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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우연과 일관성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6. 5. 2.

16.5.2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전에 본 영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흥미가 동해서 그 영화를 중간부터 한동안 봤는데 문득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물론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해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우연의 힘이 크게 작동한다. 

 

우선 나는 딱히 그 영화가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같은 시간을 써서 볼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영화는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설사 그 영화를 본다고 해도 그 시간에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 영화를 찾아서 처음부터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영화를 본 이유는 그 영화가 우연히 틀었던 텔레비전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내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어떤 우연이 나로하여금 그 영화를 보게 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나는 사실 훨씬 더 많은 다른 선택이 존재하는데도 별 불만 없이 그 영화를 본다. 그러나 내가 어떤 가능성, 어떤 선택들을 가지고 그 중의 아무거나 하라고 하는 상황이 되면 나는 실은 그 가능성 전체에 대해 모두 시큰둥하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문제의 그 영화를 뭐야 전에 본 영화를 뭐하러 다시봐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내가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모두 그렇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 상황에서는 당신은 수백개의 영화중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마음껏 선택해서 볼 수가 있다. 두번째 상황에서는 텔레비전이 이 영화중의 하나를 무작위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더 좋아할까? 물론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영화들이 어떤 영화인가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답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선 우리보고 첫째와 둘째 상황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첫째 상황을 더 좋아한다고 할 것이다.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는 상황이 첫째 상황이기 때문에 스스로 더 좋은 영화를 선택해서 더 좋은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 간격을 두고 두가지 상황을 모두 경험한다면 더 지루하게 느끼게 되는 쪽은 오히려 첫째 상황일 것이다. 굉장히 많은 좋은 영화들이 한꺼번에 주어지면 우리는 실은 그 영화중의 어느 것을 봐도 괜찮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설사 어느 영화를 틀어도 다른 영화를 틀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영화를 봐꿔보게 된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가 전부 별로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영화들을 서로 비교할 것이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 때문에 우리는 피곤해 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엄청난 시간을 보낸다. 

 

실은 우리는 이미 본방송을 놓치면 방송을 보기 힘든 시대가 아니라 주문형비디오의 시대 즉 원하면 지나간 방송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리모콘으로 볼수 있는 영상들을 찾으면 우리 앞에 셀 수도 없는 숫자의 명작 드라마나 영화가 펼쳐진다. 그런데 내가 뭘 보고 싶다라는 것이 이미 확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제목들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따분해 진다. 텔레비전에 방송채널이 두 세개밖에 없었던 시대에 우리는 별 재미도 없는 광고나 뉴스도 재미있게 봤었다.그런데 채널이 수백개가 되는 케이블 방송시대가 되면 이제 텔레비전은 훨씬 덜 매력적인 기계가 된다.  

 

영화만 이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믿는 것보다는 훨씬 더 운명을 믿는 것처럼 산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기 보다는 그저 사소한 몇번의 우연이 겹쳐지고 어떤 사람과 가까워 지면 그 사람과 계속 그렇게 지낸다. 마치 우연히 틀었던 티브이에서 하고 있는 영화를 채널을 돌리지 않고 계속 보듯이 말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친구나 연인과는 많이 다르고 때로는 아예 정반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페미니스트인 여자라고 하자. 우연히 당신의 이웃에 굉장히 남녀차별적인 언행을 하는 남자가 살게 되었고 어떤 계기로 해서 당신은 그 남자와 뭔가를 같이 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인 당신은 그 남자를 혐오하고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다르게 일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그 남자에게 적응할 것이고 심지어 그 남자의 어떤 장점을 발견하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변화를 보고 놀라고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언젠가 당신에게 모진 말로 남녀차별적 언행을 비판당한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당신을 욕하고 싶어질 것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예들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우리는 배신당한 것같은 느낌을 받았던 개인적 기억을 대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때로는 과거를 되돌아보면 자기 자신의 행동도 일관성이 없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있게 된다. 

 

이쯤 되면 현대인의 삶에는 치명적인 일관성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은 선택권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많은 것들에 노출된다. 미디어를 통해 여러가지 정보를 접하고 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산다. 주유소에서 불장난을 하면 언젠가는 대형사고가 벌어지듯이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이렇게 많은 선택권들과 이렇게 많은 우연한 만남들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우울하고 무작위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힘들고 지쳐있다가 그저 우연히 만난 것들에 이따금 빠져들고 그러다보면 인생은 어느새 되돌아갈 수 없게 변해 버리고 하는 식이 되는거 아닐까? 그렇게 살고 나서 일이 다 벌어진 후에 이런 저런 정당화를 하면서 자기를 속이고 있는거 아닐까? 

 

이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는데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이유가 더 있다. 하나는 추세로 보았을 때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할뿐 앞으로 좋아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더 강력해져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줄 것이고 강력해진 망은 우리 앞에 더 많은 선택들을 주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점점 더 복잡해져 왔고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같다. 게다가 나는 나보다 더 어린 세대는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할 거라고 생각한다. 

 

또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이 우연의 힘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택하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의 힘에서 탈출하기 위해, 일관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보통 뭘 하는가? 사람들은 세상을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매순간 그들이 접하는 것들을 자신의 지식에 비춰서 정리하고 분류해서 인식한다. 그러니까 통상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길이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언뜻 생각하면 이런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유일한 것같지만 사실 이런 태도는 말하자면 어떤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믿고 그것에 기대어 사는 것이다.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단순히 지식과 분류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를 우울한 세계에서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울을 더 깊어지게만 만든다. 

 

물질의 소유건 지식의 소유건 그것은 우리에게 권력의 착시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어떤 책을 단 한글자도 읽지 않고서도 그 책을 자기개발서 분야로 분류하는 순간 마치 내가 그 책의 대부분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어떤 철학책을 조금도 읽지 않았거나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도 철학책 책꽂이에 철학책을 사다가 꽂고 그 책을 소유하는 순간 이제 자기가 그 철학책을 지적으로도 소유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이제 책을 하나도 읽지 않고 그 책을 평론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 내가 쓴 것에 대해 읽으면서 아 이 이야기는 어떤 교수나 어떤 심리학자의 무슨 연설의 내용이로군이라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이 이야기는 이러저러한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하는 식으로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듯 사람을 정리하고 이야기들을 정리한다. 많이 배운 사람들 혹은 스스로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중에는 더욱 그런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 분류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 분류가 틀릴 수 있다. 둘째로 설사 그 분류가 일리가 있다고 해서 당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의 말이 니체의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고하자 그리고 어떤 현명하신 분이 그런 분류가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람이 니체의 말도 나의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피상적인 인상에 의한 분류는 거의 의미가 없다. 

 

분류나 정리 나아가 지식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질문을 회피하게 만든다. 세상을 진부하고 뻔한 곳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상 자체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도서관에 가득 찬 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리고 그 책의 목록과 분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어떤 답을 가지고 있거나 애초에 답은 없다고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뭔가에 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걸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은 지금 더 복잡해져만 가고 있다. 그것도 그 복잡해지는 속력이 매우 눈부시다. 나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이 점점 더 인간이 유전적으로 가진 힘의 정도를 초월하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유전적으로 보았을 때 그저 수백명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적합한 존재가 아닐까? 애초에 이렇게 많은 선택권을 가지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은 마치 인간보고 백자리 숫자의 곱셈을 암산으로 하라고 하는 것처럼 무리한 일이 아닐까?

 

우연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쌓는 것도 답이 아니라면 그럼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우선은 소유를 정리하고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줄여야 할 것인가, 뭘 가져야 하고 뭘 버려야 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가능한한 가볍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가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저분하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그 소유에 휘둘리게 된다.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복잡한 삶을 살 수 없고 결국 우리는 그 복잡함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된다. 어딘가에서 저지른 한 번의 실수가 우리의 코를 꿰어서 우리를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속에 가두게 될 것이다. 

 

단순한 삶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숫자를 줄여준다. 나는 하루에 백번의 선택을 하는데 선택을 잘하는 방법을 배워서, 어떤 지식을 쌓아서 그 백번을 더 잘하겠다라던가 더 빠르게 하루에 2백번을 선택하겠다라는 발상을 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하루에 열번의 선택만 하면서 사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가 정신없이 전화와 질문을 받으면서 그렇다 아니다 같은 답을 던지다보면 첫째로 실수를 할 수 있고 둘째로 피곤해지며 세째로 그렇게 해서 더 행복해 질 수도 없다. 

 

무엇보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저절로 선택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을 빠르게 해치우면 또 한 번의 선택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는 자동차의 색깔이나 할부계약조건이나 이 자동차를 집까지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같은 수많은 선택들에 바쁠지 모르지만 우리가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나는 자동차를 지금 살 필요가 없다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수입이나 언행이나 학교성적이나 사회적 유명세나 그 사람의 소유로 평가하는데 바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평가가 무의미해 지는 때도 많다. 평가도 필요악인데 필요도 없이 필요악을 남발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우리는 일관성의 문제를 의식적 일관성에서 몸의 일관성으로 다시 이해해야 한다. 몸의 일관성이란 육체적이란 뜻이 아니라 의식을 넘어서 무의식의 세계에 까지 존재하는 일관성을 말한다. 뇌 역시 몸이기에 나는 그것을 몸의 일관성이란 말로 표현해 봤다. 나라는 존재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파악한 것을 넘어서 존재하며 엄격히 말하면 온 세상에 퍼져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기억에 크게 관련되지만 동시에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 우리가 자라고 커온 온 세상에까지 이어져서 존재하는 것이다. 

 

의식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글로 쓰고 그렇게 고정된 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몇 줄의 글로 표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환경보호론자라던가 자유주의자라던가 사회주의자라던가 같은 하나의 단어가 한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나는 누구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것도 필요악일 뿐이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한 시대에 얇팍한 이해로 몇줄의 이데올로기를 쓰고 이게 나야라고 하면서 그걸 지켜가려고 하면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자기 마음과는 반대되는 선택도 하기 마련이다. 다른 예를 들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패거리 싸움을 한번 보라. 진보니 보수니, 영남이나 호남이니에서 임대주택에 산다던가 무슨 대학을 나왔다던가 학벌이 어떻고 나이가 어떻고 성별이 어떻고 외모가 어떻고에 따라서 우리는 무수한 패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휘둘린다. 당신은 여자니까 여자대통령에게 표를 던져야 하고 당신은 노동자니까 노조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몸의 일관성이란 의식하는 나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것 이상을 말한다. 몸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질문에 답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머리로 이리저리 따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석연치 않으면 그것에 대해 더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의 자세에서 가장 나쁜 것은 틀린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빠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선입견이나 관습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틀린 선택은 없다. 좋고 나쁘다의 가치판단은 어떤 테두리를 기반으로 해야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인데 절대적인 테두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선택은 내가 아닌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내리면 나는 스스로가 내린 선택과 싸우고 경쟁해야 한다. 탁자를 사거나 집을 구하면 의자를 구할 때 탁자나 집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선택들은 서로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사랑하면서 부모님에게 등을 돌리는 선택을 한다면 적어도 오랜동안 마음이 편해 질때까지 그 선택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이 것은 개인의 태도이며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우리는 결국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복잡해져 가는 사회는 그 안에 여전히 수천 수만년전과 똑같이 태어나는 인간을 담기 위해 새로운 원리로 재구성되어져야 한다. 그 재구성을 어떻게 하건 그 것도 결국 인간의 일이며 인간의 선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개인들이 먼저 자기의 삶을 지키고 정돈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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