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세상의 서로 다른 문화권들은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또 시대적으로도 서로 다른 여러가지 답들이 말해져 왔다. 우리가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 인간관은 우리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어떤 인간관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으며 어떤 인간관이 바람직한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관들
과학의 시대이며 서구적 관념이 세계를 지배하는 오늘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두가지 직관들이 아닌가 한다. 그것들은 하나는 플라톤적 인간관이고 또하나는 진화론적 인간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적 인간관의 핵심은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이상적 인간형인 이데아적 인간의 표현으로서 결국 표면적인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같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우리가 노예제도를 혁파하고 휴머니즘을 외치고 인간평등을 외치게 되는 이유의 근원에는 바로 이 플라톤적 인간관이라는 직관이 있다. 노예건 주인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가난하건 부자이건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는 혹은 저들은 인간이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으로서의 같은 본질이 있고 실은 중요한 것은 그 공통의 본질이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플라톤적 인간관은 바울에 의해 기독교에 흡수되어 신앞에 평등한 형제자매로서의 인간관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평등한 인간의 사회라는 이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플라톤적 직관에서 그 기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걸 플라톤적 직관이라고 부르건 부르지 않건 인간이란 개념속에서 보편적 인간성을 찾고 그에 기반하여 인간은 평등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플라톤적 직관이다.
진화론적 인간관의 핵심은 지금의 인간은 진화과정의 결과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부정할 수 없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생명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진화하고 그중에 살아남은 것들이 지금의 생태계, 지금의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이 진화론적 인간관이다. 근대이후의 과학적 발전에 따라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힘을 발휘하게 된 진화론적인간관은 자유주의를 만들고, 시장주의를 만들었다.
이러한 인간관들을 직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은 모두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우리를 사로잡지만 실은 독단론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그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더 나쁜 것은 두개의 직관은 사실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다른 종류의 행동규범을 만들어 내는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어느 한쪽을 믿거나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의 독단을 당연한 것으로 선언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인간평등을 받아들이는 사람조차도 그 경계가 무한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투표권에 있어서 나이제한을 두는가. 왜 1살짜리 아기나 갓 수정된 수정란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한당하는가. 사실 10살먹은 아이보다 정신적으로 미숙해 보이는 70살 노인이나 청장년은 세상에 많다. 예를 들어 범죄자들이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과연 절대진리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아직도 국경따위를 가지고 있는가. 모든 인간을 하나의 사회에서 평등하게 대우해야 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지만 플라톤시대에는 노예제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즉 플라톤조차 인간평등을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훗날 인간평등으로 귀결되게 된 어떤 관념을 출발시켰을 뿐이다. 그 관점은 차차 세상이 변해가면서 더 많은 장벽을 허물었고 종국적으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평등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바로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구호나 그와 비슷한 구호아래 말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인간평등에 대한 예외를 만든다. 문제는 그런 예외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의 기반이 독단이기 때문에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종종 부정할 수 없는 위선을 만들어 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것은 다른 종류의 직관 즉 진화론적 직관을 믿는 시장주의자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쟁이 진보를 가져온다는 말을 듣는가. 가장 반시장적인 사람조차도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그들은 시장에서의 진화론적 직관에 반대하면서 관념이나 사상에 있어서의 진화론적 직관에는 찬성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면에 고민이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반대론 따위는 그런 고민이 없어보이는 만큼 무작위한 개인적 믿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주사파를 자처하다가 한순간 변절하여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의 예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반성없는 독단에 근거한 정의는 종종 한순간에 전혀 다른 반대편으로 변절하곤 한다.
경쟁이나 시장법칙따위가 드밀어 지는 곳에서 인간평등이란 개념은 무참히 깨어진다. 사람이 정말 푼돈때문에 몰살당하는 상황이 발발해도 그것은 자연의 법칙과 같은 피할수 없는 법칙의 결과이며 오히려 세계를 진보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직관이며 누구보다 멜서스의 인구론에 의해서 일찌기 잘 보여진적이 있다.
그러나 자유시장의 이념은 허구이며 인간세상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장 즉 인위적인 개입이 없었던 시장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명백하다. 사람들은 인간평등, 인간존엄, 국가공동체의 이득등의 개념을 자기 맘대로 세워서는 자기가 보호하고 싶은 것은 보호하고 그렇지 않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냉정했다. 가장 냉혹한 시장주의자도 자기 집에 돌아가 가족을 돌볼때는 시장의법칙이니 적자생존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가장 재능없고 게으른 자기 자식이 다른 집 자식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해주고 싶어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이해하여 살아남은 것이 더 좋은것, 더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옳은 것이 아니다. 전혀 근거가 없다. 암세포도 건강한 세포와 싸워 이긴다. 그 결과 종국에는 개체 전체를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말이다. 자연선택을 강한자 혹은 더 뛰어난자가 살아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회적 승자의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그것은 뛰어난자를 살아남은자로 정의한다음에 살아남은자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으로 동의어 반복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의미가 없다.
플라톤적 인간관도 인간평등이라는 이상의 근원이라고 해서 그것이 비극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평등이라는 이념은 이 세상의 크고 작은 전통적 공동체를 파괴해온 이유중의 하나다. 가족윤리가 파괴되고 지역사회의 질서가 파괴되고 국가적 규모로 문화가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전통적 공동체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공동체들이 무너진 것에는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는 주거와 교육 그리고 기본적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틀이 되어왔는데 그런 것들이 무너짐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더욱 노예적 수준으로 전락한 면도 있는 것이다. 식민지의 역사가 그걸 잘 보여준다. 또 우리는 중세의 농노를 불쌍한 노예로 생각하고 조선시대의 머슴을 불쌍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는 틀리지 않은 면도 있지만 만약 타임머쉰이 있어서 그들이 현대로 온다면 현대사회에서 회사에 매여 노동하는 사람들, 가난에 몰려 힘들게 살고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해 할 가능성도 있다. 현대인이 그렇게 된데에는 그들이 파편화 원자화된 것에 적어도 부분적 이유가 있다. 보편적 평균적 비교는 별로 의미가 없다. 개개의 경우에서 더 좋은 것이 어느 쪽인지는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규모 공동체 운동이나 협동조합, 공유경제들을 통해 공동체를 복원하려고 하는 시도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개의 인간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개의 매우 호소력있는 직관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로 이 두개의 서로 상반되는 직관을 자기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서로 섞어놓은 것을 가르켜 중용적 관점이나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부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근원적 진보를 이루고자 한다면 꼭 진전을 봐야 하는 것에는 과연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바로 진보하기 위한 인간론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정리가 없다면 사람들은 또다시 위의 두개의 인간론을자기 마음속에 담아두고 '원래 그렇다'라는 식의 안일한 발상으로 토론아닌 토론을 벌이게 될뿐으로 결국 진보한 사회를 만들기위한 연합은 생기지 못하는 것이다. 독단론적인 수많은 벽들이 너무나 많은 파벌을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권리, 동물의 권리, 외국인의 권리, 노인의 권리, 학생의 권리, 선생의 권리, 사업가의 권리, 공무원의 권리, 소비자의 권리등 수없는 권리에 대해 사람들은 절대의 벽을 세우고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론적 수준에서 진보를 위한 가장 근원적 진전은 앞의 두개와는 다르면서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수 있는 새로운 직관을 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다 야심찬 것으로는 더 상위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그런 인간론이 자연스레 도출되게 하는 것을 상상할수 있지만 결국 그것도 다시 호소력있는 직관 혹은 새로운 출발점을 세운다는 문제가 된다.
우리는 오늘날 서구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강대한 과학의 힘을 목격하고 있으므로 비서구권의 인간관은 그 설득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지만 앞에서 말한 인간에 대한 직관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들과 다른 제3의 인간관을 거론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적 인간관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인간이 축생 즉 벌레나 동물로 태어난다고 말해진다. 이러한 설명은 물론 과학과는 이질적인 것이지만 그러한 설명속에는 인간과 동물, 인간과 환경과의 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화론적인 인간관도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앞의 두개의 인간관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불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평등이 아니라 만물의 평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는 각각 인간은 주로 무의식과 경제적 수단에 의해서 조정당하고 만들어 지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의 문제, 경제적 수단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이 만족스러운 삶을 가지게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런 예는 인간관이 어떤 행동을 낳게 하는가를 보여주고 현대인들의 잘못된 행동의 근원은 우리의 인간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를 욕망하는 인간관을 찾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관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한정된 삶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이 가장 매력이 있다. 이러한 것을 성장론적 인간관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것은 인간의 본질은 세상과 삶을 즐기고 탐험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체험하고 느끼는데서 행복을 느낀다. 어떤 것도 그것이 습관이 되고 반복이 되어 지루해지면 그것은 감옥이 되고 죽음을 주는 환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찌기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이란 책에서 인간은 교육의 3단계를 반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쓴 소개의 글 : http://blog.daum.net/irepublic/7888300) . 그것은 로맨스의 단계, 세밀화의 단계 그리고 일반화의 단계인데 이 단계들은 우리가 어떤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일반적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다시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해 지루해 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단 그렇게 되고나면 우리는 또 지루해진 일상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찾아서 기존의 삶을 경계를 넘고 3가지의 단계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사랑이나 즐거움이라는 것은 전부가 아니면 대개 신비감이라는 것과 공존하기 마련이다. 신비감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모르기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인간은, 특히 식물인간같은 인간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가진 행복한 의식있는 인간은 단순히소비할 수있는 에너지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에서 청년 중년 그리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런 신비감, 신선함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위해 인간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하고 그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여행은 큰 산업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 제약조건이나 사회적 관습의 경직화나 강압적 권력때문에 불가능해 질 때 인간정신은 괴로워하고 인간은 불행해진다. 인간은 항상 희망과 어느 정도의 새로움을 계속 느낄 때만이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한정된 삶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앞서 말한 플라톤적 그리고 진화론적 인간관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게 있어서 플라톤적 인간관에 불만인 점은 인간을 완성된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적이다. 인간은 그냥 그 자체로 인간이다. 즉 우리는 변화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에 누구나 필요한 자원분배문제뿐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모두가 아니면 대다수를 사육당하는 돼지처럼 만든다. 즉 우리는 그저 평등한 돼지인 것이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언뜻 그렇지 않은 것같지만 사실은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우리는 통상 환경은 대개 외적으로 그냥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그대로 일때 그 안에서 최적화된 존재는 궁극적으로 진화를 멈추고 고정된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그래서 인간을 동물의 맨위에 놓을 뿐 인간이 초인간으로 진화해 갈것이며 지금의 인간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쓰이는 일은 별로 없다. 즉 주어진 환경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이미 인간으로서 도출된 상태다. 물질적 축적과 진보가 발전과새로움의 착각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진보라는 측면으로 시야는 어느새 제한되곤 한다.
게다가 진화론적 인간관은 수동적이다. 즉 우리의 선택이라는 개념이 잘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그저 어떤 닫힌 계안에서 무작위적인 운동의 결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같다. 그래서 사실 진화적 인간관도 현실적으로는 인간을 그저 먹는 돼지로 고정화 시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취향에 따른 선택과 성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맞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선택하고 하나의 작은 세계에서 더 큰 세계로 도약한다. 가장 어리석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가수가 되거나프로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함으로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즉 입시생의 세계에서 그는 패배자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모색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성장론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현인간사회가 가지는 문제는 한마디로 재미없다는 것이다. 현 인간사회는 인간을 고정시키고 뭐하나 재미있고 흥미있는 것이 없게 만들고 따라서 불행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태어나자 마자엘리트코스로 가는 좁은 길위에 올려지는데 이때문에 삶은 아주 일찍 부터 예측가능한 길만을 달린다. 그것은우리를 불행한 노예나 의식없는 식물인간이 되게 만드는 길이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노인이 된다. 우리는 한마디로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배부른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장론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세상은 서로의 발전을 돕고 세상, 따라서 인간사회를 흥미있고 신비감있는 곳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조건의 개발도 의미하지만 그 이상으로 개개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체험의 한계를 높여서 삶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간다는 의미도 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이 그대로라도 당신이 기타연주를 하고 춤을 추고 소설을 쓸 수 있는 세상과 그렇지 못한 경우의 세상은 다르게 체험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 가진 기억과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체험된다.
성장론적인 인간관은 모든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그 시작부터 인정한다. 모두가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사회의 중요한 측면은 그런 여러가지 성장단계에 있는 사람들, 여러가지로 다른 체험으로 다르게 성장한 인간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이런 성장론적 인간관은 참으로 깊게 망각되어져 있다.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 말하는 일이 많으며 교육도 취업이라는 주제에 관련되어서만 말해진다. 교육의 일차목표가 자아실현과 인간적 성장이라는 말은 얼마나 깊게 망각되어진 말인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목표는 당연히 부자되는 것이다. 부자=행복한 사람이라는 등식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은 있어도 그걸 꺼집어 낼 분위기가 아니다. 그럼 너는 돈이 싫다는 말이냐 이 위선자라는 말이 날아올 것같다. 심지어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대부분이 어떻게 물질적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같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부족한 것은 오직 물질이다라는 가정이 머리속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왜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을 돕는 것같은 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답은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가 누군가를 문화적으로 소외시킨다는 자각도 별로 없다. 이런 저런 마을만들기나 협동조합이나 소규모공동체 운동을 조직하지만 거기에도 뜻과 가치는 실종되고 더 많이 먹고 소비하는 미래를 위한 연합이 되버리고 마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즐겁게 살고 신선함을 느끼며 살고 싶다. 이 세상이, 좀 더 작게 말하면 한국 사회가 더 신나고 재미있는 곳이 되어 주었으면 싶다. 따분하고 대화도 안되는 사람들은 언론이나 권력에서 좀 물러났으면 좋겠다. 정서가 메말라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따위는 잃어버린 사람들은 구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은 나의 의견일 뿐이다. 인간이란 뭘하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답을 선택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누군가가 우리대신에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맞춰 살게 될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간관에 대한 고민이 잊혀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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