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
조선은 왜 성리학자들의 나라가 되었을까? 그것은 물론 유학자들의 세력이 조선을 세우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중에는 조선을 세우는데 찬성한 유학자 세력이 아니라 그것에 반대한 유학자 세력들이 조선을 차지했다. 그들은 고려를 배반하고 조선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충성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지방에 가서 사람을 키웠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는 중앙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정치싸움에 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들이 조선을 차지하고 조선을 성리학자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계속 해서 사람을 키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집단적으로 보았을 때 유달리 바보같은 선택을 많이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특정한 선택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들에 얽힌 논란에 빨려 들게 되므로 나는 그냥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말 하고 싶다. 집단으로서의 우리 사회는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의 전문가집단과 언론은 그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 답이 부정적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 왜 낡은 시대는 끝나지 않는가?
조선시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 답은 분명하다. 당신이 합리적이라고 공감하고 수긍할만한 사람들이 사람을 계속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진보적인 시민, 깨어있는 시민의 연합을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여러가지 정치적 발전도 있었기는 했지만 결국 해방이후 점점 더 번성해왔던 것은 소위 보수적 세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사람을 훨씬 더 많이 키웠다. 그때문에 박근혜라는 말도 안되는 인물이 나타나서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지금처럼 된 상황에서도 한국이 꼭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나라로 발전해 갈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재계며 법조계며 학계등 사회 모든 분야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망들이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소 바뀌었다고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키웠는가. 교육기관과 경쟁을 통해서다. 우리나라에는 엄청난 돈이 오고가는데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불분명한 집단이 적어도 세 군데가 있다. 하나는 종교집단이고 또하나는 군대이며 마지막 하나가 바로 사학재단들이다. 그런데 사학재단은 대학을 포함한 학교들을 운영한다. 한국의 지성적 권위는 통상 대학교수들이 가지고 있는데 그들을 교수로 고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학재단들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지성의 집단적 합리성은 사학재단들의 합리성에 의해서 상한선을 가지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상을 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으며 사학재단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후 어떤 대학들이 계속 명문이었고 어떤 대학들이 새롭게 성장했는가 생각해 보라. 좀 특이하다는 카이스트나 포항공대도 결국은 보수세력이 세운 것이다. 이런 현실은 왜 우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반세기이전의 상태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있는지, 미국에서 박사받고 돌아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교수가 되면 왜 금방 전형적인 한국교수가 되는지, 왜 언제나 보수가 이 나라를 다시 차지하는 일이 반복되는 지를 설명해 주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구글같은 기업이 한국에 있고 그들이 대학을 세운다고 하자. 나는 구글이 천사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왠지 그 대학의 교수들의 발상과 주장은 지금의 한국교수들의 발상과 주장과는 매우 다를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권위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집단적으로 성장해 나갈 때 장기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기본적 상식이라는게 바뀌게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노무현정권때 인기좋았던 김용옥도 요즘 인기 좋은 유시민도 어떤 학파나 학계의 거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외톨이에 가까우며 전문가 집단을 대표하는 교수사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다.
돌아보면 김대중 노무현 10년 정권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정권은 있는 데 새로운 집권세력이 없었고 지지자들이 흩어지고 나자 청와대는 바로 고립되었다. 학계도 노동계도 언론도 그저 청와대를 공격만 했다. 상황이 이러니 누군가 시민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나 그녀가 실제로 훌룡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이 공격받아 쓰러지고 나면 새로운 흐름은 금새 죽는다. 그것이 진보적 인사들이 엄청난 사회적 압력과 비난의 위협을 받는 이유다. 그저 한 사람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것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집단적 합리성은 그 사회의 언론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합리성을 걱정할 때 우선 언론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팩트에 기반한 사실보도면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깨어있는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연합된 공동체가 없어도 몇몇 깨끗한 언론사와 기자들이면 합리적인 세상이 가능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언론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언론은 중요하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능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정보를 얻고 그 일들의 의미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러가지 정보채널들이 필요하다. 그런 정보의 흐름이 무너지면 누구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광주민주화운동때의 방송국들처럼 지금도 언론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진실을 완전히 은폐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판단능력은 극단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진실을 판단할 기초정보가 너무나 줄어들기 때문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청와대나 국정원의 직접적 개입같은 극단적인 정보 분석의 훼방이 없다고 해도 언론의 기능이 끝없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보도는 기본일 뿐 진실의 보도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똑같은 장소에서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목격해도 두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종종 엄청난 차이가 난다. 역사가 단순한 과거 사실의 나열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들에 대한 적극적 해석일 수밖에 없듯이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에 따라서 우리는 정보를 수집하고 그 위에 해석의 해석을 더해서 그 결과를 남에게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저 관리보고 부패하지 말라고 꾸짖고 사회문제는 그저 시민들보고 우리 더 윤리적으로 살자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올바른 정보를 받는다는 것도 그저 진실을 보도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연합되어 작동하는 지식인 집단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는 정보의 흐름을 막거나 왜곡하여 기득권을 보호하는 쓸데없는 권위주의도 너무 많다. 학벌에 관한 권위주의를 잘 보여주었던 좋은 예는 노무현의 학벌사건이다. 그 대단하다는 대선에서 이겨서 대통령이 되도, 고졸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일은 서울대에 가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인데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송에서 젊은 검사는 대통령의 고졸학벌을 강조한다.
이런 권위주의는 칸막이를 만들고 정보의 흐름을 막아버리거나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검사끼리는 아무래도 서로 다르고 동창끼리와 같은 회사 직원끼리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한국에서 한번 후배는 영원한 후배고, 한번 부하직원은 영원한 부하직원이다. 한번 삼류대학생이면 영원한 열등생이다. 모든 공기업 사기업에서 기수를 따지고 위아래를 엄격히 구분한다. 누군가가를 처음 만나서 그 사람을 뭘로 부르는가에 따라 -형님, 선배, 부장님, 회장님등- 우리의 인간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당연히 우리의 대화내용도 매우 달라진다.
이런 칸막이들이 기득권을 보호하는 한가지 방식은 착시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앞에서는 종종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 말은 그 사람을 그저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당신이 어설프게 생각한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잔혹한 노예의 주인들은 자기들끼리 꼭 잔혹하지 않다. 여성에게 가장 매너좋게 행동하는 남자가 때로는 가장 큰 여자의 적이다. 언뜻보면 그저 사람좋아 보이는 그들은 차별을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런 칸막이가 워낙 많으니 사람들은 위선과 기회주의에 젖어 들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직함을 한껏 부풀리고 분수에 안 맞는 집과 자동차를 구입하고 비싼 옷을 입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친절해 지고 더 고급정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쩌다 권력자의 친구가 되면 순식간에 신분상승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당하는 것은 잘 느끼면서 남을 자신이 차별을 하는 것은 잘 모른다. 인사 잘하고 자신도 잘 돌봐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거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공평할 거라고 쉽게 믿는다. 우리 사회의 불합리성은 종종 그런 판단에서 만들어 진다.
우리는 아직 깨어있고 열린 지식인의 연대를 성장시키지 못했다. 한국은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한줄로 나열하듯 대학도 한줄로 나열시키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교수도 한줄로 나열된다. 수없이 존재하는 칸막이들 속에서 합리성은 실종된다. 한국에서는 투기적인 행동이 자꾸 생긴다. 철새라고 불리는 정치인들만 그러는게 아니다. 교육도 그렇다. 국제중학교가 생겼다고 하면 모두 그리로 가지 못해서 안달이고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외고에 간다고 하면 이공계 취향의 학생도 뒤에 남는게 싫어서 인문계로 진로를 바꾼다. 몇년이 지나고 소동이 가라앉으면 적성면에서도 취업면에서도 인문계로 간것을 크게 후회하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이것도 한국 사회가 상식을 지켜서 중심을 잡아줄 지식인 사회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사기꾼들은 쉽게 성공한다. 불안한 사람들은 응당 살아야 할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한방을 꿈꾼다. 그들은 오히려 차분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른다. 몇억씩 빛내서 아파트 사지 않는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새로운 지식인들을 길러내고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를 확장하는 길을 걸을 수가 있을까.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물질적 기초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것에서 우리는 물론 더 많은 자부심과 희망과 행복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보다 다소 곤란함이 있더라도 살 수는 있어야 한다. 생활이 지속가능해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 과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들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물론 완전히 새롭지도 않다. 이미 여러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노력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를 확장하는 첫번째 방식은 돈이 되는 사업을 찾는 것이다. 나는 이미 구글이라는 회사를 언급했다. 우리가 간단히 구글같은 회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회사가 번성할 때 지금의 세습적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 기반한 회사들이 새로운 대안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경제 모델에 기반한 수익사업같은 것이 한가지 예다. 영상산업이나 출판같은 컨텐츠 사업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윤리적 소비를 위한 가상화폐를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돈이 되는 것을 찾고 그 사업속에서 모두가 지속가능하게 살아갈 수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경제력이 곧 개혁의 힘이다.
두번째 과제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 한국의 양대 문제인 대학과 아파트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학벌과 집을 구하는 문제로 평생을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모두가 그런 것에서 훨씬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들은 실로 엄청난 양의 노동과 돈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지금의 대학입시는 아무런 공익성이 없는데 대학을 고등학교처럼 평준화하고 최저학력만 넘어서면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들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부질없이 대학입시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없어질 것이고 사교육비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 자유로운 시민을 위한 대학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나아가 그 대학이 한국의 주류시스템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주거의 문제도 그렇다. 한국도 지방에 가면 1억짜리 집도 많다. 직접 집을 고치고 꾸미는 것을 고민하면 주거의 질이 가격에 비해 크게 올라갈 수도 있다. 집을 공유하고 교통비를 아낄 수 있는 곳에서 살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여유있게 살 수 있다. 이미 육지를 떠나 제주도 같은 곳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고 그 수도 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인의 삶에 이미 참기 어려운 모순이 누적되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스템을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누가 이 모든 것을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만들고 있는가? 물론 지금의 대학들이고 재벌들이다. 서울의 부동산값을 유지하는 한가지 방법은 지방에 사는 것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 한국의 최고대학들은 모두 서울에 모여서 엄청나게 비싼 땅을 깔고 앉아있어야 할까? 왜 좋은 직장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가. 정치 경제 교육 모두를 한 도시가 독점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뒤집어말하면 지금의 한국은 그 비효율적인 상태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낭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집, 새로운 교육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상상해서 세상의 착취로부터 탈출할 수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 과제는 지방을 살리는 것이다. 살 수없는 땅을 떠나서 살 수 있는 땅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이미 느낀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때로 집단으로 모여 그들만의 해방공간을 만들 생각도 있는 것같다. 지방에 생활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지방에서 농촌체험마을 같은 것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귀농이 언제나 실수랄 것은 없지만 안일한 귀농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이 순간에도 내가 모르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사람들이 대안적 삶의 철학과 가치가 뭔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필요하다.
이런 방면들에서 진전이 있으면 새로운 삶을 택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새로운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망이 건설될 것이다. 그러면 몇몇 사람들이 앞서서 주류질서와 싸우다가 그들이 잘못되면 판이 확 뒤집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돼야 한국은 온전히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의 집단적 선택은 우리에게 계속 매우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망이 되지 못하고 각자 서있기 때문이고 사람을 키우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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