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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사물의 의미에 대한 투쟁

by 격암(강국진) 2017. 1. 11.

2017.1.11

 

사람의 의미도 그렇지만 물건의 의미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짓는 가 혹은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에 크게 달려 있다. 만약 컵을 주로 망치로 쓰는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컵은 일단 깨지지 않아야 하니 단단한 것이 될 것이고 튼튼하고 무거운 철제 컵이 주로 사용될 것이다. 이런 컵은 비록 본래의 컵의 용도로 생각하면 아름답지도 않고 쓰기도 불편하지만 망치로 쓸 때는 편리하기 때문이다. 컵이 대개 망치로 쓰인다면 설사 사람들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왠지 컵은 무겁고 단단해야 좋아보일 것이다. 어느날 시장에 아주 가볍고 예쁜 컵이 나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무겁고 단단하지 못한 그 컵이 반드시 시장을 장악하게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컵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거나 적어도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 새로운 컵은 컵답지 못하여 잘 깨진다는 둥 하면서 그런 컵을 불쾌한 것으로 취급하고 시장에서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형식과 내용간의 괴리 혹은 이름과 실존과의 괴리를 보게 된다. 내가 뭔가를 컵으로 부르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컵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뭐뭐뭐라고 불리는 사람이 된 것과 내가 실제로 뭐뭐뭐인가는 다른 문제다. 이 괴리의 문제는 크고 작게 세상 모든 주제에서 나타나는 데 한국에서 좋은 예가 되는 것은 바로 집이다. 한국에서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불리는 도구로 많이 쓰인다. 우리의 집의 모습은 바로 망치가 되어버린 컵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는 뭔가를 집이라고 부르고 그걸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이해하지만 실질적 사용방식으로는 그걸 지폐나 저금통장처럼 주로 쓴다. 집을 돈으로 쓰니까 어느새 집은 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 주거인 아파트는 매우 규격화되어 있다. 요즘은 좀 다양한 디자인의 집이 나오고 있지만 10년전쯤 몇군데의 아파트 단면도를 보고 나는 참 놀란 적이 있다. 전국의 아파트를 전부 같은 도면으로 만든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파트의 구조는 서로 꼭같았던 것이다. 구조만 규격화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아파트는 가격도 상당히 규격화되어 있었다. 이것도 요즘은 상당히 무너졌지만 전에는 무슨 무슨 지역의, 몇평이라고 하면 가격이 대충 나왔다. 예를 들어 강남의 몇평대 아파트는 평당 얼마다하는 식었던 것이다. 집의 구조나 인테리어가 다르다고 크게 가격이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아파트가 10년된 것이나 새 것이나 가격은 비슷했다. 이것은 마치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나 새 만원짜리나 모두 만원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은 자동차 같은 물건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10년된 차가 새 차와 가격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사는 곳의 특성을 갖췄다기 보다는 지폐나 카지노 코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집이라는 단어와 그 내용간의 괴리는 우리의 주거문화를 피폐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모두가 망치처럼 무겁고 불편한 컵을 쓰면서 컵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 그건 일종의 자학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인식적 오류 즉 어떤 환각속에서 산다. 역시 컵은 묵직해야 제 맛이야라고 외치면서도 자신의 팔이 아픈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비명을 지른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돈이 되어버린 부동산은 인간을 기형적인 모습으로 살게 한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끝없이 사물의 의미에 대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삶이란 적극적이어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선택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집이란 곧 돈이듯이 어떤 대학에서는 관행적으로 후배란 선배가 기합을 주고 모욕을 주며 예절을 가르켜야할 열등한 존재일 수 있다. 아니면 여자가 그런 존재일 수 있고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사물의 의미에 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받아들인 관행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날 몇년전에 자신이 일기장에 쓴 글을 읽으면서 깜짝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전에는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주변에 동화되어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언행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컵을 망치로 쓰는 것 자체가 어떤 금기인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은 삶의 지혜일 수 있다. 다만 그런 선입견이 우리의 발전을 막는다. 우리가 컵은 컵으로만 쓰고 망치는 망치로 쓰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컵은 당연히 망치다라는 선입견내지 고정관념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집이 재산이고 돈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고 집이 재산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집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집을 짓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좋은 면도 있다. 그런데 집이 돈이라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때문에 가난해 지는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일 것이다. 다른 것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돈을 벌겠다는 욕망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면 돈을 벌겠다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들어갈 일이 아니지 않을까?


집이나 건물이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재산이라는 의미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망각되고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만들 수가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돈에 대한 집착때문에 인간에 대해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에까지 이를 수가 있다. 우리의 아파트 맹신은 우리에게 댓가를 지불하게 만들 것이다. 전국에 있는 낡은 고택들은 문화재로서 의미가 있다. 과연 백년뒤에 전국에 숲처럼 만들어 놓은 아파트 마을들이 문화재가 될까 아니면 산업폐기물이 될까. 한국의 아파트는 점점 비싸지는데 멀리서 보면 한국은 오히려 가난해 지고 있는 중이다. 이건 마치 핵폐기물에 대한 처리방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당장 핵발전이 싸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 되는거 아닐까? 


어떤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선입견은 폭력을 만들어 낸다. 패션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저 춥지만 않으면 옷은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말할 수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될 때 그것은 패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가 어딘가에 살 때 그 선택은 심각한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 꼭 아파트가 잘못이라기 보다 아파트 이외의 선택은 실질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을 사회가 만든다면 그것은 사회가 개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폭력이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은 원래 이러저러한 존재라서 이 정도면 충분하며 이것에 대해 더이상 불평해서는 안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집에 대한 것이든 다른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 좋은 말이 참 많다. 문제는 어떤 좋은 말은 기존의 선입견을 강화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폭력을 만들어 내는 나쁜 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의심하지 않으면 좋은 말은 소용이 없다. 사물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직접 투쟁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과 소통해서 그 뜻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사물의 의미에 대한 투쟁에서 지게 된다. 늘상 팔이 아프다고 불평하면서 쇳덩이처럼 무거운 컵을 사용하는 인간이 된다. 그건 스스로를 직접 괴롭히는 자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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