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8
세상이 시끄럽다. 결국 사람들이 이유야 뭐건 이리 저리 생각이 달라 싸움이 나고 미움이 생긴다. 다 같이 잘살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쉽지 않다? 그럼 묻게 된다. 그럼 왜 어려울까. 누구나 잘살고 싶어하지 않은가?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 잘살자고 하지 않고 어울려 잘살아 보자고 생각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는 일이 왜 어려울까.
잘산다는게 뭔데?
다 같이 잘산다는 것이 어려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잘산다는게 뭔지를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X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같다라고 말하다가 그런데 X가 뭔데라고 따져보면 누군가는 그게 안철수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게 문재인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게 박근혜라고 말하는 식이다. 모두가 X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같다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생각이 딴판이다.
사람이야 그렇지만 잘사는거야 다를게 있나. 평화롭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재미있고 화목하고 그런게 좋은거지라고 쉽게 말하지만 우리는 잘산다는게 뭔지 모른다. 적어도 영 딴판의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모여서 우리 잘살아 봅시다라고 해도 누군가는 자전거 바퀴 만들고 누군가는 자동차 엔진 만드는 식이니 조립이 안된다. 각자 자기의 몫만 한없이 크다고 하면 거래가 안된다.
이런 점들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잘사는게 뭔지를 모른다거나 잘사는 것에 대해 생각이 서로 다르다라는 점을 새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기위해서는 비전의 공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공부가 필요하다. 상식이란걸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어도 어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동의가 필요하다.
헌법을 줄줄이 외우는 사람은 없지만 헌법은 모든 법의 상위법으로 헌법에 의하면 이게 맞아라는 식이면 법리논쟁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자라는 말을 제외하면 더 할말이 없다. 상식이나 문화적 가치도 그런 것이다. 어떤 특정한 한 사람, 어떤 천재만 아는 진리나 답이 아니라 모두가 그건 당연하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지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있으니까 우리의 대화가 서로에게 말이 되기 시작한다. 농구경기를 하는 방식은 여러가지지만 우리가 농구를 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흔들리면 놀이가 말이 안된다. 다들 농구라고 생각해서 발로 안차고 총으로 안 쏘는데 누군가가 막대기로 치고 검으로 찌른다면 농구가 성립될 리가 없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말 한국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이 무슨 게임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농구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야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나서 서로 반칙을 논해봐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 스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스타는 시스템이 만들어 낸 최종 생산물일 뿐이다. 시스템이 발굴하고 선전해서 그 스타를 통해 영향력을 키운다. 역사에도 사회에도 상징적 인물은 등장한다. 그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능력이 그런 상징을 만들어 내면 사회적 스타는 어떤 종류의 가치와 상식을 사회에 심는다. 그래서 구세주가 아니라 안티구세주가 나타나면 그 한사람만 문제가 되는게 아니다. 안티구세주는 그 사회의 상식구조를 심각하게 유린한다. 스타는 양날의 검이다. 모든 비약은 추락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짜 스타를 만들어 낼수 있는 문화적 정신적 저력과 풍토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래 이건 맞아, 이건 멋져라고 공감대를 일으키는 공진이 필요하다. 그 공진의 핵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 어떤 스타, 어떤 천재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프로야구 관람객이 없는데 프로야구 스타선수가 존재할 수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라는 바다가 없으면 그 바다를 헤엄칠 어떤 존재는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그들이 스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인 우리는 모두 물어야 한다. 잘산다는게 뭔데하고 말이다. 우리의 지적인 게으름이, 우리가 인생에 대해 안이하고 게으르다는 사실이 우리의 아픔을 만들어 낸다. 너무 쉽게 뭐야 그런 건 다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그런 태도가 결국은 아픔을 만들어 낸다. 행동이 전혀 다른데 알기는 뭘 안다는 말인가.
자기 붕괴의 시대
우리는 뭔가를 믿지 못하는 시대, 역사를 읽지 않고 거기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시대, 탈 정체성의 시대, 자기 붕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봐서 어떤 커다란 진전이 이뤄지기 전에 존재하는 혼돈의 시대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몰락과 파괴의 시대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로 설명할수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큰 것은 아마도 인간이 지구를 채웠다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신대륙도 없고 야만족이 사는 세상도 없다. 세상은 모두 자본주의화되고 미국화되고 서구화 되었다. 이제 끝없는 확장을 통해 행복한 미래를 성취한다는 꿈은 설득력을 잃는다.
미국자동차회사가 잘나가면 한국 자동차 회사가 망한다. 사우디가 기름팔아서 부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굶는다. 세상에 문명적으로 뒤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팔면 그들도 좋고 우리도 좋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한때 귀족과 왕족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어리석고 무력한 백성들을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은 끔찍한 세상을 살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돌봐주고 그들이 우리를 먹여살리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뭐 이런 논리다. 이런 주장은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옳기 위해서는 백성은 무력하고 무지하며 귀족과 왕족은 그 반대여야 한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인쇄술같은 것이 나와서 지식이 보편화되자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사실이 아니게 된다. 결국 귀족과 왕족의 사치는 무의미하며 그들의 독재와 독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비합리적인 결정을 만들어 비극을 만들어 낸다.
한때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겨우 옥수수죽이나 먹고 사는 후진국에게 문명을 가르쳐줄테니 선진국에게 그 지식을 비싼 값으로 사다 배우라는 것이다. 21세기의 세계는 민주화 바람, 자스민 혁명으로 가득하다. 인터넷과 무선통신으로 가득한 세계는 이미 선진국이 잘난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중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하버드나 MIT에 환상을 가진다. 캠브리지나 옥스퍼드에 대한 환상처럼 말이다. 시대는 변해 간다.
시대는 변해가는데 새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이 새로운 왕이 되는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않았다. 다만 과거의 삶의 방식이 잘 동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봉착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 붕괴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뭔가를 믿지 못하고 따라서 가치의 기준도 약하다. 가족이 파괴되고 지역사회가 파괴되고 국가도 파괴되고 민족도 파괴된다. 그에 따른 여러가지 가치도 파괴된다. 파괴란 더 좋은 것을 위한 비약을 위한 것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일어나는 일은 그저 어린애같은 이기주의를 여러가지 지식으로 포장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는 것, 즉 반달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교사의 의미가 파괴되고 학교의 의미가 파괴될 때 교육과 학문의 의미도 파괴된다. 국가 기관의 의미가 파괴될 때 국가도 파괴될수 있다. 지금 사람들이 국정원 정치조작사건에 항의하고 있는데 특정 정치인의 특정 사조직이 국민을 상대로 정치조작에 끼어든게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정원, 수없이 많은 공무원들이 일하는 국정원이 그럴수 있다는 것은 국가의 파괴행위다. 이건 쿠데타라고 여겨져야 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국정원 조직원 전체가 나라를 배신한 것이다. 이미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도 크게 올라 있다. 국회에 대한 불신도 크게 올라 있다. 그런데도 물론 그 모든 행위에 대해 이런 저런 교묘한 말들은 얼마든지 만들어 질수 있고 그것에 대해 그럴수도 있는거 아닌가 하고 우리중의 상당수는 쉽게 생각한다. 그게 바로 반달리즘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살인은 왜 그리 분노할 일이고, 전쟁은 왜 그리 분노할 일이겠는가. 국가 재산 다 팔아다가 내 배좀 불리는 일이 왜 나쁜 일이겠는가.
세상은 혼돈에 빠져 있고 사람들은 자기붕괴를 겪는다. 자기가 누군지 점점 더 알수 없게 되어 간다. 이러니 다 같이 잘살기가 쉬울리가 없다.
맺는 말
시대에는 끝이 없다. 즉 우리는 절대 문제없고 변화없는 역사의 최종적 상태에 도달하게 되지 않는다. 그런 때가 온다면 그것은 인류의 멸종일것이다. 역사의 종언 운운하는 글이 세상을 흔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수 있을 뿐이다. 지금 시대는 우리가 탐욕을 줄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가난해도 행복할수 있다. 우리가 큰 문제를 겪는 것은 오직 우리가 더이상 뭘해야 할지 모를 때이다. 온세상의 돈이란 돈은 다가지고 있어도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의욕도 안 생기며 이런 저런 이유로 그걸 맘대로 쓸 수도 없다면 우리는 우울해 질 뿐이다.
확장과 성장으로 더 큰 물질적 부를 성취하는 길, 그렇게 해서 행복을 보장받는 길이 한계를 보인다면 남은 길은 자기 자신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반드시 물질을 포기하거나 즐거움을 포기하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르네상스라는 것도 결국 기독교적 신의 교리속에서 사는 것이 한계를 보이게 되자 이제 우리는 자기 눈으로 직접보자는 자기찾기의 길이었다.
그런데 그 자기찾기의 길은 객관화라는 길에서 길을 벗어나 폭주한다. 그래서 과학은 자기가 없고 가치가 없는 학문이 되었다. 과학과 예술의 상호 보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애초에 둘이 아닌걸 둘로 나눠놓았을 때 둘은 서로를 파괴하기 마련이다. 통섭이란 그런 단순한 합일 수 없다. 때문에 양쪽 극단에서 이리로 저리로 왔다 갔다 하거나 한쪽극으로 뛰어가는 어떤 것도 종국에는 허무해질 수 밖에 없다. 미친듯이 학원교육에 매달리다가 갑자기 산중에 있는 조용한 학교에서 대안교육을 찾아 헤매는 그 양극단을 왔다갔다하거나 둘중의 어느 하나에 매달리거나 하는 것이 모두 허무하듯이 말이다.
좋은 교육은 다른 것도 그러하듯이 바깥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내가 느끼고 아이가 느끼는 것만큼이 행해 질수 있는 교육이다. 아이는 보지 않고 교육시스템만 보고 있어서 뭐가 될것인가. 아이는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아이들과 대화하는 또 다른 나로 존재 할수 있을 뿐이다.
교육만 그럴까 다 함께 살아가는 삶도 그렇다.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은 살피지 않고 아파트나 아스팔트로 깨끗히 해놓은 청계천 같은 구조물을 만들면 사람이 행복해 질거라는 생각은 한계가 있다.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논의하고 뜻을 모으는 지역사회가 창출되어야 한다. 사람은 그전에 자기가 자신을 봐야 한다. 뭐가 행복한 것인지, 뭐가 필요한 것인지. 자기가 없으면 답도 없다.
내가 상실되어져 있는 세상, 나를 찾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세상은 행복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바깥쪽은 황무지로 생각하면서 확장만 거듭하던 과거의 문명패러다임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같이 살아야 한다. 나와 남의 행복과 불행이 깨끗이 구별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예쁜 꽃나무 아래서 맛있는 술안주 한접시면 행복할 사람들이 BMW니 10억짜리 아파트니 하면서 뛰어다니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 피흘리게 하고, 손자가 그린 그림, 다른 사람들의 노래소리를 즐기지 못하면서 세계적인 가수의 공연을 보겠다고 아둥바둥하는 그런 식으로는 함께 잘살 수가 없다. 결국 누군가를 타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나 가져올 것이다.
수익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만들면서 한국소비자를 홀대하던 현대자동차는 어떤가. 삼성은 어떤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나라, 그런 나라만이 부유함을 유지할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종국에는 모두가 가난해 질것이다. 물론 그보다 먼저 지금 보다 불행해질 것이다. 확장과 성장만을 외치던 것을 그만두고 자기를 찾는 길로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할 이유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아니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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