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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당신의 스마트폰은 안녕하십니까.

by 격암(강국진) 2015. 11. 9.

15.11.9

몇천년전의 이집트에서도 나이 많은 세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문제라고 했다. 우리가 가끔 듣는 말이다. 이 말은 흔히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지만 별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기위해 인용된다. 사실 사람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살 수가 있으며 어떤 방식이 반드시 더 고상하거나 더 우수하거나 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 것은 적어도 주어진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에 대해 많은 전제를 깔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뭐가 좋은가 혹은 옳은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포기하고 나서도 우리는 최소한 두가지는 논할 수가 있다. 하나는 기술적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우리를 바꾸는가 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의 다양성이다. 이 두가지 주제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주제들이 환경이 우리를 바꾼다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언제나 진실이지만 거기에도 정도 문제가 있다. 우리가 완전히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있을 때 우리가 이게 우리 취향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을 잃는다. 예를 들어 그저 친구를 따라하고 있을 뿐인 어떤 사람이 이게 내 취향이야라고 말한다고 하자. 물론 그 사람의 의사도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 사람은 좀더 자신이 사는 방식에 대해 심사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주체성이 없을 때 자기취향이나 자기 선택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자기를 되돌아 봐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를 지킬 수가 있다. 

 

여기서 두가지 상황을 떠올려보자. 

 

1. 커피숍의 한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2.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학벌이 높은 사람 즉  많이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와 반대되는 사람으로 그다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두사람이 여가시간에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관찰한다. 그런데 아무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이 상황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나면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수준의 차이가 여가시간의 활용에 있어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으며 무엇보다 여가시간을 다르게 보내는 이유가 꼭 학벌 때문일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가지 상황은 한국에서 그리 드문일이 아니라고 나는 느낀다. 일단 상황 1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이런 예를 통해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대인들은 전자통신기구를 사용해서 소통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기본적 방법은 음성언어와 문자였다. 그런데 전자통신이 발달하면서 이것이 바뀐다. 

 

우리는 라디오에 중독되고 티브이에 중독되며 인터넷에 중독되고 핸드폰에 중독된다. 그리고 마침내 스마트폰 중독에 이르러서는 온갖 정보를 스마트폰에서 얻고 문자를 보내고 사진과 동영상을 주고 받으면서 산다. 이런 모든 것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의 오락이란 건 대부분 책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나마 책조차도 귀했고 글을 읽는 사람도 드물었던 조선시대쯤에는 사람들은 그저 무조건 모여서 잡담하고 서로의 등이라도 긁어주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정보를 얻고 재미를 얻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이미 세상은 전자통신의 시대로 깊숙히 들어온 197-80년대였지만 그래도 지금같지는 않았다. 텔레비전도 저녁에나 방송하는 것이었는데다가 집마다 하나정도니까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용컴퓨터도 아직 보급되지 못했다. 어떤 청소년들은 그래서 라디오에 중독되었고 청소년들은 그저 할일없이 몰려다니며 시간을 쓸 때가 많았다. 책을 읽기도 하지만 그마저 따분해 지면 그저 모이는 것이다. 모여도 딱히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말도 안되는 썰렁한 농담이나 주고 받는 것이지만 혼자인것보다는 재미있고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사람들은 불안할 때 흔히 중독에 빠지거나 그냥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요즘 사람들도 이유없이 모이는 경우는 많다. 그런데 모여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 나는 데이트를 하러가서도 각자 스마트폰만 본다면서 불평을 하는 커플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다리나 팔을 쓰지 않으면 팔다리가 퇴화하는 것처럼 현대인은 소통의 어떤 기관을 전처럼 쓰지 않는다. 책을 보는 것보다 영화나 드라마가 더 재미있고 쉽다. 그러다보니 문자와 대화에 약해진다. 어휘의 수가 줄어들고 이것은 말을 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 즐기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대화는 외계어처럼 단순해 지고 짧아진다. 긴 책은 커냥 긴 글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뻔한 말에 뻔한 반응만 주고 받는 것이다. 이래도 소통이 재미있어 질 수 있는 것은 요즘에는 스마트 폰따위에게 온갖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표정을 써서 소통을 하는 것보다 T.T이라고 문자를 타이핑하는 것이 훨씬 쉽다. 게다가 요즘에는 여러가지 이모티콘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아래와 같은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이런 이모티콘은 적절한 효과를 내도록 전문가가 만들어 낸 것이며 스마트폰으로 메신저 통신을 한다는 현대의 상황이 아니면 쓸수가 없는 소통의 도구다. 별거 아닌 것같지만 이런 소통의 방식은 인류최초의 것이며 인류가 이것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직접 얼굴을 마주 대고 적절한 효과를 내며 대화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말하자면 직접 대화보다 기계를 중간에 끼고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전자통신기기를 통한 소통이 점점 더 발달하고 그 효과가 커질수록 이런 일은 더 심해 질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스마트폰은 인간에게 융합되어 인간이 전과는 다른 기괴한 방식으로 소통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하고 있어서 뒤로 되돌릴 수 없어보이는 중독자의 경우도 보인다. 인간이 인간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 그리고 몸짓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는 낡은 방식은 어쩌면 점점 더 시대착오적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간에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끼어들지 않으면 너무나 낯선 방식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중에 고독육강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쟝쉰은 유교문화는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말이란 적을 수록 좋다는 것이다. 교언영색이라고 해서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은 나쁘다라고 유교문화는 가르친다. 한국도 유교문화적 전통때문인지 언어의 중요성을 덜 강조하는 것같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서양사람에 비해 한국 사람은 파티형 인간이 못된다는 말이다. 즉 대화의 즐거움, 대화의 기술을 평가절하한다. 이런 문화는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인간을 만든다. 왜냐면 기존 문화를 비평하는 말들을 모두 궤변이나 교언영색, 사문난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유교문화에 앞에서 말한 전자통신의 시대가 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중독현상은 더 심하지 않을까? 대화와 책은 훨씬 더 쉽게 포기되고 라디오, 티비, 컴퓨터, 스마트폰에 더 쉽게 중독되지 않을까? 가족들이 모여서 제대로 대화도 안한다면, 해도 즐겁지 않고 어색하기만하다면 가족들은 쉽게 그런 것으로 도피하지 않을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골프나 드라마 시청으로 도피하고 아이들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도피하여 각자 그것에 빠져드는 것이다. 

 

문제는 물론 스마트폰만의 문제도 아니고 메신저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대중화되는 시대의 목전에 있다. 어쩌면 100년후의 인간의 대화란 지금의 인간이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기계를 매체로 해서 두 인간이 인간의 언어가 아닌 기괴한 언어로 소통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시대의 인간은 현대의 인간같은 원시인들이 쓰는 목소리나 글쓰기 같은 방법을 쓰기에는 너무 그런 상황에 적응하여 살지 않을까? 요즘의 우리도 소위 손편지라고 말하는 손으로 쓴 긴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메신저와 이메일과 전화통화가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과거를 살아온 기성세대는 오늘날 좋아진 것도 있지만 그런 퇴화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것도 있다고 느낀다. 긴 편지를 쓰고 읽고 기다리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생략되었다. 설사 과거에 편지같은거 안 쓰던 사람이었다고 해도 세상은 달랐다. 요즘은 모든 반응이 즉각적이 되었다.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21세기 무대를 배경으로 하면 왠지 상상이 잘 안된다. 그래서 복고풍영화에서 시간을 몇십년전으로 돌리고 나서야 그런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영화 클래식이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가 그것이 아닌가?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뭐가 좋고 나쁜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더 나쁜 것인가 좋은가는 판단하지 말도록 하자. 현대인들도 18세기 사람이 보기에 이미 아주 기괴하게 살고 있다. 다만 우리는 최소한 매체가 우리를 이렇게 바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 비판적으로 느끼고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 어떤 존재가 되건 자기가 선택해서 그렇게 되야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변해서는 안된다. 

 

이제 두번째 주제인 다양성에 대해서 말해보자. 만약 옳고 그름에 절대적 기준은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과 각자의 과거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는 것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그리 다양한 삶을 목격하고 있질 못하다.

 

뭐가 삶의 다양성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정리가 필요하다. 물론 한국에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한국에는 다양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말하는 다양성은 가치관의 다양성 그리고 그 가치관의 다양성이 삶에 표현된 다양성이다. 

 

그런 다양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취미와 여가시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먹고 살아야 한다. 혹은 사회적 의무때문에 하기 싫은 일도 하고 산다. 그러나 뭘해도 좋은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월급이 나오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도 어떤 사람은 여가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과학책을 읽거나 연구를 한다. 글을 쓰고 암벽을 오르고 만화를 그리고 정원을 가꾼다. 그러다보면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일종의 매니아 문화가 생긴다. 나이들어서도 모여서 록음악을 듣는다던가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모임을 만든다던가 시를 짓고 서로에게 들려주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위에서 들었던 교육수준에 따른 여가시간의 차이의 예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가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제시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교육이란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가 시간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좋은 기준이라면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여가시간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결국 맛있는 거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부동산과 자동차와 아이들 교육이야기로 시간을 쓰는 것이 전부일 뿐이라면 한국의 교육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는 거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배운 사람들이 좋은 문화를 개발하고 그것이 확산되는 그런 현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없다면 책도 교육도 소용없다는 것이니 우리는 모두 무식한 야만인의 문화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억지로 외국 어디의 고상한 엘리트 문화를 한국의 지식인층이 흉내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들도 나쁜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좋은 문화를 수입하고 그것을 흉내내다보면 내적인 변화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외부는 내부의 표현이다. 한국에서 다양한 삶을 볼수 없다는 것, 그것이 비교적 여유롭고 배운 것이 많은 식자층에서도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이 배금주의에 그만큼 깊이 침식되어졌다는 뜻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취미로 하고 있다. 그리고 글쓰기를 하라고 권하는 편이다. 좋고 나쁜 글의 기준이 꼭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지는 않겠지만 내 기준으로 만족스러운 글을 쓰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은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그 안에서 가치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풍요로워질 수록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삶의 다양성이 충분한 것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이 더 재미있는 곳이 되면 좋겠다는 바램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세상을 재미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많다. 사는 방법에 대해 그리 고민도 깊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삶의 답은 이거 하나라고 단정짓는다. 단정만 짓는게 아니라 주변사람에게 강권한다. 유치원생부터 이 직업과 저 직업을 비교하면 누가 돈을 더 버니까 이 직업이 좋다고 말하는 나라는 정말 재미가 없다. 노벨상 말하면서 상금이 얼마냐를 따지고 누가 세계대회에서 1등했다고 하니까 경제효과가 얼마다 상금이 얼마다부터 이야기하는 나라는 정말 재미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세계란 그저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서 주가만 확인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세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싶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정말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인지 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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