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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죽음과 인간다운 삶

by 격암(강국진) 2011. 6. 30.

11.6.30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거치는 기간동안 한국에는 노동운동이 거칠게 일어났었다. 그 바람이 일어난 것은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 사건에 힘입은바 크다. 전태일평전을 읽어보면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이후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수있는 권리를 달라면서 정말 목숨을 걸고 항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죽거나 자살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의 주목을 끌고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을 시도했다. 

 

인간다운 삶이 뭘까. 그 답은 길고 추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태일의 평전을 읽으며 우리는 인간답지 않은 삶의 한모습을 보게 된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고 상처주고 구걸하고 훔치고 도망치는 세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고 이미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그런 삶이다. 어머니는 자식때문에 울고 자식은 어머니때문에 우는, 형은 동생때문에 울고 동생은 형때문에 우는 그런 삶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거기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끼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기적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알몸으로 거리에 내던져지고 땅 위에 버린 쓰레기라도 없어서 못먹을 정도로 극한의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에 대한 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래도 나는 아직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자존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사랑은 단순히 형제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아프게 살아가는 다른 노동자들,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마음으로까지 번져간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전태일의 이야기, 노동자에 대한 인간적 처우를 호소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가장 인간같지 않은 삶을 말해주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인간다운 삶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40년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우리 사회가 좋아지기만 한것은 아니다. 잘 살던 사람이 복권을 맞아도 자살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반드시 물질적 풍요로움의 총량이 발전을 의미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40년전에 한국사람들은 극악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던 많은 한국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이후 우리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 길이 평탄하고 쉽기만 하지는 않았지만 아뭏튼 길은 확실히 보였던 것이다.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그 길이었다. 

 

그렇게 도달한 21세기의 한국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있지만 어이없게도 세계최고의 자살율과 세계 최저의 출생율을 보이는 나라가되었다. 40년전의 사람들은 적이 너무나 강대해 보일지라도 무엇과 싸워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많은 한국사람들은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도 느끼지 못하는 것같다. 물론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이 사람, 저 회사를 가르키며 저 들이 없어지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그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그다지 설득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무섭다는 이야기다. 하루하루가 고통이라는 이야기다. 도저히 인간답게 살수 없다는 이야기다. 맥없이 자살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세상에 존재하는 괴물은 40년전의 괴물보다 더욱 강대해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더욱 쉽게 희망을 포기한다. 

 

그 괴물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여기저기에 있다. 얼마전에 홍익대의 청소부할머니들에게 대학당국이 2억8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전에는 어딘가에 있는 아파트에서 인근 임대아파트의 아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벽을 쌓는다는 기사도 난 적이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세습하려고 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전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보다 손에 잡힐듯이 보였다면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시스템속에 있다. 그것은 더 크고 더 미묘하고 더 깊숙하고 더 당연한 것안에 있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라오는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도 잘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삶의 조건을 비판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들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일 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핵심이 빠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대부분 이러저러한 시스템의 개선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물론 훌륭하고 필요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말하자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금단증상에 시달리며 괴로워 하다가 어떻게 하면 값싸게 마약을 살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발생시킨다. 보다 훌륭하다고 주장되는 -그리고 아마도 실재로도 그러할- 시스템은 대개는 더 복잡한 시스템이다. 더 복잡한 제도, 더 복잡한 법률이다. 하지만 그런 개선은 만들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더 복잡한 시스템에 더 잘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한탕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 없는 개인들에게는 더더욱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저항도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안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좌절하고 더 쉽게 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외국의 사례나 공평성을 위한 자료를 늘어놓고, 법이 어떻다는 둥, 이러저러한 법칙에 따라 어쩔 수가 없다는 둥, 이런 저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공평하지 않다는 둥하는 이야기를 제발 좀더 적게 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이성적 진보는 없다. 이성적인게 항상 합리적인것도 아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인간적 감수성에 둔감해진채 논리의 칼날로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사이비 종교를 말하는 목사나 무당이나 점치는 중에게 간다. 이 세상에서 사는게 무서운 수많은 사람들이 길잃은 양이요 불쌍한 중생이다. 머릿속에 노예로 사는 관습법이나 잔뜩 들여놓고 괴로워 하는 것은 논리적인 자칭 진보나 탐욕스런 보수나 미신적인 대중이나 다 마찬가지다. 

 

공자님을 말해도 좋고 예수님을 말해도 좋고 부처님을 말해도 좋다. 본질은 단순한 것이다. 수단은 목표를 위해 임시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뭔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다. 생명은 수단이 아니다. 이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모든 수단인 것을 내려놓고 보았을때 내 마음이 어떤게 잘못되었다고 어떤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걸하는게 옳다. 우리마음안에서 수단인것, 어떤 이데올로기들, 선입견들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가 가지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걸 하는게 옳다. 예를 들어 우리는 행복해 지고 싶다. 그러면 행복해 지는게 옳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것처럼 생각하라는 조언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내일 죽는다는데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하고 있겠는가. 신자유주의가 뭔지, 내년에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인지 좌판지 우판지 그런 걸 생각하겠는가. 완전히 여러가지 관념을 벌거벗고서 정말 내 마음이 원하는건 뭔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현실적으로 우리는 뭐든지 가능한 환상속의 천국은 영원히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지혜롭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이렇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거하는 사람들의 수는 좀 줄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부질없는 싸움, 많은 사람들의 부풀기만하는 행복없는 탐욕은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탐욕으로 물들어 있으면서 시스템 개선만 따지고 다른 사람비난하고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회복되는 것은 망각하는 그런 잘못을 조금은 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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