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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법칙과 초기조건

by 격암(강국진) 2017. 3. 21.

17.3.21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혼동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보는 것에 실패하고 오직 우리가 아는 것만을 전체로 느끼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으며 모든 것이 그러한 사실에서 설명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같다. 이럴 때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라는 특징 이외의 개인적 특징들은 사소한 것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버린다. 

 

이와 관련된 한가지 중요한 예는  법칙과 초기조건의 관계일 것이다. 과학이 보편화된 시대에 과학적 방법에 대한 여러가지 반성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은 과학적 설명이 가지는 함정에 빠지고 있다. 현대 과학은 갈릴레이와 뉴튼 시대 이래 완전한 설명과 이해는 포기되어졌다. 그것은 오직 관찰된 사실들 안에서 규칙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수학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수학이란 엄밀하고 논리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수학은 관찰 데이터에서 법칙을 찾아내기 쉽게 하고 그것을 엄밀하게 기술할 수 있게 한다. 

 

하나의 던져진 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현재 위치와 현재 속력을 가지고 그것의 미래의 위치와 미래의 속력을 계산해 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뉴튼의 운동의 법칙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외부적으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물체는 변하지 않는 속력을 가지고 계속 움직여 나갈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공이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제의 설정부분에 숨겨져 있다. 즉 이러저러한 초기조건때문이고 이러저러한 힘들의 분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작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완전히 망각하게 된다. 우리는 대개 왜 초기조건이 이러저러한가라던가 왜 힘들이 이러저러한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묻는 것은 바보같은 일로 여겨진다. 문제의 접근 방식이 원하면 어떤 경우라도 언제나 별도로 질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일은 주로 이미 어떤 특정한 문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운동의 법칙에 따라 주어진 대상이 어떻게 움직일 까를 예측하는 것이며 우리의 사고를 초기조건이나 힘들의 분포로 확장하는 것은 종종 그저 막연히 미래의 일로 남겨진다. 

 

물론 과학에서 초기조건이나 힘들의 분포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는 문제를 기술하는 방법 속에서 어떤 것을 당연한 것,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듬으로써 우리의 무지를 숨긴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말이다. 그 결과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뭔가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철저하고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을 착각하기 쉽게 된다. 

 

사실 과학은 엄밀하며 논리적으로 이미 엄청난 규모를 가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느끼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으로 우리가 역사와 같은 인문학적 대상을 생각하려고 하면 이 문제를 느끼기는 좀 더 쉽다.  역사는 일상어로 쓰여지는 것이라서 과학과 같은 엄밀성으로 거대한 논리적 체계를 만들 수도 없고 그렇게 할 만큼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물리학에서 그러는 것처럼 어떤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또는 그저 그런 법칙이 있는 것처럼 주관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법칙은 뉴튼의 법칙같은 물리법칙에 비하면 매우 엉성한 것이라서 모든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다. 그럴 때 그 역사적 사건들의 다양성을 우리는 또다시 초기조건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그 엉성한 법칙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게 되고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초기조건에 대한 질문은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될 수 있으며 그 역사에 대한 이론은 예측이 틀려도 다시 정당화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학문이 해야 하는 주된 일은 역사속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초기조건이라는 것들에 대해 발굴하여 서술하고 자료를 모으는 일이 아닐까? 이 과정에서 어떤 사실에 주목하고 감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비과학적인 부분이 역사를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부르게 만든다. 그럴 것같지 않지만 설사 언젠가 미래에는 역사가 물리학과 같아지는 때가 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의 단계에서 역사는 결코 물리학처럼 몇가지 원리들로 요약되어지는 단계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즉 역사에는 뉴튼 방정식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포퍼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을 비판한 이유도 본질적으로 상황이 이렇기 때문이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여기고 우리의 무지에 대한 감수성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 나쁜 이데올로기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그 자체가 어떤 것을 중요한 것으로 어떤 것을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것이 중첩되면 이제 우리가 뭘 모르는 가를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진다. 법칙과 초기조건의 예는 우리에게 이 문제를 다시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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