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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과학에 있어서의 존재와 인과론

by 격암(강국진) 2017. 3. 29.

17.3.29

여기 어떤 물질 X가 있다고 해보자. 이 물질은 존재하지만 이 우주에서 이 물질 X이외의 어떤 것과도 반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질량도 없어서 중력도 작용하지 않고 빛도 영향을 주지 않아서 보이지 않으며 어떤 물질과 화학반응을 하는 일도 없다. 중력과 전자기력외의 핵력도 이 물질에는 적용이 안된다. 이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이런 물질이 있다면 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과학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물질은 과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과학적으로 말할 때 인과론은 뭔가가 존재한다는 현상의 핵심에 있다. 다시말해 뭔가가 인과론적으로 뭔가를 일어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 뭔가에 이름을 주고 그것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몇가지 구체적인 예들을 고려해 보면 이것들이 그렇게까지 당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령을 생각해 보자.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건 위에서 한 말과는 앞뒤가 안맞는 것같다. 왜냐면 유령은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유령을 본 사람이 있으니까 유령이라는 말이 계속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유령을 봤다라고 하는 현상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유령의 존재가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령은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건 또 왜 그런가 하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국 이제까지 유령을 본다라는 현상에 대해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설명은 이렇다. 실제로 누군가가 유령을 봤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식기관이 오류를 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뭔가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과적으로 무슨 현상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론들을 부정할 수 있어야 그것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뭔가가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론이 결정하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아인쉬타인이 한 말과 거의 같다. 아인쉬타인은 우리의 이론이 우리가 뭘 보게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유령의 경우에는 과학적 이론이 그 존재를 부정했다. 그런데 다른 예에서는 과학적 이론이 어떤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존재에 대한 예로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온도다. 우리는 과학적으로든 그냥 일상생활의 상식수준에서건 온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물질의 온도가 높으면 그것은 우리 손에 화상을 만든다. 따라서 온도의 존재는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온도란 것은 생각보다 지극히 제한적으로 존재한다. 온도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과학적 이론이 미시적이고 기초적인 원자나 에너지같은 개념으로부터 높은 온도가 화상을 만든다는 거시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뜨거운 물에 손을 집어넣었다고 해보자. 그 물은 내 손에 화상을 만든다. 우리는 이 현상을 높은 온도가 화상을 만들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 온도라는 것을 직접 관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높은 온도가 화상을 만들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과학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이론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가속된 물분자가 우리 손에 있는 생체막들을 두들기고 그것을 파괴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통해 높은 온도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과학적으로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문장은 의미를 가지게 되고 온도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와 이론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세번째 예인 민주주의를 고려해 보자.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혹은 공화국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수없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죽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존재나 공화국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앞에서 말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때문에 그것을 부정하지는 못할지는 몰라도 민주주의나 공화국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민주주의라던가 공화국이라는 현상을 관찰했을 때 그것이 무슨 현상인지를 과학에서 사용하는 미시적인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극히 지적인 존재가 그런 것도 설명할 수 있을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어도 적어도 우리가 그런 것을 할 수는 없다. 때문에 과학적으로 말했을 때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던가 공화국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이 글은 과학자들의 까탈스러운 존재론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뭔지, 과학이 인문학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 위해 쓴 것이다. 나는 일전에 물리학과 생물학의 차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 둘 사이의 핵심적 차이는 물리학같은 학문은 아주 기초적인 시작점에서 이론을 쌓아 올려갈 수 있지만 생물학은 그보다 더 일상적인 수준에서 기초점을 잡고 이론을 쌓아 올려가야 한다는 점이다. 

 

즉 어떤 관측에 기초해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출발점이 다르다.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DNA가 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 그토록이나 중요한 이유는 양자역학이 물리학과 화학을 이어주었듯이 유전자가 고분자라는 사실이 생물학을 화학에 이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은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을 전부 하나로 이어주는 거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은 아직 정치학이나 사회학이나 경제학에까지 이르고 있지는 못하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하나의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이 모든 화학적 문제나 생물학적인 문제를 물리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실은 수학적으로 깨끗하게 풀린 물리학 문제란 어처구니 없이 작다. 작은 진동을 다루는 단진자 문제나 수소원자의 양자역학적 연구정도다. 수많은 원자로 이뤄진 단백질의 구조를 쉬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서 해결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결국 연결점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있어도 그 연결은 큰 구멍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수천개 수만개의 수학공식을 그냥 쓰고 있는 데 그중에 몇개는 증명되었다는 경우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젠가 그 공식들이 전부 증명되기를 바라며 연구를 계속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현실은 우리가 뭔가가 존재한다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당연히 그 의미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과학적 결과를 크게 보고 과학적 논리를 강하게 믿을 수록 인문학적 이론들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의 파티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는 프로이드가 이드라던가 자아란던가 초자아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심리학을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이론은 인류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21세기 신경과학자들은 묻게 된다. 도대체 이드가 뭔가? 그게 존재하기는 하는건가? 

 

존재는 이론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가 단일한 이론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할 때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그 이론을 바꿀 때 존재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이제 대개 요정이나 도깨비를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다른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정이나 도깨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이 글에서 말하는 문맥에서는 틀린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아직 단하나의 구멍없는 이론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러개의 이론들을 아슬아슬하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고 때로는 아예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부지런히 구멍을 메꾸려고 하지만 사실 그 구멍이 다 메꿔지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죽기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존재하기도 하고 안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요정이나 도깨비도 존재하기도 하고 안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전체 이론의 작은 조각일지라도 어떤 특정한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대개 그런 일을 하면 우리가 더 똑똑해 졌다고 믿는다. 사실 요정이나 도깨비를 분명히 보는 사람은 분명 미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치한 수준을 넘어서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요정이나 도깨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 중독되어 인문학은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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