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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평등과 화합

by 격암(강국진) 2015. 10. 23.

평등과 화합이란 말은 자유라는 말과 함께 현대사회에서 엄청 자주 듣는 말이고 누구나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만큼 내적으로는 포기되어지고 비웃음을 사는 말들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특히 이걸 어디서 어떤 입장에서 논해야 할지를 망각한 것같다.  


우선 어디서 혼란이 일어나는가를 살피고 거기서 망각된 것이 뭔지를 살펴보자. 


구호는 살리자면서 실제로는 죽이는 행동을 하고 구호는 자유이면서 실제로는 독재를 옹호하고 남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동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런데 평등이란 말도 그렇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뱅이가 세금을 똑같이 내는 것이 평등이라고 하면 이 평등은 좋은 것인가? 모든 것이 그렇지만 남녀평등이라는 것에도 여러가지 얼굴이 있다. 어떤 때는 여성해방 혹은 남녀평등이란 남자가 여자와 자고서, 심지어 임신을 시키고서 책임감을 느낄 필요없으며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부자인 경우에도 데이트 비용을 똑같이 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해방은 좋은 것인가?


누구나 화합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나는 구걸을 하는 것도 동정을 받겠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정당한 내 몫을 원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당한 내 몫이라는 말도 역시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내 정당한 몫을 달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제 파이나누기에 대한 싸움의 시작을 의미한다. 왜냐면 어떤 개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질문은 그 대답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거나 그런 가정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물론 객관적으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차에 있어서 엔진의 몫은 크고 타이어를 고정하는 볼트의 몫은 작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볼트가 빠져나가서 바퀴가 빠지면 자동차가 앞으로 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 진지하게 물어보자. 근거는 뭘까? 이렇게 되면 결국 노동시간이 가치의 근원이라는 노동가치론이나 시장에서의 공급과 수요가 노동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논쟁으로 우리는 쉽사리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것을 떠올리고 있지 않아도 그저 나라는 개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단어를 던지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시장은 환상이며 노동가치론도 환상이다. 한계가 있다.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노동가치론은 굉장히 인간중심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무가치하다는 착각을 만들어 내기 쉽다. 지구 자원의 낭비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당신의 몫? 당신은 비둘기의 몫이나 참치의 몫, 지구의 몫은 얼마나 생각하는가? 무슨 기준으로 당신의 정당한 몫이 나오나. 자동차라는 상품은 부품으로 이뤄져서 자동차라는 고립계를 이룬다. 삶이란 절대 고립계로 이뤄지는 법이 없다. 현대차의 이득은 현대차 경영진과 노동자의 것인가? 정말 그런가?


결국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구걸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들은 서로를 볼 필요가 있다. 말 이전에 말이다.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구걸이니 투쟁이니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위장이나 발이 뇌에게 에너지를 구걸하거나 투쟁하나? 


이런 발상을 가로막는 원인은 개인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서구문화적 전통에도 일부 있고 부자들에 대한 불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자에 대한 불신에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초적 인생관을 제외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공감도 없다는 것에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은 너그럽고 합리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화합이 깨어지는 것은 대개 다른 사람 탓이다. 그러는 가운데 모두가 모두와 투쟁하게 된다. 그것은 당연한게 아니라 지옥이다. 


남녀는 평등해지는게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각자의 정당한 몫을 챙겨야 하는게 아니라 소비자나 환경과도 서로 연결된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정당한 내 몫이라는 주장의 한계를 기억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진다. 


나는 정당한 내 몫을 요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런 노력도 필요하다. 인간은 법과 관습에 의존해서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게 이거고 저게 저거라고 구분해둘 필요가 있다. 다만 어떤 주장이라도 그렇듯 그 구분의 옳음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주장에 너무 빠지면 인간을, 상대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사기꾼 대통령이 나타나도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지만 이 말만은 옳은 것으로 인정하자같은 말이 나온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말은 옳거나 그를 수 없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만이 그렇다. 이상한 문맥에서는 달이 떡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시비를 논하는 것은 대화의 당사자들이 서로 소통이 가능할때나 가능하다. 


FTA를 하자라던가 올림픽을 하자라는 것에 객관적 답이 있지는 않다. 여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게 성추행인가 아닌가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다. 그걸 물리적 행동으로만 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면 현실에서는 도움이 전혀 안된다. 아이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 학대인지 교육인지도 사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잘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똑같은 말과 똑같은 약속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이 하면 결과가 다르다. 뭘 안한다고 해서 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는 많다. 그러니까 말을 보는게 아니라 인간을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렇게 보면 문제의 원흉은 서로를 보는 것을 잊은 것, 그리고 각자가 시야가 좁은 것이다. 평등이니 자유같은 단어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고 그 답에 있어서 공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정신병자들, 시야가 좁쌀만한 사람들이 모여서는 행복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길게 평등이니 자유니 화합을 외쳐도 소용없다. 다들 자기 손가락 피나는 것만 알지 남이 칼에 찔려죽는 것은 전혀 모를 테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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