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2
서양의 근세와 중세를 가르는 기준에 대해 흔히 주체의 발견이란 말을 한다. 세상을 보고 설명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대개 서양근대철학의 설명은 이 주체라는게 뭔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고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나는 어떤 혁명적 변화는 항상 X의 발견이라는 식으로 묘사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혁명전야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한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살만한가. 만약 살만하다면 우리는 혁명전야에 있는게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앞도 뒤도 막혀있는 답이 없는 상황속에서 절박한 상황에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혁명전야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도 답이 아닌데 좌도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가능한, 뻔한 답은 모두 시도해 봤는데 다 소모되고 이젠 해볼게 없는 답답한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혁명전야에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은 하나의 시스템에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비약은 두가지 조건이 최소한 갖춰져야 일어난다. 먼저 이대로는 죽는다는 절박감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 비약을 해낼 용기를 준다. 또하나는 뭔가 모든 걸 다 해봤는데도 안되더라는, 완전히 새로운 것, 뭔가 근본적인 것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확신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는 혁명의 비약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뛴다. 왜냐면 이대로 있어도 죽기 때문이며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진보나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분배와 복지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파들은 분배하다간 죽는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도태시키고 죽어야 전체 시스템이 건강해 진다고 말한다. 물론 좌파는 반대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모든 논의는 핵심이 완전히 망각되어 있다. 길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다. 인사를 하는게 좋을까? 하지만 그 사람이 퉁명스럽게 인상을 찡그리기라도 하면 나만 바보가 될것같다.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이 문제를 단순히 인사를 하는게 좋은지 안하는게 좋은지에 대해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답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핵심이 빠진 것이다. 핵심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국가정책도 그렇다. 거기에는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꼭 필요하다. 그 부분을 빼고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고, 다시 말해 우리 선택,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떤 의미로 모든 주장은 모두 옳고 모두 틀리다. 왜냐면 옳고그른게 우리맘이니까 그렇다.
어떤 부동산 정책을 편다고 하자. 누가 이렇게 하면 이런저런 부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마치 인간이란 하늘로 던져진 돌멩이 처럼 어떤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당연히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규제만 있어도 부동산 투기는 안 일어난다는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법칙을 이해하는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 자유의지의 문제일까.
왕조시대를 살면서 스스로를 충성스런 왕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공화국의 시민으로 생각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므로 우리는 쉽사리 인간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오만한 생각은 하나도 맞질 않는다. 현대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현대 과학과 수학의 모든 분석기법을 동원해도 인간사회의 행동이 예측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는데 섯부른 몇개의 관념적 분석으로 인간은 이러저러하니 이게 옳다는둥 저게 옳다는둥 하는게 얼마나 턱없는 것인가.
그러므로 결국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이거다.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X의 발견으로 돌아간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고? 그럼 이렇게 물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앞에서 잠깐이라도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 변화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의 세계가 부서지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정체성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그걸 많이 겪는 시기가 사춘기지만 20대에도 중년에도 말년에도 사람들은 그것들을 겪는다. 그렇다면 변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중에 누가 진짜 나인가? 젊은 시절의 내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믿었다면 그 믿음은 옳은가 틀린가? 내일을 모르면서 확신에 차있었던 나는 무지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나는 내가 누구인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한국이란 건 우리가 끝없이 재발견 해내는 것이다. 좌파가 옳은지 우파가 옳은지 골치아프게 떠들지만 결국 이도저도 시끄럽기만 하고 답이 되는 것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란게 뭔지 확실히 발견하는 순간 한국 사회에는 혁명이 온다. 여러가지 다른 설명을 붙일 수는 있지만 일제 침략동안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면 한국은 독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지금의 경제적 수준을 달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관념적 분석으로 만들어 진게 아니다. 행동과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 집안이 풍지박살이 날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조선이란 것에 목숨과 재산과 가까운 가족의 안위를 걸었던 그 선택들이 모여서 조선을 재발견하고 지켜 온 것이다. 민주한국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포기했었다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정착시키며 이만큼의 경제적 번성을 이뤄낼 사회적 투명성도 달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한국을 발견해 냈기 때문에 한국은 이만큼이라도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오늘날의 한국은 벼랑끝의 상황에 있다. 전세계 최고 자살률에 최저 출산율이란 현실이 보여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지 못하고 외롭다. 그래서 그들은 이세상을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 대선만 잘해내면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김대중 노무현의 10년을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좋은 대통령만 잘뽑고 이런 저런 정책을 제대로 실시하면 좋은 세상이 올거야라고.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통일도 이뤄내지 못했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으며 부동산 투기도 막지 못했고 세상이 삭막해 지는걸 막지도 못했다. 그 모든 것은 다 김대중 노무현이 부족해서 즉 대통령의 문제였다고 하고 싶다면 그럼 어디가서 그렇게 대단한 리더를 당장 데려와 보기 바란다.
나는 몇년전부터 대한민국의 가장 큰 희망은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한국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다. 광장에 모여서 스스로 뒷처리하고 헌금도 해가면서 시위를 축제로 승화시키는 모습이 한국의 미래고 희망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을 발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는 다음번 대통령이 결정하는게 아니다. 야당의 대통합이 결정하는것도 아니다. 한국의 미래는 한국인이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새기는 일, 한국인을 발견하는 작업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매우 둔감해져 있는 것같다. 용산의 참사를 생각해 보라.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개발은 알고보니 사업성이 떨어져서 스스로 취소될 그런 개발이었다. 대학생들이 반값등록금때문에 거리로 나와서 외친다. 미래도 불투명하고 알바에 지쳐있기 때문이다. 몇십조짜리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절차에 의해 결정된 무상급식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서 서울시장은 악다구니를 써댄다.
이런 저런 수치가 등장하고 외국의 사례가 등장하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공동체로서 서로를 아끼고 있는가가 문제다. 예를 들어 등록금문제만 해도 그렇다. 결국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교육을 시키키 마련이다. 등록금을 내리던 장학금을 주던 보수가 좋은 알바자리를 만들어 주든 말이다. 그렇지가 않을 때 젊은 세대는 방치된다. 사람들은 계급투쟁처럼 세대가 모여 자기몫을 주장하면 된다고도 하지만 싸움이 어떻게 최종적 답이 되겠는가. 핑게는 얼마든지 있다. 결국 진짜 답은 애정이다. 애정이 없다면 논리나 투쟁은 아무 쓸데가 없다. 계급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투쟁해서 자기몫을 찾아서 사회가 유지될 리가 있는가. 싸움만 있으면 제 몫만 챙길것이다.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반드시 희소식만은 아니다. 우리는 결국 아 한국 사람이란 이렇게 이기적이고 몰염치하고 남의 아픔에는 아무런 감수성이 없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것이야 말로 조선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완용을 대거 양산해 낼지도 모른다.
다음 대선의 결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어떤 쪽으로 발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명박의 당선을 통해서 한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궁지에 몰린 사람이 자신의 근본부터 따지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은 위기다. 한국을 재발견하고 사회적 융합력을 발휘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완용의 논리에 따라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들이야 그러고나도 부자로 잘살거나 미국이든 유럽이든 떠나서 살면 그만이다. 한국의 공교육이 몰락하고 사회적 혼란이 극대화 되어 손쓸도리가 없어지던 말던 이미 실질적으로 한국은 없다면 선도 악도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작은 테두리를 치고 자신은 다른 한국사람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윤리적 타락이 그 증거다. 한국을 구하겠다고 몸바칠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공공의식은 얼마나 있는가.
혁명은 오는가. 온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은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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