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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경쟁 사회에서 잊혀진것

by 격암(강국진) 2012. 8. 31.

12.8.31

어떤 사람이 정치인으로 매력이 있는가. 나는 자기가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심지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의 수없는 악이 어디서 생기는가. 바로 자신의 능력보다 더 위로 올라간 사람들때문에 생긴다. 그냥 동네에서 이웃들과 잘지내면 훌룡할 사람이 구의원이 되고 시의원이 되고 시장이 된다. 이러다 결국 자기 능력이상으로 올라가게되면 악을 행한다. 뭘 하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자리에 있는게 악이다. 이러니 어쩌다가 그나 그녀가 대통령이라도 될 것같으면 악도 이런 악이 없다. 어린애가 제트기 조정하는 것같은 일이 일어난다. 다 죽을 판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에 가깝다. 사람들은 일단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오히려 그런 욕망이 강한 것을 훌룡한 사람이 되는 기본 조건으로까지 평가한다. 집권의지니 야망이니 하면서 말이다. 꿈과 욕망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세상의 목소리는 말한다.  바로 그 출세길의 아귀다툼에서 살아남는 것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람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성공하고 싶으면 경쟁자들을 다 물리쳐라. 누가 성공 안하고 싶은가. 결국 성공이란 경쟁에 이기는 것이다. 이길 수 있는데 이기지 않고 더 올라갈 수 있는데 거기서 멈추는 사람은 바보다.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것이다. 강하다의 의미가 살아남은 자, 더 높이 올라간 자다. 그러므로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 악과 지옥은 필연적으로 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성공은 타인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철학을 믿으면서 모두가 행복해 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믿는다면 그건 자기기만이고 사기다. 누구도 언제나 이길 수는 없으므로 경쟁에 기반한 사회는 사실상 아무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며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매우 소수만 그럴 수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사회다. 

 

허수아비 때리기.

 

뭔가에 반대하는 흔한 방법중의 하나는 바로 허수아비 때리기다. 이것은 어떤 의견이나 주장을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교체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 허수아비를 두들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라고 하면 종북이군요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좋은 예다. 경쟁제일주의가 넘치는 사회는 그런 사회적 흐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일을 종종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들려주는 경쟁론을 워낙 많이 들어서 그와는 다른 어떤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 모든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서로 겸양하는 그런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결국 욕심을 낼거다. 인간이란 욕심없이 살 수 없고 모두가 성인군자로 사는 세상이란 결국 불가능하다라고. 그럼 욕심내는 사람만 행복해 지는것이 아닌가라고. 이런 반대론은 경쟁제일주의론자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허수아비요 가짜다. 경쟁제일시대에 대한 반대란 그런게 아니다. 욕망도 꿈도 없이 다 똑같이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게 아니라 욕망을 직시하는 것이다. 경쟁제일주의자들은 종종 가치를 획일화한다. 삶의 가치란 돈의 양이나 사는 아파트의 평수같은 숫자로 단순화된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감각은 없어지고 쉽게 볼 수 있는 성공과 승리의 상징이 강조되고 좋고 나쁜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가치판단이 단순해 진다. 경쟁이 심각해 지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런 것은 어떤 의미로 사람들을 모두 좁은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거나 자신이 그렇게 코너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삶의 가치판단이 단순해지니까 결국 제로섬 싸움이 된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조화롭게 사는 타협은 있기 힘들어 지고 그저 쟁탈전만 벌어진다. 

 

남이 가지고 싶으면 나도 가지고 싶은게 당연한가? 가치란 객관적인 것이라 남에게 좋은 것이면 나에게도 좋은 것인가? 경쟁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정말 그저 돌부처처럼 욕망도 없고 행복도 느끼지 못하며 남에게 양보만 하는 그런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오히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생각도 안 해보고 남이 줄서서 경쟁하면 무조건 뛰어들어서 거기서 이기려고 아둥바둥거리는 것이다. 이기는 것 자체에 중독된 나머지 왜 이겨야 하는가를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결혼을 하면 자기 마음이전에 나이니 학력이니 재산이니 외모를 먼저 따지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따진다. 옷도 자동차도 사는 집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이전에 남들이 보기에 어떨까를 따지고 아이들교육도 마찬가지다. 모든게 다 경쟁이 되고 그러다보니 마음속에는 행복은 없는데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간다. 마치 내 싸움인지 남의 싸움인지 가리지 않고 싸움만 나면 참전해서 싸우는 미친 사람과 같은 모양이니 그럴수 밖에 없다. 

 

정치인의 예

 

대통령과 정치인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나는 굳이 대통령이 되려고 안달복달인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당신은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 누구나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니까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일까?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승리인가? 

 

만약 당신이 세상에 대한 어떤 이념, 이론이 있어서 뭔가를 실천하고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누군가가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할만한 순수한 동기일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은 당신 혼자만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시대를 앞선 생각을 가진 한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한글도 있기전인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이미 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제를 실시해보겠다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왕이 되면 정말 그 세상을 그렇게 바꿀 수 있겠으며 사람들이 행복해 질까? 그럴수도 없고 사람들도 행복해 하지 않는다. 하나의 비전이 세상을 바꾸는데는 상당한 사람들의 공감대가 필요하고 기술적 사회적 준비가 필요하며 그렇지 못하면 그런 시스템은 굴러가지 않는다. 공감대가 있고 당신이 그것의 상징적 리더로서 일할 필요가 있다면 당신은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욕망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 당신을 그렇게 되라고 밀어댄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은 워낙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라 당신이 제아무리 노력하고 계산해도 당신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당신의 노력이 낭비될뿐만 아니라 수없는 사람이 피만 흘릴 뿐이다. 말타는 일만 알 뿐 자동차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억지로 자동차에 앉혀봐야 사고로 죽기나 할 뿐이다. 이 세상에는 교육이며 부동산이며 어떤 법하나만 만들면 세상이 확바뀔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대선에 이기면 세상이 확 바뀔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독일이나 프랑스시스템을 들여오면 한국사람이 독일이나 프랑스사람이 될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걸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고 때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법은 만들기도 어렵고 법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살기 어려운게 아니다. 세상이 상식적이면 상식적으로 필요한 법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진다. 자리에 대한 욕망은 허망한 것이다. 하나의 자리가 세상을 바꾸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대선이나 법이 안 중요하다고 말하는게 결코 아니다. 결국 사람이, 국민이 중요하고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되도록 노력하는게 더 근본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것이 경제적인 이득이나 권력을 휘둘러보는 즐거움, 남에게 으시대고 싶은 마음 그런 것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것이다. 욕망을 가져서 한심하다는게 아니라 제대로 한다면 대통령이 그런 자리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공짜로 그런 걸 주는 자리가 아니며 요즘에는 더더욱 그렇다. 역대의 대통령중에 퇴임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행복하게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한 일때문에 임기중에는 물론 임기후에도 책임이 추궁된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처럼 재판받고 갇혀지내는 것이 좋은가? 노무현처럼 목숨을 버려서야 지킬 것을 지키는 것이 좋은가? 이승만이며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존경과 돈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건 대통령까지 안해도 얻을 수 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은 수억 수십억 수조 수십조를 은행빚 당겨서 쓰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국민의 주권을 빌려다 자기 힘처럼 쓸 때는 기분 좋을 수 있지만 결국 빚의 정산에 들어가면 빚쟁이에게 쫒기게 되기 쉽다. 빚내서 흥청망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 좋은가. 

 

그러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조르고 졸라야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제발 정치판에 나와서 좋은 정치해주세요라고 조르는 유권자란 제발 제 주권좀 빌려가서 불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사채업자나 마찬가지다. 남의 힘 왕창 빌려다 쓰는 것은 개인적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대개 말도 안되는 판단이고 세상을 바꾼다고 해봐야 이미 내 뜻을 받아들여준 사람이 엄청나게 있어서 그들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이 바뀔 리가 없다. 

 

세상에 있는 정치인들 대부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줄줄 늘어놓는다. 그저 어떻게 잘보여서 표를 얻으려고한다. 도대체 그렇게 이겨서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유권자는 물론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본인이 믿는 경우는 그 삶에서 그게 표시가 날 수 밖에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쉽게 납득이 가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판에는 그저 이기고 봐야겠다는 욕망으로 세월만 보낸 사람이 가득하다. 이겨서 뭐할것인가, 나는 왜 이겨야 하는가에 대해 정말 솔직하게 물어본 사람이 드물어 보인다. 그게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본인도 행복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세상에 악을 행하게 되며 결국은 빚쟁이가 되어 세상의 욕이나 잔뜩 들을 뿐이다. 

 

맺는 말

 

중요한 것은 한가지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데올로기에 중독이 되면 자기가 뭘 믿고 있다는 생각도 없다. 늘상 그런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우리는 뭘 믿고 있다는 생각자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주말에 교회에 가서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 이상으로 매일 매일 서로 다른 입을 통해 왜 경쟁에 승리하는것이 전부인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기반에는 매우 단순화된 가치판단이 있다. 티비를 켜면 이런 거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요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집단적으로 끄덕이게 만드는 방송이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그런 선동이 넘쳐난다. 강남의 몇평아파트라고 하면 모든 아파트가 같은 것이고, 자동차도 그저 이게 1억짜리라고 하면 그저 와 하는 것이다. 어떤 유명 브랜드의 자동차나 옷이나 신발을 가지면 남에게 으쓱댈 수 있다.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1억짜리 오디오 시스템을 가지면 자랑하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 핵심은 내가 즐기는 것,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남자가 개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공의 증표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술먹고 행패부리고, 비싼 술을 먹으며 성추행을 일삼아도 주변 사람들이 불만을 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성공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판에 박은 듯한 사고를 할때 세상은 조화로운 세상이 아니라 그저 쟁투를 벌이는 제로섬의 세상이 된다. 사과와 배와 포도가 넘쳐나는데 모두들 귤만 먹겠다고 박터지게 싸우는 세상이 된다. 그 경쟁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유행을 잘 따라가는 것은 결국 손해나는 개미의 삶을 만들기 쉽다. 남이 어학연수 간다고 하니까 나도 간다. 남이 회사 관두고 치킨집 연다고 하니까 나도 연다. 남이 빚내서 집을 늘린다고 하니까 나도 늘린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다 같이 움직이면 딱 개미들이 죽기 쉬운 판이 된다. 자격증이 남발되면 어렵게 딴 자격증이 소용없어지고 다들 치킨집한다고 하니까 치킨집의 경쟁이 너무 심하다. 생각없이 빚내서 집을 샀더니 그게 멍에가 되어 내 인생을 송두리째 갉아 먹는다. 따지고 보면 다 우 몰려가서 투기하듯 사는 인생이 많아서 그렇다. 자기 박자로 자기 스텝으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걷질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면 온통 코가 꿰어서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고 남좋은 일만 시켜주면서 산다. 소위 블루오션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래서 경쟁도 안한것 같은데 대단한 성공을 때로 이뤄내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징은 남을 이기려고 한게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나는 이 길이 성공하는 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성공하기 전에 어떤 길이 성공의 길인지 미리 알 방법은 없다. 그들은 대개 그냥 그것이 빠져서 눈이 멀었던 것이다. 남들이 그런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하다가 운이 닿으면 선견지명을 가진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 이기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게 아니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삶은 산 사람은 객관적으로 결과가 어떻든 실패한게 아니다. 

 

학원에 다녀야만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학원에 안다니고 서울대 간사람이 증거로 제시되면 저 사람은 원래 타고난 천재거나 아주 특이한 예외라고 그걸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고 싶은 증거만 보는 것이다. 경쟁에 대해 세상도 그런 일을 한다. 사람이 다 그렇지. 이것과 다르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하는 위선자야라고 말하면서 경쟁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위선자로 부르는 것을 시도하다가 그게 잘 안되면 저사람들은 성인군자고 타고나길 천재처럼 다르게 타고난 사람이야라고 세상은 말한다. 

 

정말 그런가? 이건 그냥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있는것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자신이 여왕이나 왕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가정부나 거지같이 사는 사람 굉장히 많다. 경쟁 경쟁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잊혀져 있다. 그리고 눈을 뜨지 않으면 세상은 계속 그렇게 될것이다. 앞으로 벌고 앞에서 아끼지만 어딘가 뒤로 뭔가가 엄청나게 줄줄 새는 것같은 세상말이다. 경쟁에 기반한 사회에서 뭐가 잊혀진 것일까. 그건 물론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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