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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과학에 대한 대중적 오해

by 격암(강국진) 2015. 12. 6.

15.12.6

최근에 읽은 피셔의 과학한다는 것도 그렇고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 같은 책도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풀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대중적 오해는 그 깊이가 깊어서 실로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착각하고 있으며 이중에는 마땅히 지적인 사람들이라고 취급되어야 할 인문 학자들이나 존경받을 만한 예술가들도 있다. 도킨스는 그래서 과학을 저질의 어떤 것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선전하려고 하는 과학 선전 프로그램같은 것을 많이 봤다면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비판한다. 

 

과학에 대한 오해가 뭔지를 말로 하기는 간단하고 쉽다. 그것은 과학을 인간의 일부, 인간적인 활동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대립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예술이나 철학은 과학과는 다른 것이며 통상 인간적인 활동으로 생각되어지는 것과는 반대다. 이때문에 인간이 배워야 할 진정한 가치있는 교양에는 과학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즉 과학은 그저 도구일 뿐 가치의 문제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과학을 위협적으로 느낀다. 그들은 대개 철학이나 예술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지만 과학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인간과 대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을 무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느낀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과학을 어떤 형태로 고정시켜 놓고 맹신한다. 따라서 그 고정된 과학이 철학이나 예술을 압살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무한한 확신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과학은 철학이나 예술과 구분되어 인간과 대립되는 존재로 생각되어서도 안된다. 누군가가 과학이 아닌 철학이 존재한다던가 예술이 아닌 과학 혹은 과학이 아닌 예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말들도 옳다. 과학은 철학이나 예술과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그 구분은 다분히 임시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른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것 뿐이다. 

 

과학이 아닌 철학이 존재한다는 말, 혹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측면이 존재한다는 말은 적어도 세가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적 의미에서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측면에서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이 아닌 철학은 존재한다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과학이 아닌 철학이란게 도대체 뭘까? 21세기의 과학이론과 수학은 이미 매우 추상적이다. 원자론이나 상대론 수준의 과학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나는 지금 탁자에 기대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느끼는 이 탁자가 실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론을 공부한 사람은 실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도 쩔쩔매게 된다. 원자는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있고 전자는 입자인지 파동인지 한쪽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게 내 팔을 받치고 있다. 실체가 뭔가? 그것에 대한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답은 뭔가?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해낸 혹은 어디선가 들은 자신들의 답을 늘어놓을 수 있다. 내가 실체가 뭔가라는 질문을 원자론의 문맥에서 물었기 때문에 나의 질문은 과학적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답들은 과학적 답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답들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기 전에 그 답은 이미 매우 전문적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저게 정말 과학일까 싶을 정도로 추상적으로 들릴 거라는 점이다. 통상 철학은 과학보다 더 원천적인 곳에 있는, 더욱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과학이 아닌 철학이 존재한다는 그 영역은 그 추상적 답들보다 더 추상적인 곳에 있다. 

 

모든 물리이론을 통일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되는 초끈이론을 설명하는 물리학자들을 보면 그들은 수학적 아름다움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아름다움이라. 이것은 과학인가 철학인가 예술인가? 이것이 과학이라면 이 과학의 바탕에 있는 더 추상적인 곳에 과학이 아닌 철학이 있을 것이다. 그게 어딜까?

 

내게 있어서 철학이란 과학이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 곳에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곳을 쳐다보는 행위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미 과학이 우리를 데려다 주는 곳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도 다 알지 못한다. 하물며 인간의 의식이나 생명에 대한 분자적 연구나 10억년전의 우주를 논할 때 우리의 일상언어가 가진 의미는 한없이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다지 멀리 쳐다보기 어렵다. 하이델베르그의 부분과 전체같은 책은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과학자들의 토론이 얼마나 철학적이었나를 잘 보여준다. 너무나 철학적이었기 때문에 사실 거기서 철학과 과학을 잘라서 사고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역사를 보면 그 역사는 또 달라보이게 된다. 과학과 철학이 애매했던 것은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적어도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지동설 같은 것은 양자론이나 상대론처럼 철학과 과학의 경계가 애매해 지는 추상적인 이론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고 분명 우리는 지구가 움직이는게 아니라 태양이 움직인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태양주위를 자전하는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때문에 정신적 혼란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것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불확실한 철학이었던 부분이 이제 과학이나 공학의 영역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인식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철로를 따라 달리는 기차의 맨 앞에서 한발 더 앞서 있는 부분을 기차앞 공간이라고 부를 때 기차앞 공간이 구체적으로 어디냐고 묻는 것은 역사적인 질문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원역을 지나칠 때는 기차앞 공간은 수원근처였겠지만 기차가 대전을 지나 칠때쯤에 수원은 이미 기차앞 공간이 아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언제나 기차앞 공간이라는 게 존재하겠지만 그것이 고정되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게다가 기차앞이 더 중요한 공간인지 기차가 더 중요한 공간인지 기차앞과 기차는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되지도 않는다. 기차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기차앞 공간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 불가능성이 기차를 가치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도 기괴하다. 이것은 인간을 과학과 분리하여 과학이 인간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과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는 인간에 도달하려고 할 수도 있다.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도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술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도달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제 직접적으로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과학이 뭔가를 생각해 보자. 쿤에 따르면 과학에는 정상과학이 있고 미스테리가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지금의 방법을 통해서 이 미스테리를 풀려고 노력한다. 만약 미스테리가 없다면 과학자들은 연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정상과학이 받아들여지고 있어도 세상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상과학을 통해 풀릴 수도 있고 실은 그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떤 정상과학하에서 백년을 풀었어도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정상과학이 꼭 틀려있다는 확고한 증거는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풀이능력이 유치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제는 그 정상과학을 깨고 새로운 과학을 받아들여야만 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문에 우리는 과학혁명을 위해서 비약이 필요하고 그런 비약이 성공하고 나면 정상과학은 새로운 과학에 의해 대체된다. 상대성이론이 그런 경우다. 빛의 속력이 어떤 관찰자에게도 같다라는 것을 아무도 고전물리학내에서 설명할 수없었을 때 상대성이론이 등장하고 고전물리학은 상대론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과학은 인간의 무지와 만나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점진적으로 때로는 비약적으로 이 경계선을 확장시킨다. 과학이 인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학을 무한한 확신과 동일시 하고 상상력을 억압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는 모든 것을 다 확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자는 인간의 무지를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크게 느낀다. 과학에 대한 불신자와 마친가지로 과학에 대한 맹신자도 과학자라고 할 수 없다. 과학자는 과학적 사실들이나 법칙들을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과학적 문제를 푸는 사람이다. 과학자는 열려있다. 다만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를 요구할 뿐이다. 진화론에 미진한 점이 있으니 6천년전에 하느님이 일주일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느낄 뿐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상대성이론의 오류를 찾았다면서 대학에 편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과학자들이 상대성이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맹신때문이 아니다. 비약을 위한 더 큰 증거를 기다릴 뿐이다. 

 

과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간의 뇌와 의식을 연구하고 있다. 그런 연구의 끝에서 미래의 과학은 지금의 우리를 지동설 이전의 인간들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과학자들은 그런 미래에 더욱 더 흥분하고 관심이 있다. 현재의 과학을 포기하고 더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 내는데 더 목말라 있는 것은 오히려 과학자들이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나는 한가지를 인정하고 넘어가야 겠다. 사실 과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글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식적이고 단조로운 일을 하면서 산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인간정신의 한계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 다른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조각가도 밥을 먹고 살아야 하고 준비작업을 위해 청소를 하고 도구를 챙기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예술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인 일도 해야 한다. 과학자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은 매우 인간적이다. 예술가가 느끼는 영감이나 철학자의 내적인 직관과 마찬가지로 무지의 벽 너머에 있는 것에 도달하려고 하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간이 무지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범위를 넓히려고 하는 것이지 인간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을 하는게 아니다. 과학자의 본질은 록가수나 소설가 혹은 철학자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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