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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문화적 소수파인 당신을 위하여

by 격암(강국진) 2014. 10. 28.

아내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문화적 소수파다. 만약 우리가 한국에 들어가 산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남편은 틀렸다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나를 지지해 줘야 한다. 문화적 소수파는 잘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주변사람들의 다수결투표를 잣대로 해서 우리 집의 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문화적 소수파란 주변인 즉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같은 사람도 어느 쪽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는 가 하면 다른 문화집단하고는 영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가족과는 잘 어울리지만 회사사람과는 그렇지 않다던가 그 반대인 경우도 많은 것이다. 따라서 주변인이란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문화란 소수파란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인간이고 나쁘게 말하면 왕따요 외톨이다. 주변인으로 살아간다는것은 주변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당연히 거기에는 그에 대응하는 정도의 불편함과 어색함이 있다. 그러므로 많은 주변인은 자신이 주변인으로 머무르는 것에 못마땅해하고 슬퍼하지만 때로는 어떻게 해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한다. 반면에 겉으로는 그걸 싫어하지만 깊은 속내에서는 주변인에서 벗어나는 것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코가 꿰이기 싫은 것이다. 


문화적 소수파는 어떤 측면에서는 어눌하고 느리고 무능하다. 말하자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한국어 사용자나 마찬가지로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그로서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거나 화를 내는 것에 대해서 때로 이게 그럴정도의 일인가 하고 의문을 가진다. 그러다보니 반응이 좀 늦어지는 일이 많다. 그래서 주눅이 들고 그래서 때로 멍청하다던가 둔하다던가 하는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어쩌다 가끔은 소수파와 다수파 관계가 전복되는 일이 있기는 하다. 즉 문화적 혁신이 일어나서 문화적 소수파가 영웅처럼 존경받게 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적 소수파로 산다는 것은 대개 당신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 소수파로 산다는 것은 그런 걸 기대하기를 그친다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 소수파는 주류문화가 좋아하지 않는다. 주류문화가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보면 그것은 마치 서서히 거대한 그물을 조이면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생각나게 한다. 주류문화는 사람들의 코를 서서히 꿴다. 그래서 한번 코가 꿰이면, 그물이 닫혀지면 원하지 않아도 주류문화를 탈출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당신이 보험도 없이 어떻게 사는가에서 결혼할때 이 정도 집은 융자받아서 사야한다, 이 정도 사교육은 누구나한다 같은 몇몇개의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면 어느새 당신은 가계부채의 늪에 빠져서 일을 줄일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있을 지 모른다. 사채를 쓰거나 몸에 이상이 있는데도 무리를 하다가 왕창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신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수억원짜리 집에 자랑할 만한 고급차를 빚까지 내서 샀지만 그걸 즐길 시간은 거의 없을지 모른다. 당신은 혹시나 싶어서 복권처럼 사놓은 주식의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다. 당신은 대박만 나면 그래서 이 함정에서만 빠져나가면 다시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은 나는 언제나 여기를 떠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그런 행위가 당신을 더욱 더 깊은 함정으로 내몬다. 그냥 소비를 줄이고 저금했으면 빚 다갚았을 사람이 빚만 잔뜩 늘어나는 것이다. 완전히 빈손이 되거나 함정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져야 후회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재태크 문화에 대해서 예를 들긴 했지만 친구를 사귀고 어떤 패거리에 가입하고 신세를 지고 하는 일도, 직업이나 학문에서의 야심에 있어서 생기는 일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코가 꿰인다. 그리고 문화적 소수파가 되기를 그친다. 길을 따라 걸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원래 걷던 길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리고 어느새 남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는 건 원래 이렇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보다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문화적 소수파는 힘들고 외롭고 어렵다. 하지만 좋은 것도 많다. 나는 주로 부모님 방문을 위해서 매해 한두번씩 한국에 간다. 당연히 대부분의 한국 셀러리맨과 일정이 조금은 다른 나는 비수기의 시절에 여행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때 보면 한국이 얼마나 쏠림현상이 심한가에 혀를 찰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움직이고 다양성이 없으니까휴가철이 되면 어딘가 인기있는 곳은 마치 만원버스안처럼 북적인다. 사람이 북적이는게 활기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대개 휴가가 전투가 되기 일수다. 


그런데 비수기에 한국을 여행해 보면 사람이 또 그렇게 없다. 커다란 리조트 건물에 사람도 별로 없고 실내수영장을 마치 개인임대한 것처럼 쓸 때도 있으며 가격은 성수기 가격의 반도 안되는 경우도 많다. 문화적 소수자는 외롭고 힘들 때도 있지만 사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누리는 즐거움도 있다. 여행만 그런게 아니다. 남들과 다르게 사니까 아무래도 좀 더 희소성이 있는 경험이 생기기 쉽다. 남들이 다 가봐서 떠들어 대는 길은 재미가 없지 않은가. 문화적 소수자는 다른 사람이 안 해본 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쉽고 싸게 새로운 것을 즐긴다. 특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 그물에 잡혀서 코가 꿰어있는 것같은, 다양성 부족한 한국에서는 말이다. 


당신이 문화적 소수자라면 기억해 둬야 할 것이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불편해하고 심지어 분노하는 것까지도 이해해 줘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소수파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느 공직사회는 능력이 아니라 엄격히 연공서열로 월급을 받고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란 문화적 소수파가 나타나서 모든 것은 사실은 능력위주로 평가받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더 많은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자. 그렇게 세상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자. 


아니면 그 반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느 회사는 엄격히 실력위주로 평가하고 대우하는 사회다. 그런데 평가라는게 아무래도 단기적이 될 수 밖에 없고 평가를 하는 사람, 평가의 규칙을 정하는 사람에게 너무 큰 권력을 주기 쉽다. 수평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수직적으로는 더 불평등해지기 쉬운 것이다. 또한 평가라는 것은 눈에 보이게 기여하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게 기여하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겉만 번지르르한 자기 선전에 능한 사람만 양산하기 쉽다. 회사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비문명적 잔인함만 넘치는 곳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 곳에서 당신이 공동체를 말하고 평생 고용이 보장되는 직장, 연장자를 우대하는 문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주변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뜻과 논리를 잘 이해못하며, 당신을 도둑처럼 생각하기 쉽다. 기존의 시스템의 규칙에 맞춰서 척척 행동하는 사람들에 비해 당신은 거의 언제나 엉거주춤한 상태고, 뭔가를 불평하고 있거나 반응이 느리거나 뭔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반대 의견을 내는 귀찮은 인간이다. 좋은 분위기를 깨는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주변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이 불편하고 당신에 대해 분노하게 되기 까지 한다. 


이럴 때 주변인이 취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해 세상에서는 종종 두가지를 추천한다. 하나는 자기의 소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행동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세상이니 다른 사람에 대해 좀더 배려 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조언들은 틀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다. 문화적 격차라는 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사소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화적 격차라는 것은 같은 가치관안에서 선택을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쪽의 문화적 관점, 이쪽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저쪽의 가치나 느낌이 제대로 느껴지질 않는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간의 만남이란 종종 불교도와 기독교도와의 만남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섯불리 그저 당당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실은 무식한 짓이 되기 쉽다. 상대에 대해, 자신에 대해 뭘 이해했다고 그저 당당하란 말인가? 그것은 마치 이건 내 의견이야, 나는 당당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가서 목탁을 두드리거나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는 행위가 되기 쉬운 것이다. 당당하기만 하면 그런 행동이 옳은 것일까? 


그저 다른 사람과 융화하라는 것은 더 나쁘다. 그 말은 실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불교도에게 너도 다른 사람과 융화해서 교회다니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면서 살아라. 그게 옳은거야. 세상 혼자사는게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게 혹은 그 반대로 말하는게 과연 합리적인 조언이 될수 있을까?


그래서 주변인에게 주어지는 두가지 조언은 대개 실패한다. 그런 조언들을 쉽게 주는 사람들은 실은 주변인의 입장이란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문화적 주류의 사람들이다. 문제의 원인은 그저 당신이 소심하다거나 당신이 남들과 어울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너도 정신차리고 빨리 주류문화에 참여해라라고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변인은 뭘 해야 하는가? 주변인이 할수 있는 것은 두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떤 곤란은 실은 우리의 시야가 좁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뉴욕이 서울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를 가지고 싸우는 일은 지구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는다. 상대방이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뭘 말하건 그것은 계속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되고 만다. 융합이란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두사람이 서로의 입장을 더 넓은 세계에서 바라볼수 있을때 가능해진다. 


실은 우리는 대부분 이런 경험을 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때 누굴 미워하고 싸우고 한적이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주변의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때로는 어떤 사람이 너무 밉다. 그 사람이 왜 아무 이유없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지 이해할수가 없다.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좁아서 서로의 입장이란 걸 같이 놓고 볼 처지가 못된다. 나이가 좀 더 들어서 그때 일을 다시 보면 그때는 절박했지만 다 그럴수도 있었던 걸 왜 절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고, 언짢은 행동을 해도 성자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조건 참으라는 것과는 다르다. 당장은 살아야 하니까. 무조건 양보하기만 할 수는 없다. 싸움을 피할 수 없고 분노표출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우린 유한한 인간이니까. 내 공간을 지켜야 하니까. 그러나 결국 그 싸움의 궁극적 해소는 세계를 넓히는 것, 그런 분쟁의 진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면 이룩될 수 없다. 나의 관점이 폭넓어 질수록 문화적 소수자에게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이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문화적 소수자이면서도 아무도 그가 문화적 소수자인지 모르게도 살수 있다. 잘 싸워 이기는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애초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곳으로만 다니게 살수 있다. 


문화적 소수파가 해야 하는 두번째는 거리를 둔 대화를 하는 것이다. 대화는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거리감각이 중요하다. 너무 멀면 대화가 안되지만 너무 가까우면 나는 이렇게 산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행위가 상대방에게 위협이 된다. 유명한 어린왕자와 여우가 사귀는 이야기처럼 하는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영원히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다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생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 그저 너무 멀지 않게 너무 가깝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내가 맞다던가 당신이 틀리다던가 이야기하는 것 말하자면 문화적 전도를 할 필요는 거의 없다.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느낀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잘난체 했지만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나와 저사람중 어느쪽이 더 잘살았던건지에 대해 그렇게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로군 하고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준다고 믿었지만 힘들때 전화해줬던 것은 결국 언제나 저사람이로군 하고 말이다. 


다행이 운이 좋아서 당신이 하고 있는 문화적 게임이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고 그 합리성을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어서 당신에게 좀 더 가까운 거리를 허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삶은 조금은 더 편안하고 안전한 것이 될 것이다. 덜 외로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의 공부와 생각이 부족하여 당신이 따르려고 하는 그 소수파적 문화가 실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이거나 아니면 당신은 그저 재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친구한명 구하지 못하고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문화적 소수파로 산다는 것은 언젠가는 다수파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나는 그저 한번 뿐인 인생을 후회가 남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애초에 주류문화가 내 맘에 들었다면 소수파였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소수파로 산다. 그것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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