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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우리시대의 혁명

혁명과 나무를 심는 사람

by 격암(강국진) 2014. 5. 21.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역사와 환경의 산물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보는 높이와 넓이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문제일지 모른다. 즉 우리가 높은 위치에서, 넓게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따라서 세상의 변화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몫이란 작게 보이게 될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논하는 가운데 플라톤정도의 영향력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서구 문명의 원천으로 생각되어 지는 힘을 발휘하며 오늘날의 서구문명 아니 세계 문명은 그의 저작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데아사상은 서구 철학의 본격적 시작이고 기독교정신의 기초를 만들어준 철학이었다. 예를 들어 세계가 이만큼 평등한 세상이 된 것에는 그의 철학적 영향력이 작용했다. 

 

그런데 플라톤을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대단한 평가에 눈이 멀어서 당시대적 입장에서의 플라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시대적 시각에서 그는 세계를 바꾼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라는 작은 나라에서 그것도 아테네라는 곳에 살던 귀족중의 하나였다. 그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시켈리아의 참주 뒤오니시오스 1세의 초빙을 받아 그의 철학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다가 무참히 실패하고 노예로 팔리는 일까지 겪는다. 그러다가 겨우 돌아와 말년에 뒤오니시오스 2세의 초빙을 다시 받았지만 그것도 1년밖에 가지 못하고 실패했다. 

 

따지고 보면 공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극동지역에서 유교적 영향력은 대단하지만 그는 살아서 그리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할 인물은 아니었다. 유랑하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후인들이 그를 기려서 그의 이야기를 자주하기에 그가 크게 보일뿐 당시대적인 시각에서 그는 결국 실패한 개혁가였던 셈이다. 

 

내가 플라톤이나 공자를 말하면서 그들이 실패했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그들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그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는가에 대해 지적함으로써 그들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상을 펴면서 과연 얼마나 지나야 그들의 주장에 세상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될거라고 기대했을까? 그 명석한 머리로 편하고 즐기고만 살려고 했으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들의 행위는 크는데 시간이 걸리는 나무를 심는 사람의 그것과 같다. 자기가 죽고난 뒤 한참 뒤에야 큰 나무가 되어 열매가 열리거나 걷기 좋은 산책로 옆의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로 변하게 될 것이니 자신은 사실 그 나무의 덕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기에 훗날 누군가가 와서 그 나무 그늘의 덕을 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보면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정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뭔가가 부족하고 아쉽다면 그것은 어제나 지난달에 우리가 무슨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십년전에 30년전쯤에 백년이나 4백년쯤전에 누가 나무하나 턱하니 심어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조상을 원망하자는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나무를 심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좋은 예는 선거다. 선거철만 되면 사람들은 마치 이 선거가 끝나면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그 선거의 승패에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조차 하는 일도 있다. 어떤 사회적 이슈가 크게 부각되도 마찬가지다. 그 이슈는 사람들을 가르는 사상적 판단의 기준처럼 등장하여 이런 시기에 왜 조용히 하는가 비겁하지 않는가라던가 이런 시기에 왜 저런 말을 하는가라던가 그걸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한다. 

 

코앞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 나아가 세계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종류의 혁명이 필요하며 그 혁명이 많은 사람의 희생과 참여로 지금 성공한다고 해도 사실 그 혁명이 성공하는 이유는 적어도 상당부분 자기는 그 성공의 득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과거에 나무하나 턱하고 심었던 누군가에게 있다. 

 

대학이 취직안되는 학문은 하지 않는 시대다. 취직도 이젠 평생직장이 아니라 10년 짧게는 3-4년하면 이직해야 하는 시대다. 결국 사람들의 호흡은 점점 짧아만 진다. 늙어서야 젊어서 길게 보고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런 늙은 사람옆에서 역시 눈앞의 것에 전부를 건다. 중학생은 고등학교 입시만 생각하고 고등학생은 대학교 입시만 대학생은 취업만 생각하고 취업자는 진급이나 결혼자금마련을 생각하고 아이를 가진 부모는 융자갚느라 바쁠뿐 고개를 들 시간이 없다. 시각이 짦으니 점점 잊혀지는게 많아진다. 그리고 그 잊혀지는 것들은 결국 곪아서 큰 재앙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점점 더 우리삶은 힘들어진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긴 시각을 가지고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건 언젠가 그 덕을 보게 될 누군가를 위해서건 나무를 하나 심고 있는가? 지금 코앞의 문제에만 코를 박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문제다. 그렇게 살면서 잘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은 운도 좋아, 가족도 화목하고 돈도 많고 자식들도 똑똑하네, 저 나라사람들은 운도 좋아, 자연도 아름답고 정부도 일처리 잘하고 복지도 좋고, 저렇게 모든 걸 다 갖추고 힘든 일도 안생기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그게 정말 운일까? 그게 아니라 우리의 시야가 좁았던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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