드에서 30만년전에 살았던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이런 숫자를 보면 인간의 역사에는 거대한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오래된 문명이라는 이집트 문명도 기원전 3천년경에 있었다고 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기원전 7천년경에 있었다고 하니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란 고작 만년정도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십만년 이십만년간 인간은 뭘 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문자사용이나 농경의 시작을 인간 정신의 시작 그 자체로 생각하면서 인간 역사의 대부분을 공백으로 인식할 때가 많다.
약간 이야기를 바꿔서 조선시대를 상상해 보자.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라던가 프랑스, 미국같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나라나 거기 사는 사람들은 조선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앞에서 말한 예가 우리에게 시간적 공백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면 여기서 말하는 예는 공간적 공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지구에 조선밖에 없다는 미개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더라도 외국이 자신의 생활에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공간적 공백을 가지게 된다.
시간적 공백이던 공간적 공백이던 인식의 공백들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우리는 그 공백속의 존재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우리는 때로 가뭄이나 기아때문에 사람이 죽어가는 지역에 대한 방송을 보면서 혹은 멸종하는 북극곰이나 고래에 대한 다큐를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거나 무시했지만 아이들이나 곰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이나 아픔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5만년전의 인류도 기계도 아니고 돌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개를 보면서도 감정을 느끼는데도 5만년전의 인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느끼게 되기 쉽다. 아쉽지만 우리는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굶주린 아이의 눈빛하나가 우리에게 공백으로 남아있는 거대한 대륙에 대한 의미를 바꿀 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신경쓰는 친구나 친척 단 한명만 아프리카에 있다고 해도 아프리카 전체에 대한 당신의 인식은 전혀 달라진다.
우리들은 공백안에 있는 그들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인과관계를 말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공백은 그래서 공백이 된다. 이 문제를 절대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공백으로 남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우리가 그 공백과 우리를 이어주는 이론을 만들어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공백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인과관계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살면서 만들어 낸 이론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관찰이 이론을 만들지만 이론이 또한 우리가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까를 결정한다는 것은 과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눈을 돌려서 우리가 이미 여러번 보았을 법한 그래프를 하나 다시 보자.
지구 전체의 인구수를 그린 이 그래프를 보면 지난 몇세기동안 인구가 정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추정에 따르면 기원전 5백년경에야 지구 전체의 인구가 1억을 넘겼다고 한다. 인구의 폭발은 물론 식량생산이라던가 기술발전, 일인당 노동 생산성같은 것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그리면 정성적으로 같은 모양의 그래프를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이런 그래프를 전에 본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이 그래프를 기억하면서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인간 역사의 대부분, 다시 말해 문자를 쓰지 않았던 유사이전의 시대를 공백으로 인식하고 있다. 마치 그때는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사실과 함께 이런 인구 그래프를 보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 인간들은 전자통신이나 인터넷의 발명 이전의 시대를 마치 문자를 쓰지 않던 유사 이전의 시대처럼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그 시대는 거대한 공백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5만년전의 인류를 돌멩이처럼 생각하던 우리가 어쩌면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농담도 아니고 생각보다 먼 미래에 대한 일도 아니며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일상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가 5만년전의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해 보자. 그런데 우리는 30년전의 사람의 모습은 비교적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 녹화기술이 발전한 이후라서 멀티미디어 자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30년전에 나온 드라마나 영화도 우리는 쉽게 즐길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그 녹화의 질이나 양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축적하고 있는 데이터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드디스크의 크기가 달라지는 속력만큼 인터넷의 속력이 달라지는 속력만큼 컴퓨터의 계산속력이 빨라지는 것만큼 우리가 축적하는 데이터의 양과 질은 달라져 왔다. 그걸 도서관에 비교하면 당신이 서가에 갔더니 서가의 99%가 현대에 대한 책이고 1%정도가 과거에 대한 책인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책의 양은 그대로 있는데 도서관이 천배로 커졌다고 하자. 그리고 여전히 그 도서관은 꽉 차있다. 현대에 대한 책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에 대한 책은 전체 책의 0.001%가 된다. 우리 눈에 과거가 보일까? 우리의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달라지게 된다.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세계는 과연 시공간적으로 어떤 곳일까? 집에 컴퓨터도 없고 작은 티비한대 있던 시절에 성장한 세대가 그걸 정말 이해할 수 있을까? 문서를 남기지 않은 유사이전의 시대가 우리의 인식적 공백속에 있는 것과 이 문제는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이제 데이터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의 속도와 복잡성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거나 미국이 금리를 아주 급격히 올렸다고 해보자. 이런 국제적 사건은 인터넷을 타고 실시간으로 세상에 퍼진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 상황에 영향을 주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론을 만든다면 그 이론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시간 스케일은 바로 이 정보가 흐르는 속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입소문이나 고작 파발마가 소식을 전하던 백년, 이백년전에는 경제학이나 사회학은 훨씬 긴 시간 스케일을 가지고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보가 흐르는 속력이 느리다는 것은 이론을 단순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때문에 외국의 반응이 나오고 그 반응이 되먹임으로 미국에 다시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는 경제 이론은 당연히 세계 전체의 상황을 고려해서 만들어 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시대에는 단기적으로는 마치 세상에 미국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론을 만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이론의 복잡성은 위에서 보여준 인구 그래프가 보여주는 폭발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한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이해가능한 거시적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멜서스의 인구론이라던가 마르크스 경제학은 느긋했던 옛날에 무었이 가능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들은 방대한 데이터 수집없이 몇개 되지도 않는 변수를 가진 이론을 만들어 세상을 설명했다. 그것은 마치 인간 교환수가 전화가 오면 이 집과 저 집을 수동으로 연결해서 통화를 하게했던 시대를 연상시킨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전화를 걸면 컴퓨터가 통화자들을 이어주는 선을 자동으로 빠르게 찾아낸다. 누구도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통화를 하는지 일일이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걸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컴퓨터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역사학계도 그렇고 경제학계도 그렇고 학계에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연구자들은 거시 이론을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엄격한 학문적인 기준으로 말했을 때 가치있는 거시 이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보이고 점점 더 그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미국 경제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다면 경제학자가 아니면 참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학자라면 그 주제에 대해 지금 나온 학계의 학술논문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학자가 된다. 그런데 미국 경제라는 주제와 관련된 학술논문이 얼마나 될거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문제 때문에 모든 학문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지극히 미시적인 문제에 파고들게 된다. 분야를 줄여서 복잡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조금만 범위를 넓혀도 죽을 때까지 남의 이야기만 읽다가 정리도 못하고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자는 남의 논문을 많이 읽는 것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논문을 쓰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은 좀 악순환이다. 인정받기 위해 논문을 더 쓰면 이제 세상에 논문의 수는 더 많아지기 때문에 후배들은 더더욱 공부하기 어려워진다. 더더 작은 분야의 미시이론으로 학문이 끝없이 세분화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런데 거시 이론이 없다는 것은 의미적인 위기를 불러온다. 가치나 의미란 거시적인 문맥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거시적인 이론이 불가능할 때 어떤 논문 혹은 어떤 행위의 가치는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되기 쉽다. 예를 들어 논문을 열배 많이 쓴 교수가 열배로 좋은 교수고 유명 잡지에 실린 논문이 좋은 논문이다. 인용횟수가 열배 많은 논문은 열배 뛰어난 논문이고 백배로 많은 돈을 벌어준 기술은 백배로 좋은 기술이 된다. 이 세속적인 잣대는 자기 순환의 논리에 빠져 있다. 물론 학계나 과학기술계 전체가 대중주의나 인기영합주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유능하니까 유명해지는 것인지 유명해서 유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이 현대사회에서는 있다. 그리고 그런 면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데 그 근원적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거시이론의 불가능성때문이다. 이렇다보니 학문도 유행이 불면 그걸 따라가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왜 그게 중요하냐면 유행이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라면 여기서 학계와 무관한 사람 혹은 논문수를 늘려서 학계에 자리를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가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거시적 이론을 다루는 고전들이며 학자들이 내놓은 새 책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다보면 학계의 문제는 더이상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은 이성의 상징이며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다. 그 도구가 질적인 변화를 겪고 위기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학자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위기고 인간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댐을 건설한다고 하자. 이게 가치있는 일일까 없는 일일까? 이런 대답을 거시적 이론은 모르겠다고 하는 학자가 대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댐을 건설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결론을 주는 단 하나의 논문을 원하지만 학자들은 수만편의 논문을 원한다. 또 결론이 나면 안된다. 그러면 논문을 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댐 건설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방해가 될까? 결국 어떤 무식한 독재자가 자기 입맛에 맞는 말을 하는 전문가만을 불러다가 자기 의지가 곧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학계가 무력해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학문은 오히려 상식을 파괴하는 도구로만 작동하지 않을까?
알파고같은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그것은 앞으로 세상이 지금보다도 더 빠르고 복잡하게 움직일 거라는 뜻이고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고려하여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범용적인 거시이론이 더더욱 힘을 잃을 거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가 겪고있는 의미의 위기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 질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서로를 잊게 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공백속으로 빠져서 사라지는 것이다. 왜냐면 이 이론의 문제속에서 당신이 허겁지겁 잡은 그 이론이 나를 당신의 공백속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타지속에서는 서로를 잊은 형제가 서로를 죽고 죽이기도 한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인가. 아니 지금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발견의 시대에서 창조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발견의 시대란 절대적인 진리를 퍼뜨리는 것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낡은 계몽주의적 이상이 통하던 시대를 말한다. 거기에서 우리에게 거시적 이론이란 이론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절대적 진리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찰속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더 많은 관찰, 더 많은 데이터, 더 많은 지식이 더 좋은 거시적 이론을 발견하게 해주고 우리는 앤서니 크론먼이 교육의 종말에서 말한 학술연구적 이상에 몰두하게 된다. 발견의 시대는 어느 정도 반인간적인 시대다. 왜냐면 인간이전에 진리와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를 보지 않고 진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는 옳은 일을 하면 인간이 행복해 진다는 것을 믿고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이 불행을 느껴도 진리는 포기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가 인간보다 앞에 있다는 의미다.
창조의 시대란 게임의 시대다. 우리는 절대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게임의 법칙이 유지되는 공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 공간이 살기 좋지 않다면 법칙들은 개정되어지거나 새로운 게임이 만들어 져야 한다.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법칙은 그 공간내에서 우리의 행동을 가치적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행복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 이상의 게임들에 동시에 참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학술회의에 참석했을 때와 록 컨서트에 참석했을 때 당신이 다른 규칙을 따를 것을 요구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 이상의 게임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나오지 않는 폐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게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게임은 변화가능하고 다른 게임도 가능한 것이다. 이 게임과 저 게임을 비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행복이다.
이러한 시대에 고전이나 혹은 현대의 거시이론은 절대적 진리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유적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마치 내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이 주택단지에 가서 이런 저런 집들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저런 구조를 가지면 어떤 기능이 있을 것이며 이런 구조의 집을 짓는 데에는 비용과 시간이 얼마나 들 것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 집들을 구경하는 것이지 그 집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그 안에서만 살기 위해서 집을 보는 것은 아니다.
또 설사 남이 지은 집안에 산다고 하더라도 자기 집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세상에는 다른 집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집이 내 맘에 든다라는 태도로 사는 사람은 발견의 시대, 절대의 시대를 벗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지금의 집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때로 내가 지금도 여기에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황이 바뀌었으니 이제 집을 더 넓히거나 줄여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집은 혹은 우리가 사는 방식은 계속 고쳐야 하고 때로는 완전히 바꿔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이 현대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지은 변화하지 않는 신전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내 집을 고쳐가면서 지어가면서 살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문제의 해결은 그 게임의 법칙에 의해서도 물론 해결되지만 그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융합과 공동체 정신에 더 많이 의존한다. 재미있는 게임을 하면 물론 재미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가 싫은 사람, 게임에 협조하지 않고 잘 참여하지 않는 사람과 게임을 하면 법칙이 같아도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진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종종 부조리하게 보인다. 정도의 문제일 뿐 어느 정도 그런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세상을 모두 이해하게 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사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옆집에 게이가 산다는 뜻은 당신이 게이가 되겠다던가 당신의 자식에게 게이로 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옆사람과 똑같이 살 필요가 없다. 다만 당신은 당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는 있다. 진리는 하나이니 옆사람 따라하면 저절로 잘살게 되는 것과는 다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자기 성찰이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가 사는 집을 둘러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집을 고치거나 바꾸는 것은 둘째로 치고 자기 집을 둘러보지도 않으니 이것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하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첫번째 덕목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자기와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어떤 권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상인식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는지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공백은 조용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가 않는다. 독서를 하고 혼자서 산책을 하고 글을 쓰는 식으로 자기를 정리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던 것은 계속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부조리해지는 이유는 자기 성찰의 흔적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 능력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도 많다. 자기성찰이 없으니 부끄럼이 없다. 부끄럼이 없는데 권력을 가졌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꼭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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