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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체험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과학

by 격암(강국진) 2016. 10. 21.

16.10.21

일찌기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명사화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사랑한다라는 동사로 말하는 대신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바친다던가, 당신은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 동사의 명사화는 어떤 행위나 관념을 객체화한다. 즉 그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 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표현들 속에서 사랑은 이제 해나 달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나와 상관없이 움직이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는 어떤 것이다. 

 

일부러 찾고자 할 때 이렇게 하는 예들을 우리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과되기 쉬운 예는 과학을 명사화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예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과학의 시대를, 다시 말해 과학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명사화로 사랑에 대해 오해가 만들어 지는 것처럼 과학의 명사화는 과학에 대한 오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결국 과학 자체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미 어느정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과학의 명사화가 간과되기 쉬운 주된 이유는 과학 자체가 엄정한 객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며 그 복잡성이 날로 증가해왔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과학은 오해받고 심지어 배척받게 된다.

 

과학의 명사화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 여기 하나의 기계, 예를 들어 자동차 한대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도구로 이해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도구라는 말은 그것이 수동적인 존재라는 말을 암시하며 가치 중립적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망치나 칼처럼 자동차는 그걸 잘 사용하면 좋은 일에도 쓸 수 있지만 나쁘게 사용하면 나쁜 일에 쓰이게 된다. 도구는 수동적일 뿐이라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순수한 도구는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구는 가치중립적이므로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자동차를 순수히 도구로 생각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동차 한대를 기증한다면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자동차 자체가 아니라 자동차를 소유하는 행위다. 우리는 이것을 착각해서는 안된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것과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의 차이는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아주 많은 자동차 소유자들은 자신의 자동차를 사랑한다. 그래서 자동차를 일단 구매하여 그것을 타다보면 단 일주일정도를 사용했더라도 그 특정한 자동차는 이제 '우리' 자동차가 되게 된다. 논리적으로 말했을 때 한 두주를 탄 차보다는 새 차가 더 좋은 것이지만 이미 그 자동차에 정이 들게 되면 우리는 그 차를 새 차와 간단히 바꿀 수는 없다. 정이 더 깊게 들게 되면 설사 상처가 있는 자동차일지라도 우리 자동차는 똑같은 모델의 다른 자동차보다 더 좋은 것으로 느끼게 되며 돈이 있어서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어도 옛날 차를 떠나 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우리가 어떤 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가 그 도구를 단순히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애정이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정이 없기 때문에 자동차가 더러워지건 말건, 엔진 소리가 어떻든, 인테리어가 더러워지건 말건 상관하지 않게 된다면 결국 그 자동차는 사랑해주는 주인을 만난 경우보다 훨씬 빨리 망가지기 쉬울 것이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달리기만 한다면 사이드미러쯤 망가져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에게는 차마 자기 차를 팔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자동차를 사랑한다면 한 번이라도 더 자동차를 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가 우리의 생활을 바꾸는 정도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자동차를 바꾸고 바뀐 자동차가 사람을 바꾸는 상호 관계가 사랑에 의해 깊어지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 전혀 정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동차를 정말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 일뿐이므로 쉽게 사고 팔 수 있으며  자동차가 상처를 입게 되도 그 사람은 지극히 경제적으로만 반응할 것이다. 예를 들어 끊임없이 교환하게 되어 있는 돈을 생각해 보자. 돈도 하나의 도구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한 지폐에 애정을 가지는 일은 훨씬 적어서 내가 가진 만원을 다른 사람이 가진 만원과 바꾸는데 있어서 우리는 대부분 거리낌이 없다. 돈을 수집하는 사람도 있지만 돈은 기본적으로 자꾸 교환되어야 하며 특정한 지폐에 애정을 가지면 곤란해 진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동차의 중고값이 비싸지건 싸지건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폐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교환수단으로서 의미를 잃게 되면 그걸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기꺼이 돈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것이다. 

 

돈이나 화폐시스템은 비록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면 대개 타인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화폐 같은 것을 만들고 유통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지역화폐란 단순히 교환가치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지역의 단합과 부흥이라는 어떤 의미와 연결되어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나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된다면 특정 지역화폐를 모두 팔아버리거나 지역화폐에 투기를 해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돈과 인간은 분리되는 것이다. 

 

자동차는 기계이지만 주인의 사랑을 받는다. 그 이유는 특정 자동차가 소유주의 책임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화폐 시스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므로 화폐 자체에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자동차의 경우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자동차는 약간씩 변할 것이며 내가 원한다면 나는 여러가지 고의적인 변형을 내가 소유하는 자동차에 가할 수 있다. 내 책임이므로 내 주관과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 그러나 화폐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나 주인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제 돈과 자동차에 대해서 말했으므로 과학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된 것같다. 과학을 명사화한다는 것은 과학을 가치중립적인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과학을 마치 해나 달이나 한 대의 자동차처럼 우리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며 과학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과학을 쓸모없는 것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변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과학자에게는 사실이 아니다. 특히 과거에는 더욱 그랬다. 과학자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학자에게 과학이란 그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대상이다. 명사화되지 않은 과학이란 단순히 가치 중립적인 도구로 파악되어지지 않은 과학을 말한다. 사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인 뉴튼이 물리학을 연구한 것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동기에서 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과학은 명사화되었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오해 받고 있지만 그 출발점에서 보면 과학은 철학이고 삶의 방식이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마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거나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와 같다. 과학을 연구하고 거기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때 과학자는 그 과정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질서를 체험한다. 자연의 질서를 느끼는 그 체험은 종교적 체험과 다르지 않다. 그 체험을 사랑하고 그걸 소중하게 생각하는 행위가 바로 과학한다는 것의 본래 의미다. 

 

따라서 사실상 과학은 또하나의 종교였다. 그 종교는 고대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에는 신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교리중의 하나로 삼는다. 그래서 수학적 단순성이나 아름다움이 이론을 선택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 과학을 공부하고 과학자가 되고 과학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절이나 성당에 출가하여 그 교리를 믿고 그 교리에 따라 살기로 한다는 것과 같았으며 같아야만 한다. 바로 그 체험을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자는 과학을 하게 된다. 불교도가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는 것은 종교적 체험을 위한 것이고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하지 돈을 벌거나 취업에 도움이 되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알버트 아인쉬타인은 막스플랑크의 60세 생일에 과학자에 대해 유명한 말을 한다. 여기서 아인쉬타인이 말하는 세번째 과학자가 사실은 본래의 과학도였다. 

 

과학의 사원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우월한 지적 능력을 즐기기 위해 과학을 한다. 그들에게 연구는 개인의 야망을 충족시켜 주는 일종의 스포츠이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목표 때문에 과학에 종사한다. 그러나 세번째 부류가 있다. 만일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이 두 부류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과학의 사원에서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플랑크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며 지식은 축적된다는 것이다. 과학이 복잡하고 방대한 시스템으로 자라나게 되자 점점 더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 한대처럼 만지작 거릴 수 없는 것으로 변했다.  점점 더 우리는 과학을 그저 주어진 것내지 괴물로 파악하게 된다. 과학은 더이상 체험을 주는 삶의 방식이 되지 못하고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가치 중립적 도구가 되었다. 과학은 명사화된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종종 신앙심이 없이 비지니스 모델이 된 교회같은 모습을 가진다. 

 

이것이 어떤 상황인가는 앞에서 예를 든 자동차나 돈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당신은 기계나 컴퓨터는 전혀 모르는데 당신의 자동차는 미래에서 온 것이라고 하자. 그 자동차는 실질적으로 고도로 복잡한 컴퓨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신은 정해진 일만을 할 수 있을 뿐 함부로 뭔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과 자동차간의 소통은 없다. 상황은 마치 당신이 그 자동차를 책임지는게 아니라 그 자동차가 당신을 책임지는 것같다. 당신은 그런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기뻐할 수는 있지만 그런 자동차를 사랑할 수는 없다. 이해를 포기한 대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일찌기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 유희라는 작품속에서 거대화된 시스템이 인간과 분리되자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상황을 묘사한다. 한때 거대화된 기독교 체계가 인간을 소외시켰듯이 거대화된 지식 시스템도 인간을 소외 시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의 주인에서 과학의 노예로 전락했다. 우리는 더 이상 과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한때 과학이란 건축가에게 건물이고 화가에게 그림과 같은 것으며 지역화폐를 활성화시키려는 활동가에게 있어서의 지역화폐같은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그냥 객체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내 탓이 아닌 것처럼 자연을 비추는 객관적 거울로 이해된다. 체험으로서의 과학이 사라지고 과학이 세속화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현대인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결합하면 우리는 우리가 무시하고 애정을 가지지 않는 자동차를 타고 점점 더 빨리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에 있다는 말이 된다. 화폐시스템에 애정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 전혀 없으면 경제위기가 온다. 과학시스템이 위기를 가져오면 뭐가 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종교시스템의 거대화는 종교의 타락을 가져온다. 세속화란 결국 돈과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종교는 오래전에 그 힘을 잃었는데 과학도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이제 돈과 이득을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풍조가 계속되면 과학은 사기꾼들의 손에 움직이는 곳이 된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전체 인류나 어떤 공동체의 장기적인 이득을 생각하는 일없이 그저 목전의 이득에 따라 여러가지 과학 프로젝트가 제안되고 추진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그저 더 많은 수의 논문과 더 안정된 직장과 더 많은 양의 연구비라면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것이다. 과거 기독교는 돈받고 면죄부를 파는 일을 했었다. 오늘날의 과학 아니 나아가 학문세계는 어떤가. 아직은 돈받고 면죄부를 파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노벨상도 돈만 주면 파는 대상이 될까? 유전공학을 이용해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그런 종자에 지적소유권을 붙인다던가 하는 행위는 돈받고 면죄부를 파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문제는 오늘날의 세계가 인간이 체험하고 소통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과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인간의 직접적 관찰이 강조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인간의 체험과 소통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못할 때 인간의 가치가 닿지 않는 거대한 규모에서 경제적 힘이 움직여서는 어떤 중요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핵발전소의 개발과 설치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전기차 시대를 열어야 하는가 아니면 화석연료차를 계속 써야 하는가. 인공지능은 어떻게 개발되어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결국은 그저 경제적 탐욕이 결정적 요소가 되고 만다. 그 이유는 세계가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멸의 과정이 아니던가?

 

가치와 윤리는 문맥과 공동체 혹은 환경에서 나온다. 그래서 세계는 다시 많은 수의 망들로 많은 수의 공동체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중앙집중식의 권력은 더욱 분화되어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자기 실현을 위해 살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세상의 다양성은 증대되고 우리는 더 많은것을 배우고 체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전모를 파악하지도 못하는 시스템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은 수학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은 인공지능일 것이다. 수학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진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듯이 인공지능이 새로운 시대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데이터를 관리하고 다루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줄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은 탐험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했다. 이런 걸 생각하면 망의 시대란 새로운 망의 건설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유기적 시스템의 건설을 통해서 이 세상과 우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시대일런지도 모른다. 

 

망의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아직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과학의 세속화는 한참 진행된 일이며 그 부작용은 날로 커져만 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오늘날 서구의 중세가 우울한 시대로 기억되듯이 훗날 망의 시대가 본격화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한참 우울한 시대로 기억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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