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25
진보라는 환상
전에 디즈니의 하이스쿨 뮤지컬이라는 영화를 아이들과 본 적이 있습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이 영화는 미국문명의 중심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상업영화 그것도 디즈니 영화 같은 것에 미국문명의 중심메세지씩이나 있냐고 말할지 모르나 하나의 문명의 중심메세지란 실은 고고한 학자의 어려운 책에 있는게 아니라 길거리에 가정마다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 사회는 그 목소리를 세뇌시키는 것처럼 반복합니다.
그렇다면 미국문명의 중심메세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자유 그리고 진보입니다. 즉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더욱 진보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소년 소녀여 꿈을 가져라 그리고 자유롭게 그 꿈을 추구하라는 메세지가 디즈니 드라마에는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을 미국문명이 거의 가득채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이나 자유라는 단어를 들으면 언제나 미남 미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저절로 떠오를 지경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이며 개인주의의 본질적 메세지이고 이러한 메세지의 기본에는 자유롭게 개방된 시스템에서 가장 빠른 지적인 성장이 일어난다는 자유주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최적회 시킨다는 자유시장의 가르침,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상태에서 경쟁하고 부딛히면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가 일어난다는 진화론의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보라는 것은 종종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의 강조라는 것은 이름만 자유일뿐 실제적으로는 그 반대의 일을 얼마든지 합니다. 마치 사대강 살리기라고 이름붙이거나 자유민주주의연합이라고 이름붙여놓고 실제적으로는 강을 죽이고 남의 자유를 탄압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가능하듯이 말입니다.
진화론은 우리에게 지극히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의 바닥에 깔린 보이지 않는 깊은 가정 중의 하나로 작동합니다.
나는 자유를 반대하지 않는다.
오늘날 위에서 말한 이 미국적 문명의 가치는 너무나 확고히 전파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한마디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유에 대한 탄압정도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무슨 전체주의적인 말을 하려고 하거나 몇몇 생태주의자들처럼 인간과 동식물의 생명간에 존재하는 가치에 대한 중요한 경계를 마구 허물어서 실질적으로 우주적 허무주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와 다르다고 해서 자유주의의 반대가 전체주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케익의 반대는 된장국이라는 말처럼 기묘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견해는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고 그것들은 다양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하나의 견해가 채우면 그 견해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의문을 표하는 모든 행위를 단순한 반대 하나로 묶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입니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복지 이야기 좀 하면 빨갱이라고 바로 말하고 FTA같은 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바로 신자유주의자니 재벌의 노예니 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둘로 나눠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면이 있더라도 결코 개인의 자유를 반대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적자생존에 대한 정리
일전에 적자생존의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을 다시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종종 이러저러한 유전자가 생존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개체의 번성을 돕고 다시 말해 적자생존하게 만든다는 식의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사전에 이러저러한 유전자가 '좋은 유전자' 라던가 혹은 '적자의 유전자'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없고 결과적으로 번성한 것이 적자이며 좋은 유전자라면 이것은 이음동의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경기에 이기는 사람을 강자라는 말의 정의로 삼은 후에 강자는 항상 경기에서 이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가 적자가 살아남는다던가, 뛰어난 자가 살아남는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은 온갖 되먹임의 고리로 상호 연결되어진 복잡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의 날씨에 대해 말할 수 있듯이 우리는 분명 작은 시간내에서 특히 주변환경이 안정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화의 방향을 설명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간격이 길어지면 진화의 방향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적자'의 생존인지를 말할 수 없어집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진보를 만들어 내는 자유주의의 주장을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경쟁이 진보를 이뤄낸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 비용은 가장 빠른 진보를 위한 댓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진보는 적어도 때로 환상입니다. 경쟁을 거쳤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것이 더 좋은 것이며, 그래서 세상이 진보되었다고 믿는 식의 논리적 순환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게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며 삶은 어차피 복권뽑기처럼 임의적인 것이니까 운좋으면 성공하고 운나쁘면 실패하는 것이 전부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겸허해 질 필요가 있으며 그럴 때 진짜 커다란 실수를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 성공담에 대한 경고
저는 일전에 말콤 그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 독후감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s://irepublic.tistory.com/7888034 ). 그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의 한구절을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아웃라이어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개인의 성공신화 즉 어떤 사람이 열심히했다거나 재능이 있었다거나 하는 신화를 믿지 말라는 것, 우리가 보통 관측하는 것과는 훨씬 다른 데이터를 의미하는 아웃라이어에 해당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재수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재수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며 적당한 문화적 혜택을 입은 탓이라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정확히 바로 적자생존의 논리에 반대하는 내용 그대로죠. 우리는 보통 우리가 이러저러한 재능을 가지고 우리가 노력해서 꿈을 이뤘다는 성공담을 듣고 스스로의 성공을 설명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죠. 말콤 그래드웰은 자기의 환경에 대한 이해, 문화적 흐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성공은 잘못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이 성공한 이야기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은 시기나 질투일뿐이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진보, 진화,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에 중독된 나머지 인간을 진화의 정점 심지어 진화의 목표점쯤으로 놓는 과대망상에 빠집니다. 지금 지구를 가득채우고 지구를 파괴할 지경에 이른 인간의 현실을 보고 인간은 과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진화의 최고 성과물이다라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멸종되어가는 지구환경의 일부인 동식물들은 불쌍히 여길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승자가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자연계에서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서 돈과 권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 혹은 회사들은 종종 스스로를 적자생존의 결과물로 여깁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월한 존재이며 더 많은 사회적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차지해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멸해야 마땅하다고 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말을 가져다 붙이기는 하지만 이 적자생존의 논리가 바로 자유주의의 근간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진보의 개념에서 시작해서 자연과 사회의 파괴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서 흔히 하듯이 고귀하신 왕가의 피가 모든 것을 이룬다는 식의 신화에 물들면 일반대중은 그 존재의미가 미미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면 문화공동체, 민족공동체, 국가공동체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는데 바로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롭게 꿈을 향해 노력해 가고 진보해간다는 그 메세지는 훌룡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이기적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즉 환경과 나를 분명하게 가르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나의 꿈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다만 모두가 모두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너무 참혹해지지 않기 위해 규칙을 만들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합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규칙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고 나중에는 그 규칙을 만드는 것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착취하고 놀고 먹는 시스템이 만들어 집니다. 지금 미국에서 돈찍어서 빚갚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일전에는 한 한국인 세탁소주인이 엄청난 배상금 재판에 걸려들어서 고생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는데요. 결국 늘어나는 복잡한 시스템속에서 나중에는 실제적으로는 그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법인이나 엘리트들만이 자유로운 그런 자유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일찌기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시장의 이상은 지켜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저절로 진화하여 진보하는 시스템이란 실질적으로는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게 없는데 진화와 진보를 믿는 사람들이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거대한 사회적 비극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인간적인 감성을 말살시키죠. 죽어가는 사람들은 경제학적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니 내 책임이 아니라고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알량한 법칙이란게 일관성이나 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폴라니는 진정한 자유시장이라면 노동자의 총파업이나 기업가의 담합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좋다는 말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칙을 도입하는데 그 규칙이란게 힘있는 사람맘대로이기 쉽습니다. 파업으로 어떤 기업가가 거지가 되면 극악한 범죄로 인식하지만 기업가의 합법적 기업활동중에 노동자가 죽으면 그것은 어쩔 수 없으며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일로 인식되는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과학적 발전에서도 적자생존, 자연선택같은 어떤 법칙에 따라 진보하는 세상에 대한 믿음은 일정부분 악영향을 끼칩니다. 법칙에 따라 세상이 진보한다는 시각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만듭니다. 우리는 평균, 평형점, 평균적인 압력따위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 자체가 왜 세상이 지금 이렇게 되었는가를 주목하는데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하는 것같습니다. 공장이 이러저러하게 생산을 하면 제품가격이 시장의 법칙에 따라 균형점을 찾고 따라서 이러저러한 가격으로 수렴한다는 식의 견해가 과학일반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제시스템에 공황이 오는 주된 이유는 신용이 불량해서 즉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않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믿을수가 없는 불확실성의 증가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의 정도에 따라 같은 사회는 멸망해 버릴 수도 있고 대단한 성공을 할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화를 말하고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생명은 왜 이러저러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연구한다고 할때도 우리는 분명 불확실성이란 측면에 더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적어도 충분히 그런것같지 않습니다.
가치판단의 문제
그래서 결국 삶은 로또복권일 뿐이라는 말인가. 성공한 사람은 그저 운이 좋아 그렇게 된것이니 우리는 노력따위는 할 필요도 없고 자유는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니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서 지킬 필요가 없으며 꿈도 가질 필요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삶은 임의적인가 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 봅시다. 일단 이 문제는 위에서 말했듯이 시간간격의 문제가 있습니다. 내일의 날씨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우리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열심히하면 살이 빠질것이고 열심히 책을 읽으면 성적이 오르고 머리가 좋아질것입니다. 여기서 노력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인과론은 성립합니다.
다만 우리는 개미를 보면서 겸허함을 배워야 합니다. 개미가 민주주의나 빅뱅이론이나 최고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방법, 핵융합의 원리따위를 이해할수 있을까요? 개미가 최고로 노력하면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에 아니 적어도 보통의 인간이 통상 생각하는 수준의 복잡성을 가진 이 세상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개미가 난 정말 확실히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봤거든 그러니까 내 생각은 틀릴 리가 없어. 이 세상은 이런저런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거야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시야에서는 측은하리만큼 오만한 생각이겠지요. 개미에게는 개미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인간의 시야에서 분명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하고 정확한 원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오만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성공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성공이란게 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오만하여 어떤 것을 확실한 것으로 맹신할 때 우리는 한번의 불확실성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습니다. 사회적성공이나 물질적 성공만을 보고 달리다가 어느날 가족에게 찾아온 불행이나 자신의 건강에 찾아온 이상신호하나가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으며 그때서야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해 너무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다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는 성공도 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성공의 이론을 믿습니다. 그 이론을 믿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맹신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봐야 그건 지극히 제한된 유효성을 가진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자유에 대해 봅시다. 제가 좋아하는 예입니다만 어느날 토끼모양풍선이 우주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주로 날아간 토끼모양풍선은 한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풍선은 토끼모양이란게 풍선의 성질, 고무풍선내부의 성질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풍선 내부와 풍선 바깥쪽이라는 안밖이 평형을 이룬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이와비슷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의 욕망, 자기의 꿈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수많은 자기들이 각자 꿈을 추구하며 그러다가 부딛히기도 합니다. 보다 만족한 세상을 위해 규칙을 만들고 그걸 지키자고 합니다. 자기가 풍선내부와 바깥이 만나서 생기는 경계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며 나의 욕망과 생각도 그런 접촉의 결과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라는 것, 자기 선택이라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뭐가 자기인지 아는 것은 자유의 본질에 닿아있습니다. 예쁜 아가씨를 보고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여자를 선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할테지만 그걸 지켜보는 부모는 아가씨가 남자를 유혹하고 그 결과 남자는 기계적으로 빨려들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체를 연결된 하나로 보고 자기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자유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를 다시 강조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건 감수성입니다. 느끼는 것이죠. 법이나 명문화된 도덕으로, 어떤 명백한 논리로 윤리학의 문제, 가치판단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유란게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의 자유일까요. 우리 하나 하나는 분리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모두를 느끼는 감수성을 가진 존재로, 전체 기계의 한부분인 부속품이나 그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자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위없이 아래가 없고, 타인없이는 내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때 승자와 패자라는 관점에서 누군가를 쓸모없다고 생각하거나 동정하는 일이 없어지고 -오른손이 왼발을 동정하겠습니까?- 자연환경은 물론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하게 될 것입니다. 규칙이란것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실질적으로는 모두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식이란것에 지나치게 빠져서 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는 뭔가를 얻어서 더 훌룡한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는 것 그런 식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물론 지식의 소중함을 잊어서도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마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와 타인의 구분도 없고, 국경선도 필요없고,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필요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분리된 존재도 아닙니다. 분리와 이름붙이기는 필요하지만 임의적이고 잠시간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답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진출에 저항하여 지역경제를 사수하자 같은 구호가 일반론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라던가,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명목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사랑하는가 소중하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이고 선택입니다.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한국도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도 고향마을도 없던 곳에서 나타난것이고 언젠가는 사라질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단순평등의 규칙을 천명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라질때가 된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묻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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