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9
한국에는 생활협동조합들이 여러개 있다. 그중 유명한 것들로 아이쿱생협 ( http://www.icoop.or.kr/ )이 있고 한살림 ( http://www.hansalim.co.kr/ ) 이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말그대로 일종의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학습이나 사교활동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둘러본 홈페이지를 근거해 봤을때 그 주된 활동은 유기농 농산품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조합에 가입하고 조합비를 내고 출자금을 낸후에 유기농 농산품에서 과자, 커피까지 여러가지 상품을 배달받는다. 출자금은 몇만원정도이고 이 돈은 조합을 탈퇴하면 돌려받게 된다. 이런 생협을 요즘 화제가 되는 기업형 슈퍼마켓 (SSM)이나 대형 쇼핑몰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대중의 인식도가 낮고 서비스경쟁에 있어서도 이길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들게 한다.
적어도 일부의 사람들은 기계대신 생명으로 라는 식의 구호에 낭만적 이해를 하고 생협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는 것같다. 그러나 낭만적 이해란 고물차에 페인트 칠 잘해놓으면 아주 좋다며 물건을 구입하는 것같은 식의 행동을 만들어 낼수 있다. 과연 생협이라는 것은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이 뭘까. 어떤 조건이 성공에 필요할까. 이런 문제를 기계와 인간이라는 단어를 써서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스템, 시장의 구조는 모두 기계라는 말로 이야기할수 있다. 기계는 논리적 구조를 말하는 것이며 실제 자동차나 건물같은 물질적 기계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재벌회사나 유통구조같은 모든 구조를 가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본질에는 논리적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구멍가게는 구멍가게라는 기계고 SSM은 SSM이라는 기계로 구멍가게가 자전거 같은 것이라면 SSM은 트럭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크고 더 강력하고 더 복잡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크고 복잡한 기계는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크고 복잡한 기계는 어떤 면으로는 우리를 억압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만 본질적으로 효율성때문에 만들어 진다. 재벌이 만들어 내는 SSM은 전국적 배급망을 개발하고 서비스의 통일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종사하는 노동자들, 생산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혹은 강력하게 구속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크다. 과연 보다 단순한 기계를 원하는 쪽은 그 생산성의 차이를 무시할수 있을까? 남들이 자동차탈 때 계속 걷는 것을 고집할수 있을까? 빽빽하게 시간표짜서 공부시키면 자식의 성적이 올라가는데 그런 비인간적 구속에 반대해서 자식을 자유롭게 해줄 용기가 있을까? 성적은 더 좋을까? 아이는 정말 그런 삶에 만족할까?
단순하게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다. 대기업이 만들어 내는 유통구조의 비인간적인 면을 비판하느라 그 효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변화는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생협이 SSM과 싸워이기겠다면서 더 복잡한 구조를 지향하고 더 경쟁력을 높이느라 최선을 다하면 어느 순간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 효율성증대의 끝에서 생협은 이미 SSM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인터넷이 만들어낸 환경도 생협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생협에게는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마을이 쌀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기농 쌀을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조합의 설립은 필요없다. 어떤 조합이나 법적인 테두리가 없어도 노무현이라는 키워드로 봉하마을은 유기농 사업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 여러가지 절차가 복잡한 기존의 생협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믿을수 있는 유기농 생산자들이 있기만 하다면 인터넷에서 직접주문해서 먹을 수가 있다. 남은 것은 오직 가격경쟁력정도인데 시장의 크기를 보았을때 그것도 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봉하마을의 예는 새로운 대안에서 중요한 점 한가지를 말해주는 것같다. 그것은 소비와 가치의 결합이다. 중요한 것은 신뢰와 내가 하는 소비의 가치다. 봉하마을 쌀을 소비하는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일단 특정한 가치를 내세운 곳이므로 파렴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내가 소비하는 행위가 소비+기부라는 형식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고 먹을 수 있으며 좀 비싸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런 예를 한번 만들어 보자. 심장병질환 복숭아는 어떨까. 이 복숭아 과수원은 심장병질환자를 돕기위해 수익의 반은 치료비로 내놓는다고 설정한 과수원이다. 이런 곳에서 복숭아를 만들면 믿을 수 있을 것같다. 게다가 좀 비싸도 좋은일이니까 불평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게 가치와 소비를 조합한 예이며 이것은 급조한 예이므로 더 좋은 방식이 가능할수 있을 것이다.
기부같은 것은 물론 SSM도 쉽게 복제 할수 있다. 핵심은 SSM을 능가하는 것은 복잡한 기계를 단순히 더 단순한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기계로 대체해 넣는 방식일 때 가능한것 같다는 것이다. 가치를 연결고리로 하는 공동체이다. 실은 기존의 생협이나 한살림이 이런걸 안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대중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 이유는 그 가치의 전파방식이 구체성이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SSM을 극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그것들을 운영하는 주체들이 따라올수 없는 가치, 철학, 생활방식, 문화를 이해하고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식에서 가능하다. SSM은 거대한 기계이므로 변화가 느리고 비싸다. SSM의 사업방식을 능가하는 것을 시도하면 따라올 수가 없다. 맨위의 사령탑의 발상전환이 느리고 그 댓가가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이 철학이 뭐고 이 생활방식이 뭐고 이 문화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다시 핵심으로 남는다. 여러사람들이 이미 그 답은 이거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좀 문제를 느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기계문명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지식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반문명적인 태도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나쁜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더더욱 기계적으로 진보하고 지식집약적인쪽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가. 새로운 문화운동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것인가? 그들은 사이버 공간에 익숙하고 눈을 뜨면 바로 mp3와 핸드폰을 잡고 트위터와 메신저에 익숙한 세대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그건 진보가 아니라고? 숲에 가서 맨발로 걷고 밭에가서 몸을 움직여 일하라고? 그런가? 사이버 공간을 탈출하는 것이 그 가치와 문화가 말하는 것인가? 현실을 보면 네티즌들의 집단행동만이 대기업의 힘에 비견될만한 사회적 반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핸드폰 문자도 못보낼정도로 기계를 멀리한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힘이 있어보이는게 아니다. 진실은 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네트웍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초월한 곳에 있다.
네티즌을 포용하고 그들내부에 질서를 가져올수 있는 -질서를 강제하는게 아니라 공감에 의해 질서를 만들어 내는 - 그런 가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기존의 생협의 메시지와 충돌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 형상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제대로 된 문화운동의 선언문이 될것이고 변화의 시발점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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