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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우리가 무시하는 결정의 고통

by 격암(강국진) 2017. 8. 23.

17.8.23

결혼하기 직전의 일이다. 아내와 나는 가재도구를 사려고 쇼핑에 나갔다. 살 것은 많았고 중요한 것들이기도 했으며 결정은 한없이 느려서 나는 매우 피곤해졌고 우리는 다투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아는 유부남들은 여자와 쇼핑가서 싸운 이야기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워낙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흔한 이야기에 대해 충분히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결정으로 인한 고통을 의학적 심리학적 실체로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처리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결정으로 인해 쉽게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타인이 어떤 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와 주변 사람을 고통받게 하며 서로 싸우게 만든다. 

 

현대인의 삶이 결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결정의 고통을 사소하게 여기고 있다는 한가지 증거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진지하게 결정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되도록 불필요한 결정과정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의 경우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로 산다.  우리는 되도록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래서 선택의 과정을 통해 더 많이 고통받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언제나 선택의 자유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호텔에 들어가면서 여기는 씨리얼이 천가지 종류나 있다라고 말하면 야 그거 멋진걸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다. 

 

현대인은 눈을 뜨자마자 아침을 뭘 먹을까를 고민한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청바지를 고르는 일에서 누구와 친하게 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앞에 서있으며 그때문에 고통받는다. 현대인은 2-3백년전의 사람과 여러모로 다르게 살지만 많은 선택앞에 선다는 것은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홈쇼핑 화면앞이나 대형 쇼핑몰의 매장 속에서 진화한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이 거의 같았던 원시적 환경에서 진화했다. 따라서 현대적 환경은 우리를 중독과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뭔가를 사서 소유하게 되었을 때의 쾌감에 중독되고 뭔가를 잘못 결정하면 어쩌나 하는 고통에 지나치게 혹사당해서 기진맥진해 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환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베리 슈월츠는 선택의 역설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왜 우리가 너무 많은 선택지들을 가지면 불행해지는가를 설명했다 (그 강연의 링크는 여기에 있다). 첫째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택지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우리의 선택을 즐길 수 없다. 즉 다른 것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에 대해 우리는 계속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가진 것을 즐기기에는 그런 생각에 너무 바쁘다. 둘째로  선택지의 숫자가 클 수록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이 세상에 청바지가 한 종류뿐이라면 우리는 불평하지 않고 그것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바지가 수백 수천가지라면 우리는 몸에 맞지 않는 청바지를 욕하고 그것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청바지는 원래 완벽해야 하는데 완벽하지 않다면 불만스러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때문에 불행해 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 결과가 나쁜 것은 세상의 잘못이다. 그러나 선택을 하게 되면 이제 그 책임은 그런 결정을 한 나에게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내린 멍청한 선택에 대해서 늘상 자책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현대인들이 왜 우울해하고 자살도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슈월츠는 한가지 답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너무 많은 선택에 지쳐서 불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인들은 더 많은 것이 좋은 것이며 행복이라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너도 나도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지 못해서 야단이다. 결정과 관련된 고통은 과소 평가된다. 몸은 죽을 것처럼 고통을 느끼는데 세뇌된 머리는 더 많은 것, 더 복잡한 것이 더 좋다고 계속 흥얼거린다. 결정과 관련된 고통은 응당 참아야 하는 것이며 선택의 고통을 인지하고 불평하거나 피하는 것은 유치한 행위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일로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은 발전과 행복을 위한 일인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응당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은 현대의 성스런 계율이다. 

 

선택이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하는 것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문제다. 당연히 사람마다 사안마다 차이가 있다. 같은 사람도 약간 다른 문맥에서는 전혀 다른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 선택을 내릴 수 있다.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은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비교적 쉬운 선택들은 그럼 그것의 백분의 일만큼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천분의 일일까?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먼은 우리가 짧고 강렬한 고통만을 과대평가해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같은 고통인데 마지막에 그것이 더 긴 시간동안 천천히 사라지게 만들면 기억하기로는 그 체험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고통들을 실제보다도 훨씬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지속적으로 들리는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왜 그런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작은 선택이 만들어 내는 고통들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들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사소한 선택들도 모이면 매우 고통스런 과정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을 리모델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벽지의 색깔이나 집에서 쓸 주전자 모델을 고르는 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유복한 사람들이라면서 부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이게 아주 고통스럽다. 테이블의 모양과 색깔은 방안의 다른 가구나 장식과 관련이 있고 우리가 그 방을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어렵게 테이블을 골랐다 싶은데 뭔가가 바뀌면 그게 또 다 바뀌게 된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하거나 집을 짓는 건축주는 대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중에는 화장실 벽색깔은 어때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 도저히 답을 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될 수 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선택들을 지쳐서 대충했기 때문에 이제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냥 어서 빨리 이 모든 게 끝나기 만을 기다리게 되기 쉽다. 실제로 해보면 작은 결정들이 얼마나 우리를 쉽게 피곤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규칙을 만들어서는 기계처럼 판단을 하려고 한다. 

 

영미권에서는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사람을 컨트롤 프릭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동차 조수석에 앉으면 안절부절하면서 여러가지 불평을 한다. 자동차가 자기의 결정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은 자기 모자는 꼭 자기가 골라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이 쓰는 모자도 자기 선택대로가 되지 않으면 마치 누군가가 엄청난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난리를 치면서 후퇴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이유를 알아야 하고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그걸 관철시켜야 한다. 

 

어쩌면 컨트롤 프릭도 결정의 고통때문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 컨트롤 프릭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 그녀는 오히려 주변 사람이 자기를 맘대로 한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안되는 것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남을 억압한 것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억압당하고 무시당한 것만 강하게 느낀다. 그러니 자기가 모든 일을 맘대로 하고 있다고 느끼질 못한다. 항상 자기가 아픈 것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사실 정도의 문제일 뿐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컨트롤 프릭이다. 우리는 모두 문제가 꼬이는 것이 싫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고려해서 결정과정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걸 피하다 보니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타인들을 억압하게 된다. 사람들의 싸움은 대개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컨트롤 프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의 것이건 남의 것이건 결정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윤리의식의 출발점이다. 지구 사람들 중 윤리적 영웅들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지독한 컨트롤 프릭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혁명의 영웅들이야 말로 컨트롤 프릭이 아닐까? 그들은 사회적으로 말도 안돼는 결정들이 행해지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상황에 눈을 감고 그것을 무시한다. 나만 그걸 피하고 살자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게 안된다. 그런 것에 눈감고 사느니 차라리 고문을 당하거나 죽는 게 더 좋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 고통은 그토록 심하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고생길을 계속 걷는다. 그들은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다. 내 몸이 편한 것으로는 그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컨트롤 프릭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식이 망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그냥 적당히 순응하고 살았을 것이다. 개인적 이득만 생각하면 그게 더 합리적이다. 그래서 모두가 영웅이 되지 않는다. 남들이 엉터리같은 행동과 판단으로 일을 망치는 것이 뭐 어떻다는 것인가. 내버려 두면 된다. 영웅이 되는 것은 대개 손해다. 하지만 그들은 참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과정에 대한 고통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은 대개 과소평가되어지고 있으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게 살고 있다. 감옥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나는 병역문제로 대학원공부를 쉬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마음에 편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병역으로 인한 제약때문에 훨씬 더 판단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못하는게 너무 많은데 시간만 보내면 일단 병역은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마음이 편했다. 그것도 다 내가 평상시 얼마나 안절부절하면서 이럴까 저럴까하는 선택의 고통에 시달렸는가를 보여주는 경험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할까 말까 고민하면 그것도 괴롭다. 무슨 비누를 써야 할까? 무슨 밥을 먹어야 할까?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도 다 괴로움의 시작이다. 작고한 스티브 잡스는 언제나 같은 옷을 입는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그것도 그가 옷을 고르는 고통에서 벗어나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려고 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저렇게 살아야 할까하는 고민이 오히려 우리의 창의력을 모두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택과정이 주는 고통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진지해 질 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지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의 증진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를 점점 더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다. 서로를 존중한다고 하면서 서로를 억압하고 있다.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오히려 최악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그게 다 인간이 결정과정에서 고통받는 다는 것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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