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혁명을 위한 철학을 찾아서

by 격암(강국진) 2014. 1. 20.

자본주의의 종말이니 세계 경제의 붕괴니 하는 말이 나돌고 있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자리를 맴돌면서 사회적 에너지를 소진해 가기만 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더 좋은 세상이 오려면 어떤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 세상을 바꿔줄 철학이 있을 까. 그래서 과연 혁명을 위한 철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는 인문학 강좌에 참가하거나 철학책을 다시 펼쳐들고 그 안에서 어떤 답이 있는가를 다시 고민해 본다. 이런 광경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있을 법한 일이고 그 몇몇 사람들이 다 모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될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강연장을, 한국을 찾은 유명한 외국인 철학자의 강연장에서 힐링을 위한 기업가나 스님, 목사의 강연장, 경제 전망을 위한 경제학자의 강연장을 채운다. 책을 사고 머리를 싸맨다. 


나는 직업이 과학자라서 그런지 혁명이라고 하면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튼 등에 의해서 진행된 과학혁명이 생각난다. 우리는 지금도 과학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없이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과학혁명이라는게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 혁명을 위한 철학을 찾는다는 애초의 질문은 묘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질문의 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질문자체가 잘못되어져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안쪽으로부터의 시각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때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즉 혁명이 일어나는 시대나 장소의 바깥쪽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 혁명의 안쪽에서 혁명을 바라볼때 우리는 종종 우리가 뭔가를 착각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서양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시대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 신학의 시대였다. 이제 우리가 그 과학혁명이라는 것 이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신학을 축소하고 과학으로 세상을 혁명하자고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신학의 시대에는 신학은 학문의 한가지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학문이다. 즉 합리적인 사고 자체가 신학이다. 당신이 열심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당신이 찾게 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더 바람직한 신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성리학의 풍토안에서 세상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은 유학을 하지 않고 과학을 하는게 아니라 더 훌룡한 유학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문화의 안에 있을 때 더 잘해보겠다라는 그 가치의 판단기준자체가 그 문화이기 때문에 더 잘해보겠다는 사고 자체가 기존의 문화를 강화시키고 오히려 혁명을 일어나기 어렵게만 만든다. 


그렇다면 과학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매우 이상한 인간들이 간단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짓을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들은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관찰하고 확인하고 그 안에서 법칙을 찾아내자고 한 것이다. '우리의 눈' 즉 '개인'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 바로 개인의 탄생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분류하는 대신에 측정을 한다. 측정한 것에 대해 왜를 묻기 보다 그것을 잘 기술하는 수학적 법칙을 찾는다. 이것은 이유를 정확히 아는 합리적인 판단끝에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약이다. 남에게 댈수 있는 길다란 근거없이 그냥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시작당시에는 세상을 다 바꾸자 같은 거대한 것이었을 리가 없다. 


신이 그림에서 사라지고 개인이 등장한다.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고리타분한 신화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지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의 일상이나 스파게티를 삶는 법에 대해 시시콜콜 적는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중세사람들이 읽는다면 작가가 도대체 뭘하자는 것인지, 이런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한 개인의 일상과 마음의 변화따위-을 계속 읽어야 할 의미를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혁명은 잘 정돈되고 거대한 논리적 사슬을 가진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단순하고 그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행동하는데서 온다. 이유는 잘 몰라도 그 행동이 유행하고 그것이 쓸모있음이 경험에서 증명되고 그것이 널리 퍼지고 나면, 즉 혁명이 이미 일어날데로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논리적 순서대로 정리해서 바라보게 될뿐이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보자. 그리고 철학자들의 논쟁 장소로 한번 가보자. 예를 들어 최근 홍준기와 이택광은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그 글중의 하나가 홍준기가 쓴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라는 글이다.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 


그 내용이 뭐가 되었던지 간에 우리는 더 훌룡한 철학을 찾아보겠다는 이 논쟁에서 한가지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복잡하고 어려우며 동시에 애매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는 다시 또하나의 단어와 연결되어지고 끝도 없이 이어나가는 식이다. 예를 들어 지젝은 라캉을 오독했고 진정한 레닌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에 대해 평가하려면 우리는 진정한 라캉을 알아야 하고 진정한 레닌주의를 알아야 할 것이다. 라캉의 뒤에는 프로이드가 있고 레닌의 뒤에는 물론 마르크스가 있다. 


이런 난맥속을 헤쳐나가는 것은 훌룡한 일이지만 물리학도인 나에게 있어 그 모습은 마치 과학혁명이 필요한 시대에 더 정교한 신학을 만들어 보겠다고 신학이론들을 열심히 정교하게 만드는 신학자가 떠오른다. 그렇다. 이 비교를 보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혁명을 위한 철학을 찾는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의 정의를 바꾸거나 철학으로 부터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 것같다. 타도해야 할 것이 철학인 것같아 보인다. 혁명을 위한 철학을 찾는 행위가 혁명과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실 인기가 갈리는 모양이지만 몇년전에 죽은 철학자, 리처드 로티같은 사람은 우리가 익숙한 분석철학은 그것이 목표로하는 것을 절대 이룰수 없으며 철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철학자이고 그가 쓰는 용어는 철학용어이므로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또다시 철학적 이야기가 되고 말것이다.


혁명의 결과, 혁명의 원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을 과학혁명의 결과로 생각하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의 결과와 원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애초에 인간이 그렇다. 인간은 얼마나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존재인가. 약간 여담으로 돌자면 우리는 두뇌가 둘로 갈라진 사람의 예를 들수 있을 것이다. 우뇌와 좌뇌를 잇는 뇌량이 잘라진 사람은 한 몸안에 두명이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오른쪽 뇌가 알고 있는 것을 왼쪽 뇌가 모르게 할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오른 쪽뇌가 알고 있는 정보를 근거로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때 왼쪽뇌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에 엉뚱한 이유를 댄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유가 있어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행동을 하고 나서 그 이유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만들어 붙이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의 바탕이 되는 철학이 있고나서 과학이 있었다기 보다는 반대로 무엇보다 분명한 해석능력을 보여주는, 간단하고 유용한 과학적 방법이 있고 나서 그 과학적 방법에 대한 철학이 거꾸로 가져다 붙여진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나 아프리카에 대한 수많은 책을 읽는 대신에, 이러저러한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아프리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대신에, 그리스나 아프리카에 가보자라고 하는 발상은 어느정도 통쾌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순서를 뒤집어 설명하면 물론 그것은 이러저러한 철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이러저러하므로 결과가 이렇게 나옵니다라고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논문을 써본 사람들은 논문을 쓸 때 오늘날에도 늘상 이런 짓을 한다. 


좀 더 간결하고 강하게 말해보자면 우리는 과학철학의 발달로 과학혁명을 만들어 낸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과학철학을 창조해 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일단하고 나서 그게 통하니까 그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변화와 혁명을 꿈꿀때 철학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철학과 행동은 적어도 그 순서를 반복해 바꿔가면서 서로를 키워가는 것이다. 이 세상사람들이 예를 들어 지젝이나 리차트 로티의 철학책을 전부 읽고서 행동을 하게 될까?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하여 지적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혁명적 변화의 중간에 있다고 말이다. 여기 어떤 세대가 있다. 여기 무슨무슨 족이 있고 무슨무슨 주의가 있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항상 가장 간단한 아이디어, 간단한 행동에서 시작하게 된다. 장대한 철학의 체계가 아니다. 


혁명의 오늘, 혁명의 내일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시대에 혁명이란게 가능한 것인가, 지금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중일까?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혁명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모른다. 미래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혁명의 본질과 미래를 보는 그럴 듯한 한가지 방식이다. 


우선 첫번째로 해야 할것은 먼저 어려운 철학을 찾는게 아니라 우리 주변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것이 뭔가를 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서 해야할 것은 그 변화의 핵심 다시말해 다시 철학적 핵심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핵심을 이해하게 될때 우리는 그 변화를 더더욱 극적으로 확대하고 미래를 열어가며 혁명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철학적 핵심이 우리를 어떻게 바꿔갈까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답은 적어도 시작은 아주 뻔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거기에 뭐가 있는가. 그렇다. 바로 스마트폰이 있다. 전자기기들이 있다. 우리는 전자통신 혁명, 컴퓨터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것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더 많은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들어와서는 무선통신을 통해 전세계로 퍼진다. 그러므로 다시 그것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고 그 변화는 다시 더 많은 정보를 생성한다. 역사상 라디오 텔레비전이나 피씨, 인터넷, 핸드폰, 스마트폰처럼 빠르게 전파된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그 효용을 인정하며 특히 가난한 나라가 더 그렇다. 


가난한 나라는 아예 유선전화기가 깔린적이 없는데 무선전화기부터 생긴다고 한다. 유선전화를 가설하는 것보다 무선전화를 개통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이다. 무선인터넷만 있으면 아마존 밀림의 토인도 미국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볼수가 있고 한국에 있는 사람과 화상통화도 할수 있다는 것은 현대가 만들어 낸 기적이다. 변방이 한순간에 사라지다 시피하는 거니까.


그러나 두번째 단계는 좀더 어렵다. 두번째 단계란 이러한 변화가 정말 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글 검색과 같은 서비스가 없을때 인터넷은 지금처럼 쓸만한 것이 될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하는데 그 데이터들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그럴려고 하다가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요즘은 길은 네비가 가르쳐주고 모르는 것은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이 다 검색해서 즉석에서 가르쳐준다. 시리같은 서비스가 나오고 구글글라스같은 기계가 나오면서 이러한 것은 더더욱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눈치챈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여기서 과학혁명시대와 한가지 비교를 하려고 하고 있다. 과학혁명의 시대이전에 서양에서는 문자가 보급되어 책이 나오고 문맹률이 떨어졌다. 즉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정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눈으로 직접 본다라는 방식, 과학적 관찰의 효율성이 극대화 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니까 본다는 문제, 인식의 문제가 심각해 졌을 것이다. 사실 책이 보편화되고 보통사람들이 아는 언어로 책이 만들어지기전까지는 기독교의 시대이지만 성경을 전부 다 읽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성경을 전부 모아서 모두 책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수도승같은 사람들이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을 만들어 내기는 얼마나 쉬웠을 것인가. 그러나 책이 보편화되고 지식이 한곳에 모이고 비교되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보게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서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이 되는 데카르트, 흄 칸트의 철학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곳의 문화는 그럼 어떠했을까? 무협소설의 세계는 도사가 많이 나온다. 신비한 도술을 부리고 자기만의 비법을 알고 있는 도사들이다. 이러한 도교문화는 문맹률이 지극히 높은 중국의 문화다. 마술과 신화가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그런식의 문화다. 그런데 지식이 순식간에 퍼질수 있는 책의 출간이 보편화되자, 사람들의 문맹률은 떨어지고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익숙한 과학혁명 이후의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오늘날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바로 빅데이터의 시대니뭐니 하면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종류의 거대 데이터를 다루는 시대다. 나는 여기서 현대인들도 일종의 인식론적 문제를 겪는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어떻게 해쳐나갈까? 우리는 이렇게 많은 정보를 통해서 어떻게 세계와 나를 인식할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잘하건 잘 못하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바로 언론과 수많은 SNS서비스며 구글검색같은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은 바로 베이지언 통계학인 것이다. 얼마전에 불멸의 이론을 읽은 독후감을 통해서 말했거니와 우리는 싫건 좋건 무한정으로 커져가는 데이터 분석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데이터 분석능력이 곧 국력으로 평가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과학혁명의 시대에 아직도 신화나 전설의 시대에 사는 나라가 국력이 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전세계에 그 힘을 자랑하는 회사가 구글이고 아마존이며 애플이다.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 보자. 그런데 그 베이지언 통계학이라는게 뭔가. 그것은 우리의 철학과 인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베이지언 통계학의 기본은 우리는 세상을 볼때 선입견없이 볼수 없고 항상 프라이어라고 불리는 기대치를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프라이어를 바꿀때 세상은 달라져 보이게 된다. 프라이어는 우리의 역사의 결과다. 우리는 소통을 통해서 그 프라이어를 동기화 시킬수 있고 그것은 하나의 공통의 시선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내가 이해하는 한도내에서는 생태주의나 실용주의 철학과 메세지가 비슷하며 불교나 노장철학과도 그렇다. 지방자치시대라던가 마을만들기 운동같은 것도 비슷한 움직임이라고 나는 느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요점은 우리는 말로 된 어떤 복잡한 철학에서 거기로 나아가는게 아니라 데이터 양의 폭팔시대를 살면서 거꾸로 과거의 여러 철학적 종교적 담론중에서 그에 맞는 것을 재발견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과거가 재해석되는 것이고 다시 우리는 어떤 쪽으로 눈이 트이고 어떤 쪽으로는 둔감해 진다. 그것이 새로운 경제를 만들고, 새로운 법률적 사회적 존재를 부각시키고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혁명가가 해야할 일은 철학책을 파고드는 일에 너무 매진하지 말고 IT분야와 통계학을 비롯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일수 있다. 오늘날의 혁명가는 산위에서 네모난 태블릿을 가지고 하산하는 선지자일 수 있다. 몇백년이 지난 훗날 진정한 혁명가로 기록에 남을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스티브잡스일지도 모른다. 


맺는 말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도 몇백년전이라고 하지만 지금 미분방정식풀기는 고사하고 미적분이라도 잘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내가 말한대로 혁명이 진행되고 행동이 철학이 되고 철학이 다시 행동이 되어 세상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통계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모두가 그것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마치 원리따위 몰라도 스마트폰없이 살기 힘들듯이 말이다.


이 글에서는 혁명 혁명하지만 그래서 그 혁명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거의 써있지 않다. 첫째로는 내가 다 알 턱이 없고 둘째로는 나는 글을 너무 길게 쓰고 싶지 않아서 간단히만 적는다. 


다시 과학혁명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익숙한 자유주의는 내가 이해한 바로는 바로 개인의 탄생 혹은 환경과 동떨어져서 홀로 정의되고 존재될수 있는 인간과 물질의 존재에서 출발되어져 나온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자유입자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최적화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그림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외롭고 분리된 철학의 시작이다. 


베이지언의 철학은 그와는 다르다. 프라이어는, 무엇보다 복잡한 데이터는 각각 분리되어있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살면 과학의 용어가 일상어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관성이라던가 애착이라던가 하는 말을 쓰는데 그 의미는 종종 과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거나 과학자들이 먼저 쓴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데이터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기법을 계속 개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몬테칼로라던가 제프리의 프라이어 같은 말을 일상어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베이지언이 무슨 말인지도 몰라도 그런 식으로 사고하게 될 것이고 세상은 어느새 전혀 달라져 보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기괴하고 미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옛날 사람들은 정말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짓들을 한거람!'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