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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옥탑방과 공간의 군살

by 격암(강국진) 2017. 1. 14.

17.1.14

우리집 옥탑은 내가 글을 쓰거나 컴퓨터를 쓰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하면서 머무는 곳이다. 이 옥탑공간은 아령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중간의 통로같은 부분이 양쪽으로 존재하는 좀 더 넓은 부분들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로의 역할을 하는 부분중 일부는 좀 더 넓어서 나는 그 곳에 책상을 놓고 쓰고 있는데 아령의 양쪽 끝에 해당하는 부분들의 넓이는 퀸사이즈 침대 정도의 폭에 길이는 그보다 두배쯤 긴 정도다. 

 

나는 집을 구할 때 여러 주인세대 집들을 둘러보았었는데 집을 선택할 때는 옥탑방의 구조에 별다른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이런 구조를 가진 집을 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장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공간은 그냥 작은 방이 둘있는 것보다 좋고 번듯하고 네모나게 넓은 구조보다도 좋다. 

 

만약 두 개의 공간이 완전히 단절된 것이었다면 그 각각의 작은 공간들은 아무래도 좁아서 답답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걸 아늑한 다락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옥탑방 공간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한 쪽은 방으로 쓰더라도 다른 쪽은 창고가 되어서 그냥 쓸모없는 물건들로 채워버리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즉 다른 공간까지 동시에 쓰게 되지 않으니까 한쪽 공간을 소홀하게 대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실질적으로 공간의 낭비가 되기 쉽다. 

 

그런데 두개의 공간이 더 넓게 붙어서 통짜로 하나의 네모난 넓은 스튜디오였다면 어떨까? 나는 또 그건 그대로 아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는 지금의 옥탑방이 주는 아늑함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령의 양쪽 끝에 해당하는 공간에는 퀸사이즈  크기의 라텍스 매트리스들이 펴놓여져 있다. 그 공간에서 벽을 등지고 앉거나 이불을 덮고 누우면 나는 매우 아늑한 작은 공간안에 들어있는 느낌을 받는 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공간이 터져있으므로 답답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왠지 나는 이런 공간이 매우 낯익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니 이것은 바로 한국인의 전통가옥에 늘상 있었던 구조다. 전통집에서는 대청마루가 양쪽의 방들을 이어주는 구조를 한 곳이 많다. 그래서 문을 닫고 있으면 양쪽의 방들은 각각 따로 따로의 공간이고 문을 열면 대청마루와 방이 연결되면서 좀 더 탁트인 공간이 된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렇게 공간을 쓰는 것은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작은 한옥집도 작지 않은 집처럼 느껴지게 된다. 결국 이런 공간 구분의 미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셈이다. 

 

우리는 대개 더 많은 것이 더 좋다는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간이 더 넓은 쪽이 더 좋다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만 공간이 더 좁은 쪽이 실은 더 쓸모있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공간이 어떤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없고 그냥 양적으로 더 크면 더 좋다는 생각에 머무를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실상 공간의 구조가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집이 넓어도 대부분의 공간은 버려지게 되어 집이 넓은데도 왠지 체험적으로는 붐비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집이 충분히 넓지 않다고만 생각할 수 있다.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공간의 군살이 빠져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 어떤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있는 공간이 모두 알차게 사용된다. 그래서 작은데도 넓은 집처럼 쓰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이 단순히 집안 공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양적인 것에만 치중하고 구조를 보는데 실패하면 같은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풍요롭게 사는데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의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때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우리는 많은 돈을 썼는데도 불만이 남을 때 그걸 너무 쉽게 우리가 충분히 돈을 가지지 못했기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자기의 권리와 독점적 소유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두개의 독립된 방과 같은 구조를 가진 관계라고 생각할만 하다. 따로 떨어져 있으니 독립감은 있고 편하지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비좁다. 

 

반면에 두 사람이 뭐든지 공유하고 뭐든지 비밀도 없는 그야말로 금기가 없는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스튜디오방같은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뭔가 가능성의 영역을 크게 넓혀주지만 생각만큼 좋지만은 않다. 우리는 무한한 자유속에서 긴장을 느끼고 그만큼 부자유를 느낀다. 나만의 것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란한 파티만을 계속한다면 그 안에서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금기가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자유를 느낄 때 그것을 단순히 양적인 문제로 파악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공간으로 끌어들여서 더 많은 확장된 공간을 구성하려고 할 것이다. 즐거운 파티가 더이상 별로 즐겁지 않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하자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할 것이다. 공간의 군살처럼 관계의 군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허물없는 관계인 부부라고 해도 때로는 격식을 차려주는 쪽이 더 큰 만족감을 준다. 친한 연인이나 부부사이란 방구를 앞에서 뿡뿡껴도 괜찮은 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부부사이가 각자의 공간을 가지기 위해 독립된 두개의 방처럼 되어서야 안되는 것이지만 통로의 흔적도 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도 나름 불편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쉽지 않다. 뛰어난 감수성이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월의 흐름속에서 축적된 삶의 지혜속에서나 발견하게 된다. 그 둘다가 아닌 경우에 해당하는 인스탄트식 만남과 소비가 판치는 세계에서는 우리는 쉽게 양의 논리에 매몰된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양적으로 뭔가를 더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된다. 이렇게 애초에 진단이 틀려있는 경우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앉아있는 옥탑방이 왜 좋은 것인지도 좀처럼 깨닫지 못하기 쉽기 때문이다. 풍요는 역시 때로 우리를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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