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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흉내내는 원숭이와 자유로운 인간

by 격암(강국진) 2016. 1. 5.

16.1.15

원숭이를 모욕하는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많은 경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흉내내는 원숭이에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인간문명의 수천년 역사 속에서 이 문제와 싸워 왔다. 우리는 이 문제때문에 서로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예를 들어 전부 다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글로 써진 것, 말해진 것은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보편성을 가정하고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무관하게 참이거나 적어도 상당한 기간 동안 진리라고 주장되어지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나 한국전체 혹은 우주 전체에서 진리라고 주장되어지며 나에게만 참인 것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이나 모든 인류에게 다 참이라고 주장되어 지는 것이다. 말로 표현된 것은 고정된 것이며 대부분 보편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이나 철학 나아가 모든 학문의 역사란 다른 말로 하면 주관성과 싸우고 객관성을 달성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이나 수학만 그런게 아니라 경제학이나 사회학같은 것도 그렇다. 심지어 우리가 통상 주관성을 인정하는 분야라고 하는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도 우리는 객관성을 달성하려고 한다. 최소한의 객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행위는 똥이나 죽은 개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원숭이가 무작정 타이핑한 글을 읽는 것이나 작가의 글을 읽는 행위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장자가 그렇게나 넓은 시야를 강조하는 것이나 공자가 공부하는 것, 인간의 보편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모두도 보편성, 객관성을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인류 역사상의 모든 노력들은  뒤집어 생각하면 한가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지긋지긋하리 만큼 시야가 좁고 그저 오늘 일어난 일, 그저 내 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을 흉내내고 따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흔하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귀하다. 

 

어제 비가 와서 비를 흠뻑 맞았다면 오늘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우산을 안들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고금의 현자들은 기억하라, 이런 저런 경우에는 비가 올지도 모르니 우산을 들고가자라고 말한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우산챙겨주는 엄마처럼 말이다. 생각좀 하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그 외에도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문맥에서 좀 더 넓게 보고 그 것에 따라서 판단하자. 

 

그런데 아이들은 지긋지긋하게 생각이란 걸 안한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도의 차가 있고 안 그럴 때가 있을 뿐 인간이 다 그렇다. 우리는 지긋지긋하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이러저러한 것은 원래 그렇다라고 하고는 실패한다. 그 실패에서 아픔이 있고 그것에서 배우는 사람은 매우 현명한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마치 눈이 멀고 기억력이 전혀 없는 곤충이나 금붕어처럼 행동한다. 손을 불에 집어 넣으면 아프다. 아파서 불에서 손을 빼고는 금방 다시 불에 손을 집어 넣는다. 누가 그걸 말리면 과거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의 일과 지금의 일이 같은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도박중독자나 알콜중독자처럼 행동한다. 그러고 있는 자기를 보면서 스스로도 자기를 미워하게 되곤 한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고 말해지는 다니엘 카네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보면 사람들은 이런 인간의 주관성을 학문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인 카네먼은 어떤 것의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속된 말로 화장실 가기전과 가고난 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직장이 있을 때 그 직장들의 가치평가는 그중 하나를 선택하기전과 그러기 전이 다르다. 인간은 보수적이라서 일단 어떤 직장을 잡으면 그 직장이 주는 장점을, 즉 이미 손에 들어온 혜택을 포기하기 더 아까워 한다. 이런 주장은 결국 인간의 경제적 선택은 객관적 의미에서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객관적 경제학은 임금이 백만원 인것보다는 백십만원인 것이 더 좋으며 그것을 모두가 선택할 것이다같은 가정을 한다. 그것이 당연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에 대해 만족하는 정도는 주변상황에 따라 다르다. 내 임금이 백만원이지만 직장내 다른 사람들의 월급이 95만원이라면 자부심을 가질 법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월급이 백이십만원이라면 백십만원의 월급도 굴욕으로 생각하고 작은 것으로 생각해서 직장을 그만둘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월급을 깍으려고 노력하거나 말이다. 절대적 부유함이 꼭 행복을 주는게 아니라는 사실은 요즘 복고풍의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지지리 가난했던 과거의 궁상들을 보면서 우리가 오히려 그때 가졌던 것을 지금은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유한한 시야를 가지고 주변의 것을 그냥 흉내내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때로는 그 시야가 너무 좁다. 그러니까 조금 더 긴 호흡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보면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인다. 패션에서 투자에서 교육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말들이 유행을 타면 미친듯이 그리로 달려가서 그걸 안하면 죽는 것처럼 야단 법석이다. 

 

문제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걸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도 어리석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루 살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지나치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걸 인간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그런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때가 있을 뿐 사실 많은 경우 어리석은 흉내쟁이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또 사실이다.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부는 것을 어리석다고만 말하는 사람은 가난해지기도 쉽다. 세상사람들이 다 보수적으로 투자한다면 그가 옳지만 세상사람들이 투기에 미치면 투기에 미친 사람이 정상이 되고 가만히 서있던 사람은 바보나 미친 사람이 된다. 모두가 원숭이인 사회에서는 인간이 조롱거리가 되고 미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말하고 어떤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어떤 정권의 불의함을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흉내쟁이 원숭이면 그것은 미친 소리가 되고 만다. 첫째로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의 세상은 오지도 않으며 둘째로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의 세상이 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다. 정도의 문제지만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불의하게 살 수 있으며 남들을 차별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느낀다. 자기가 약간 불합리한 일을 당하거나 차별을 당하면 원한을 품지만 자기가 남을 괴롭게 하거나 차별을 할 때는 자기가 뭘하는지도 모르거나 애써 모른 척한다. 윤리적 섬세함을 유지할 긴장감을 귀찮아 한다. 그러니까 세상이 좀 불합리하기를 인간들은 원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앞에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은 충격을 받고 세상을 등지거나 아니면 인간을 철저히 원숭이로만 취급하기로 결심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로 변하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위기라고도 말해지는 문제도 그 본질에 있어서 단단한 우리에 갇힌 원숭이의 위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킬수록 인간은 어떤 고정된 시스템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보았을 때는 너무나 합리적인 그 시스템속에서 인간은 불행하고 부자유한 것이다. 자기가 만든 우리속에 스스로 갇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고 마약에 취하고 반윤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시스템은 오히려 엄청난 속도로 거대화하고 강력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위기는 해결되고 넘어간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각해지고만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발달 시킬 수 있는 문명의 복잡함의 한계는 우리가 누리는 정도에서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상 복잡한 문명을 추구할 때 그것은 마치 제트기를 원숭이가 조정하는 꼴이 되어 결국 한방에 모두 죽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치관련 뉴스를 좀 보기 바란다. 그 모습이 원숭이들이 대장원숭이를 뽑고 그 대장원숭이가 원숭이다운 일을 하는 것에서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지금보다 더 강력하고 빠른 기술적 도구를 지닌다면 그것은 자살도구가 되고 마는거 아닐까? 산과 강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자체를 끝장내고 마는거 아닐까?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해일이 일어날 바닷가에 원자로를 건설하는 일이 원숭이 짓이 아닌가? 다음번에 그런 대형지진같은 놀랄만한 일이 또 하나 벌어지면 지구 반쪽이 날아가는 거 아닐까?

 

물론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그래서 인류는 단순히 미국대통령이 미치는 것정도로 당장 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란 것이 뭔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인공지능이고 기계다. 즉 문명이 발달하니까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권한을 기계에게 줄 수 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믿을 수 없어서 그렇다. 미래에는 재판도 대부분 기계가 하고 형식적으로 인간이 끝에서 결재만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판사들 판결이, 다시 말해 인간의 판단이 워낙 믿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흉내쟁이 원숭이다. 우리는 다만 적어도 가끔씩은 우리가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우선 스스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흉내쟁이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스포츠카를 몰고 거리로 나가는 초등학생과 같다. 그는 잘난척하지만 결국 여러 생명을 빼앗게 되거나 세상과 인간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이걸 생각한다면 삶은 단순화되고 속력은 줄여야 한다. 명성이나 재정적인 면에서 큰 성공을 바라는 욕심은 잊어야 한다. 그것들은 행복을 주지 못하고 대부분의 경우 행복을 빼앗는다. 우리의 삶이 한번 관성을 가지면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는게 아니라 우리 삶이 우리를 질질 끌고 가게 된다. 

 

사람들이 눈이 벌겋게 욕심으로 차있는 곳에는 어리석음만 가득하다. 욕심은 우리의 시야를 짧게 해서 우리를 짐승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이 유혹으로 가득 찬 것이 현대이지만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욕심을 조절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돈에 관해서 말해본다고 해도 욕심없는 사람들의 나라만이 부자로 살 수 있는 기묘한 세상이 요즘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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