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1
우리 앞에 있는 시대는 통합, 공동체, 인문학, 생명, 유지가능한 삶을 요구한다. 세계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군부독재이래 더욱 악화된 한국의 정서는 누군가 힘쎈 사람이 선을 죽죽 그으면 온국민이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독은 단순히 독재의 지지자에게만 있는게 아니라 심지어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사람, 진보적 인사들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은 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진정한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한계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거기서 핵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포용의 문제다. 즉 여러가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아프게 하고 죽이지 않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진전을 보일 때 우리 사회의 여러 대립들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즘 문제가 커지는 다문화사회의 문제는 물론 통일의 문제에 까지 영향을 주게 될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사회가 문화적인 변혁을 겪지 않는한 우리는 내부적인 문제로 소모되어 결코 더 좋은 세상에서 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거꾸로 주저앉아 버릴지 모른다. 지금 대기업들이 자영업자들을 실업자로 만드는 그 현상도 결국 포용과 공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건 착한 사람이 되자는게 아니다.
나는 이런 글을 여러번 약간씩 다른 각도에서 써왔는데 거의 매번 이건 착한 사람이 되자는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시작한다. '포용력있는 사람이 되자고? 아 그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남이 나와 다른걸 인정하자는 말이로군.' 이라는 말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함정이다.
너그럽다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건 함정이다. 이것은 자연을 '보호'하자 라던가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자'나 '돕자' 같은 말이 종종 만들어 내는 함정인데 여기에는 자연과 우리가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기본인식, 혹은 장애인은 애초에 몸이 다 멀쩡한 나보다 열등한 사람이라는 기본인식이 깔려 있다. 이 말들은 우리가 자기의 왼쪽 손가락을 보호하자라고 말할때와 다르다. 손가락은 '나'의 일부다. 손가락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우리가 자연을 가꾼다면 그것은 적선을 하는 것과 다르다. 자연은 자연과 내가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인식이 있을 때 저절로 '보호'된다. 자기가 자기손가락 죽이는 사람은 없으니까. 잘생긴 사람들이 못생긴 사람들을 가르켜 우리 못생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자고 하면 나같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섭섭하거나 화가 날 것이다. 외모가 뭔데 잘생긴 사람과 내가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그들이 못생긴 사람들을 뭔가 부족한 존재인것 처럼 말한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눈이나 팔다리 한두개가 뭔데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가. 나는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가. 신체장애인은 나와 다르며 기본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식은 그 자체가 차별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되자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내가 정의고 선인데 봐주자, 용서해 주자같은 인식이 깔려 있다. 여자에게 너그러운 남자같은 표현을 생각해 보라. 이것도 여성차별적인 인식이다. 여자는 너그러움과 보호의 대상이라는 인식이다. 옛말에도 충이 없으니 충을 이야기하고 효가 없으니 효를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는 나는 지금 너그럽게 행동하고 있다같은 발상자체가 없다. 포용력, 통합을 위한 문화적 개혁이란 바로 이러한 사고 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문화, 관점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우리 너그럽고 착한 사람이 되자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게 하나도 없다.
두 남자가 있다. 둘 다 한미FTA를 찬성한다. 그 둘은 그래도 산과 바다처럼 차이가 있다는 말에 누군가 말을 한다. 무슨 소리야 다 찬성론자잖아. 다 똑같지. 차이가 없어. 답답한 일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이 세상에는 똑같은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같은 사람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모든 것이 다를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방에서 내 아내에게 나는 가슴 큰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대학강단에서 여대생들을 앞에 놓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의 의미도 또 다르다.
모든 것이 다르다라는 말은 종종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쓰이기도 하기때문에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다. 또한 모든 것이 다르다라는 말은 과학주의, 이성적 사고, 논리등의 기초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유없는 반항을 한다. 사실 문명의 시작은 1이라는 숫자의 시작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문제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사과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 같은 사과도 시간이 지나면 마르거나 부패해서 달라진다. 그런데 어떻게 시장에서 사과하나만 사다줘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그건 마치 해상도가 너무나 엄청나서 화면에 그림을 띄우기 조차 어려운 그림을 해상도를 1억분의 1정도로 내려서 처리하는 것과 같다. 파일 사이즈는 작아지고 처리가 쉽다. 1이라는 숫자가 있기에 2가 있고 10이 있으며 따라서 세금도 내라고 할 수 있고 상업거래도 가능하다. 파라오나 진시황이 모두 도량형을 통일하는 정책을 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문명을 가능하게 한다. 논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수학의 근본은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종종 말도 안되는 엉터리 분석을 하면서 그걸 합리화한다. 1억3천만의 일본사람들을 일본인이라는 이름하나로 엮고 5천만의 한국사람들은 한국인 이라는 이름하나로 엮는다. 그리고 한국인은 이렇고 일본인은 이렇고 하는 말을 하는데 물론 우리는 이러한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자체의 한계다. 문제는 그 한계와 문제성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고하는 것이다. 어떤 한계에서 이 세상에 일본인은 없고 한국인도 없다. 그러나 말의 노예가 된 사람은 단단한 실체로서의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단어에 매달려서 한계없이 사고를 하고 극단적이 되고 단순한 사고를 한다. 그 경계만 너무 뚜렷히 보는 것이다. 넌 일본인이구나 그럼 이렇잖아. 맞잖아. 아닌가? 너는 FTA 찬성론자구나 그럼 이렇잖아. 너는 저사람과 똑같잖아. 아닌가? 너는 무상급식을 주장하는구나. 그럼 김정일 숭배하는 빨갱이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그렇잖아. 아닌가?
지적으로 훈련이 덜된 사람들은 조잡한 해상도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세상에 대해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있다. 그건 문제다. 그러나 흔히 깨닫지 못하는 문제는 좀더 지적으로 훈련되어 책 많이 읽은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세상에 대한 모델도 무식한 사람의 모델보다 좀더 복잡하다는 것일뿐 진짜 세계의 복잡함과 다양성과 비교하면 단순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이다. 진짜 지식인은 자신의 한계를 항상 인식하면서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예측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몇권읽고 지식이 좀 생긴 사람은 흔히 무식한 사람보다 훨씬 더 쉽게 오만해 지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당신은 노동자입니다. 당신은 빨갱이입니다. 뭐 다 똑같은 것이다. 한계에 대한 고민없이 즉 자신이 아는 것이 틀렸다라는 것을 알지 않고 그것을 쓰는 사람은 운전할줄 모르고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틀렸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유용하다. 공산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공산주의는 유용하고 자본주의가 헛소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자본주의는 유용하다. 남과 이야기하다가 당신은 도대체 사회주의가 뭔지 압니까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책상위에서 만들어 진것을 현실자체와 동일시하는 지적인 노예다.
우리를 구원하는 두가지.
이 세상에 하나도 같은게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론과 논리적 사고를 멈추게 한다. 이상태에서 멈춘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관습도 상식도 없는 세상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도구로서의 이성과 논리란 좋은 거라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과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논리와 개념을 쓸 때 이 세상의 모든 멋진 문명이 다시 살아난다. 돈과 숫자가 있으니까 해외여행도 쉽게 하고 달에도 가는 문명이 다시 살아난다. 모든 걸 파괴한 다음에 다시 모든 걸 되살리는 것은 의미없는 일 같지만 이번에 되살릴 때는 한가지를 더 가지고 세상을 되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건 그저 잠정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쓰고 필요할 때만 쓰는게 도구다. 왜냐면 도구는 수단일뿐 도구자체가 목적과 의미를 가진게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나 수학이나 과학은 가치와 상관없다. 마치 살인의 도구인 칼이 살인죄를 저지르는게 아닌것처럼. 이것은 이성과 논리가 모두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구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도구이기는 하다. 문명이라는 도구, 사회적 관습이며 언어는 엄청난 고층빌딩이나 거대한 도시처럼 오랜동안 만들어 진것이다. 그것은 한사람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기간동안에 만들어 진 것이므로 가볍게 던져버리거나 수정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쭉 쓰던 한국어 공동체가 어느날 오늘부터 영어로 살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될 리가 없다. 그건 마치 매일같이 이 집은 싫어라고 하면서 집을 부시고 다시 짓자고 하는 것처럼 무모하다. 그 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해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차차 수정해가며 사는 방법밖에는 없는것이다.
두번째는 우리는 단순하고 의식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느끼는 능력, 감수성이고 영감이다. 우리에게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와 답이 있다. 논리만 있는 세계인것 같은 수학도 이런 점을 인정한다. 즉 수학적 진리란 무엇인가 혹은 애초에 어떤 수학적 문제의 답을 우리는 어떻게 찾아내는가 같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 보면 결국 수학문제 풀기조차 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종종 이르게 되는것이다. 거기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안에서 하나의 답을 찾아제시하는 영감이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결국 이런 감수성에 영감에 의존하면서 산다. 보다 '현명'하게 산다면서 논리와 지식에 의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절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논리와 지식에 의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명한 판단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때로는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논리와 지식은 우리에게 세상의 어떤 한 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능력을 가진 대신 이 세상의 어떤 면은 잊어버리게 한다. 그 둘은 항상 붙어다닌다. 따라서 잊어버린 뭔가때문에, 그렇게 해서 무뎌진 감수성때문에, 우린 큰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로 돌아가기
이 이야기들은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너에게 돌아가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유명한 종교인이자 정치가인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의 진리실험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인도를 해방시킨 인도민중의 아버지로, 누가봐도 자신의 몸바깥의 일에 신경을 쓴 정치가이지만 그가 자서전에서 거듭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은 그의 내부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의 관습, 영국의 식민지라는 인도의 현실등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내버려두지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이 뭘까를 물었다. 그는 평생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면서 결정하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사회적인 인간인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인간으로 세상을 산것이다. 항상 '도구'를 쓰면서 이것이 꼭 써야하는 도구인가를 고민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만약 누가 간디를 존경하다고 하면서 간디의 겉모습을 흉내낸다면 그것은 간디의 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될것이다. 간디의 길이란 감수성의 길이다. 간디는 심지어 종교적 이유로도 인도를 쪼개기 원하지 않는다. 간디는 영국과 싸웠지만 동시에 영국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은 영국을 미워하자는게 아니라 인도민중이 자동차의 부품같은 존재가 아니라 영국인 이상의 문명인이고 감정이 있고 신념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스스로 질서를지키고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해서 인도인은 스스로를 다스릴수 없다는 영국인의 평가를 무너뜨린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서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판단이란 결국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을 결정하는 것이고 보다 가치있는 일이 뭔가를 결정하는것이다. 대학졸업장이나 삼성에 입사해서 직원이 되거나 고시에 합격하거나 10억을 모으거나 교수가 되거나 하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만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몸뚱아리를 가졌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가치란 없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느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란 주관적이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려는 노력이 결국 자신의 감수성에 대해 고민하는 노력이다. 한국사회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우리의 귀와 눈을 멀게한 것은 없는가. 그것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한국 사회가 만든 인력생산공장에서 나오는 로보트가 되기 쉽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관념에 따라 제조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은 좋지 않다.
사람들간의 거리
나는 이 글을 시대의 요구는 통합과 포용력이라고 지적하면서 시작했다. 그러한 것을 이룩하는 실천적인 요령들을 몇가지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가 첫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간의 관계를 거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저사람이 좋다와 싫다라던가 저사람은 나와 친구다 아니다같은 인식을 피하는 것이 좋다. 좋다와 싫다, 친구다와 아니다, 옳다와 그르다는 모두 이분법적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의 포용력을 제한한다. 거리는 연속적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싫건 좋건 관련이 있고 공존한다. 여전히 편의상 나는 저사람이 싫다 반대한다같은 표현을 쓰게되는 일이 있겠지만은 보다 바람직한 것은 저사람은 내게서 멀다와 가깝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관계의 단절이 없다. 어떤 사람을 참 좋아했는데 그 사람의 어떤 한가지 면을 보니까 그게 너무 싫다. 이럴때 우리는 종종 고민한다. 이러면 이 사람은 누구와 똑같은게 아닌가. 노무현은 결국 이명박 아닌가. 주진우는 결국 강용석이었단 말인가.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배신감이 느껴진다. 결국 부자간이나 모자간의 인연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사고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하나된 동지가 아니면 남남이라는 식의 이분법이 있다. 우리는 결국 그 거리가 아무리 짧을지라도 모두 서로에게 거리를 가지고 각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되자라는 구호가 제아무리 감동스러워도 그것은 더 가까워지자는 이야기지 진정으로 하나가 될수는 없다.
현대는 복잡하다. 변화도 빠르다.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적과 아군을 가르는 식으로 사고한다면 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 결국 모든 인간에게 실망하고 은둔자가 되거나 스스로 위선적이라고 느끼면서 세상에 염증을 느낄 뿐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걸 반복하면서 그걸 제대로 소화할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결국 세상놈은 다 나쁜놈이니 나도 나쁜놈이 되자는 것을 합리화하는 길로 가기 쉽다. 그냥 한발 멀어지고 한발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적이 없고 남이 없다.
둘째로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평등한 인간관계는 한가지 질문을 요구한다. 우리가 남을 어떻게 부르고 대접할 때 우리는 그 인간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국은 유달리 사람들을 직위로 부르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조기축구회 회장을 해도 회장한번은 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회장님이라고 불릴테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 회장이라는 뜻이다. 즉 직업이나 직위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률적으로 부정하거나 찬성하기 전에 그런 호칭이 현실을 반영하는가 현실을 왜곡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과 같은 회사라는 말을 쓰는 일이 있다. 정말 요즘 회사가 가족같은가? 일못하면 쫒아내는게 가족일 수는 없다. 예전에 집성촌으로 한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친척이고 아는 사람일때 친오빠나 친동생이 아니더라도 오빠 형 동생하면서 지내는 것은 지금보다 현실적일지 모른다. 지금 한국 사회가 그런가.
한국의 호칭문화는 한국인의 삶을 왜곡한다. 삶이 왜곡된다는 것은 서로 공동체로 느끼는 정도 이상으로 혹은 이하로 서로에 대한 호칭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농구하자고 하고 축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힘센 놈이 축구하다가 손을 쓰면서 이건 농구잖아하고 변명하게 되고 반면에 힘없는 놈은 그럴수가 없다. 결국 착취하는 사회, 불공정한 사회다. 회사에서 가족에 이르기까지 여러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한다. 이런 저런 사회적 관계를 빌미로 누군가가 죽도록 일하고 이용당하는 일은 많다. 예를 들어 명절에 음식준비하는 것은 종종 여자다. 그런데 요즘 남자들은 경제적 이유로 맞벌이를 선호한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결국 서로에 대한 인식의 결정인 호칭이 현실에 존재하는 공동체, 사회관계를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착취가 일어나는 것이다.
회사에서 계급부르듯 깍듯이 항상 직급을 가지고 호칭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회사가 사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공동체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완전히 객관적으로 능력평가해서 그걸로 월급주고 승진시키는 비지니스의 관계라면 사장이던 말단이던 결국 다 일해주고 돈받는 관계다. 그런데 왜 누가 누구에게 존대를 하고 어려워해야 할까. 현실은 물론 그 양극단중의 하나는 아닐것이다. 그러나 호칭문화가 과연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호칭을 바꾸기 싫다면 현실적 관계를 호칭에 맞춰야 할것이다. 그 부조화가 결국 약자에 대한 착취가 되고 사회적 악이 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진보적 인사를 자처하면서 동료끼리 서로 형동생 하고 지내기 좋아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판사라면 내 형이나 동생이나 부모님을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나는 공평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강력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아이가 내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아들의 과오에 대한 도덕적 책임도 공유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모두 형동생 하면서 지내면서 그 책임을 지지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진보세력이 강력하게 비판하는 기득권이 독과점하는 사회, 재벌가문이 한국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제과점에서 그 아들에게 빵을 공짜로 주거나 싸게 판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관계니까. 그게 사회적으로 확대되면 내부거래고 불법세습이다. 재벌4세들 사장만들기다. 아는 동생이라고 모르는 사람보다 기회한번 더 주고 다른 기회에 다른일로 도움받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담합이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잘나가는 유력자들이 서로 얼굴 맞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서 서로 형동생하고 지내면 세상에 힘없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갈 기회가 있겠는가. 형동생하면서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 관계라면 그런 관계의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 사회적 책임에 무감각하면서 우리 사회를 개혁해 보자고 하는건 앞뒤가 맞질 않는다.
맺는말
세상어디나 그러긴 하지만 정치판에서는 특히 세상에 선을 죽죽 그어서 악을 멸하고 선을 이룩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싸움으로는 좋은 세상을 만들수가 없다. 여자에 대해 음란한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럼 모두가 일어나서 음란한 남자들을 무찌르는 정당을 만들고 그런 남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서 새로운 세상이 올까? 법으로 정도가 심한 사람들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변화는 오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의 가치를 섹시한 매력을 풍기는 것을 기준으로 보게 만드는 세상의 가치판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문방송에서 날이면 날마다 S라인이 어떠하네, 누구는 여신이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그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는 남자들을 단속하는것에 집중하는것이 원천적 해법이 될리가 없다. 그럼 신문이나 방송을 단속해야 할까? 그것도 물론 해야 하는 것이지만 원천적인 것은 아니다. 결국 욕망은 그대로 두고 계속 그것을 단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욕망은 그대로 있으면서 참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갈수 있을까. 어떤 괴상한 새로운 방법, 새로운 핑계가 또 나타나서 욕망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여성이라는 한 사람의 가치를 다르게 볼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는 문화가 제시되어야 해결된다. 여성의 육체적 매력의 가치를 과장하지 않는 문화가 필요하다.
나는 현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가치인 정치개혁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종 진보는 대안이 없다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면 진보는 물론 대안이 있으며, 김대중 노무현 시절이 더 좋지 않았는가같은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 말에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이며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반정부의 전선형성에 매달리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음에 정권이 바뀌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싸워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정권은 스스로 무너진 것이지 반정부 동맹이 잘해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 선악나누기 전선형성은 다음 정권의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을 흐리게 만든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보다 기본적인 것이다. 바로 상식과 문화와 합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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