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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믿음과 증명 그리고 합리적 판단

by 격암(강국진) 2017. 7. 28.

17.7.28

모든 결정이나 주장에는 믿음과 증명이 함께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물론 믿음도 증명도 다 소중히 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이런 말에 쉽게 동의한다. 하지만 믿음에 너무 빠지는 사람은 증명을 무시하기 쉽고 증명에 빠지는 사람은 믿음을 무시하기 쉽다. 이때문에 믿음도 증명도 소중하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합리적이 될 수는 없다. 

 

먼저 믿음에 너무 기울어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증명이 아닌 것 혹은 아주 유치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과학이 틀리면 종교가 옳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에 우리가 의심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역시 사람은 신이 창조한 것이 된다는 식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답이 1번에서 천번이나 만번까지 있는데 1번은 답이 아니므로 답은 2번이 틀림없다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이 최종적 진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따위의 등장에 의해서 절감하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과학은 높은 신뢰를 얻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가설은 아주 많은 데이터에 의존해서 검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과학은 그 내부적인 논리적 일관성에 대해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투명하게 검증한다. 이때문에 경제학이나 사회학, 심리학은 종교가 아니지만 과학이 되고자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의심을 받는다. 그 한가지 이유는 수학적 학문은 그 전체 구조가 매우 논리적으로 튼튼하지만 일상언어로 전개되는 학문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뭔가를 증명한다고 하는 것 또는 스스로를 과학으로 부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믿음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논리와 증명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증명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 쉽게 과학적 결과를 부정하고 어설픈 몇마디 문장으로 자기도 뭔가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세상에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세상의 문제를 모두 논리와 증거의 문제로 보려고 한다. 그들은 근거없는 믿음을 너무나 비판한 나머지 자신들 스스로를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면역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특정한 믿음에 대해 맹목적이 되기 쉽게 만든다. 스스로 뭔가를 믿고 있으면서 자기가 그걸 믿고 있다는 자각이 없어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자신의 믿음에 대해 맹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성의 대표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에도 한계는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학을 포함하는 모든 학문이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축적되어서 발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학문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줄거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에 가깝다라고 말하지 않고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우리는 우리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망치를 손에 든 사람과 같다. 망치라는 도구는 많은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망치로 해결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되는데 망치의 성과에 놀란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가 쉽다. 인간의 학문적 성과에 놀란 사람들은 같은 입장에 있다. 

 

학문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수없는 사람의 노력이 축적되어 만들어 진다는 것이 바로 학문의 한계다. 이 말은 학문은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전달하고 조직하는 소통수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효율성이 높게 만들어도 내연기관은 연료가 가지는 화학적 에너지를 넘어서는 에너지를 생산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기록수단이 가지는 한계속에서만 학문은 가능한 것이지 그걸 넘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세상에 그런게 어디있냐고 말하는 사람은 우주적 규모에서는 인간도 개미나 아메바와 그다지 다를바 없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에 개미의 한계가 있다면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종교가 그러하듯이 학문도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감추는 경향이 있다. 한나라의 경제가 실업률이라던가 국민소득이라던가 금리같은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있는 질문은 그런 측정들에 기반하여 답할 수 있다고 믿게 되기 쉽다.  비선형동역학이 나오기 전에는 세상의 물리문제들은 대부분 선형동형학이 적용되는 경우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학문이 뭘 숨기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부분적으로는 그것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학문이 뭘 숨기고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 학문의 한계를 크게 확대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게 쉽게 가능하다면 당연히 누군가가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보기 어렵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학문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학문은 세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세상의 특정 부분만 보게 만들어 눈멀게 하는 경향도 있다. 우리가 물리학자나 심리학자 혹은 의사나 법률가같은 전문가에게 결혼이나 교육같은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을 때 그것은 우리와 다른 의견을 듣는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들이 특정분야에 대해 공부를 많이한 전문가이므로 일반적으로도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학문은 대단하지만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  한 세기전에 미래는 어떻게 될거라는 예측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틀려 있는가를 보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학문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과도하다는 증거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질병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우주여행을 일상화시키지도 못했으며 인구문제, 환경문제로 골치를 겪고 있고 여전히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학문의 한계를 말한 이유는 학문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보다는 학문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들이 가지는 분명한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진정한 학자는 자기 분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에는 괜찮을지 모른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학문이라고 말할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즉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어설픈 이론가들이다. 어설픈 이론가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을 굉장히 단순하게 본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마치 몇가지의 측면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굉장히 작은 데이터에만 의존하여 검증하며 대개 자기 이론을 지지하는 관측결과만을 수용한다. 어설픈 이론가들은 이렇게만 하면 교육문제가 해결이라고 하고 저렇게만 하면 주택문제는 단숨에 해결이라고 하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인생 뭐 있나 이게 인생이다하는 식으로 아주 분명하고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분명히 비합리적인 이들의 이런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본질적으로 그들이 논리적이려고 하는 노력을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즉 표면적으로라도 논리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노력이, 우리의 무지를 인정할 수 없는 태도가 비합리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이유가 없는 사건, 근거가 없는 믿음을 싫어한다. 그들은 너무 빨리 최종적인 답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런 이론이나 답이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기에 본인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와 불확실을 참아낼 수가 없다.

 

세상의 복잡함과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가 어떤 문제를 풀어야 겠다는 조급증과 만나면 어설픈 이론가가 탄생한다. 그들은 세상의 대부분의 측면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매우 단순화되고 그 단순화된 세계안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나름대로 가지는 이론이 구축된다. 그렇게 해서 어설픈 이론가들은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들의 불행은 바로 이 세상은 논리와 증명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만 한다라는 그들의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불행을 제거하는 한가지 방법은 스스로 답을 발견했다고 서둘러 믿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나 있다. 예를 들어 뉴스를 보다 보면 이런 어설픈 바보 전문가들이 등장하고는 한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많은 전문적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기득권의 이익만을 위해 편파적으로 일하며 공동체의 파괴를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은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제일 나쁜 부분 중의 하나는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어설픈 이론가들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이론가를 양산해 내는 조건중 하나는 권위주의다.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권위에 의존한다는 식으로 결정을 내리고 나면 세상이 아주 간단해 지곤 하니까 말이다. 어설프게 책 한권읽고 세상에 대해 모두 알게 된 사람은 세상에 참 많다. 

 

물론 우리는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 모두가 어설픈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의 깊이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뭘 모르는가에 대해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우리가 주로 나는 답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시하고 나는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목한다는 것 때문에 자주 만들어 진다. 

 

이 문제를 극명하게 만들기 위해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주사위를 던진다. 그런데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짝수가 나올거라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홀 수가 나올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무슨 수가 나오는지 모른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번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이 경우 알고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옳은 답을 구하는 방식은 세번째 사람을 무시하고 첫번째 사람과 두번째 사람이 공개석상에서 논쟁하게 만들고,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더 구체적으로 1이 나온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의견도 들어야 한다. 의견을 듣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제일 중요한 의견을 종종 무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의견이다. 그 사람은 모른다고 말하니까 무시당한다. 우리가 자신감이 과도한 어설픈 이론가를 양산하는 이유가 이래서다. 모르는데도 안다고 말하면 사회는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 

 

나는 믿음과 증명이 마치 우리 몸의 구조와 같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믿음이란 우리 몸의 바깥 세상에 관한 것이고 증명이란 우리 몸안의 장기들과 같다. 우리 몸의 바깥 세상은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야할 환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가정을 하면서 자신을 지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깥 세상만 신경을 쓰다보면 우리는 단세포 동물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 내 심장은 자신이 굶어죽을 것을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음식을 먹고 소화해서 에너지를 보내는 것은 몸의 다른 부분이 하고 있다. 공이 나에게 날아올 때 왼 손과 오른 손이 서로 그걸 잡겠다고 싸우지는 않는다. 즉 우리 몸은 전체로서 하나의 질서속에서 움직이고 기능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몸안의 모든 세포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각자 움직인다면 우리는 단세포 동물밖에는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몸안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해 버린다면 그것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 기계가 생명을 따라올 수 없는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생명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서 적응을 하는데 기계는 자기일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거대한 기계는 멈춰설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자동차는 수없이 많은 부품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의 한가지만 망가지면 종종 전체가 멈춰서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 여러가지 장치를 고안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동차같은 기계는 인간과 공생하면서 자기 기능을 유지한다. 인간이 오일도 갈아주고 타이어도 갈아주고 더 심한 고장이 나면 수리센터도 다녀오는 식으로 점검도 하니까 계속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어설픈 이론가가 되는 것은 자신의 몇가지 기능에만 주목하고 환경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기계처럼 무정하게 움직여서는 전체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몸안도 봐야 하지만 몸바깥도 봐야 한다. 내가 아닌 것을 보는 것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자아찾기다. 그것이 합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길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면 합리적 판단도 없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 모두 알아야 우리는 적절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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