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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미래상상, 영화 이후의 매체

by 격암(강국진) 2015. 10. 28.

15.10.28

얼마전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하나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미래를 상상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영화 이후의 매체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영상, 영화, 티브이에 익숙하지만 사실 영화는 착시를 이용한 매체로 그것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매우 신기한 것이었다. 영화이전에는 사진이 그랬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렸지만 사진술이라는 것이 등장하자 세상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인해 크게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누가 그린 그림보다도 더 정확한 그림을 아무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진과 영화로 끝일까? 미래에는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날까? 나타난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날까? 영화가 대중화되기전에도 세상에는 영화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 있었고 사진 이전에는 물론 그림이 있었다. 우리 곁에는 미래의 매체에 대응하는 뭔가가 이미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매체는 대단한 기술을 가진 사람만 하는 또 어떤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바꿀까?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개인적 호기심의 문제는 아니다. 매체란 체험을 전달하는 방법이고 그 방법에 변화가 오면 그것은 세상에 혁명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비로소 서로에게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새로운 매체의 이름이 아직 없기 때문에 그것을 나는 유령비행이라고 불렀다. 유령비행의 아주 기초적인 단계는 이미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것이다. 스트리트 뷰가 한 예다. 컴퓨터에서 지도를 켜고 스트리트 뷰를 실행시키면 우리는 어느 집앞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사진을360도로 찍었기 때문에 커서로 이쪽 저쪽 시각을 바꿀 수 있다. 이 사진은 자동차위에 커다란 카메라를 달고 달리면서 찍은 것이다. 

 

이것이 본격적인 유령비행이 되기 위해서는 기록되는 것이 정적인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 되어야 한다. 스트리트뷰가 아니라 스트리트 무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 자리에 서서 이리저리 시점을 바꿔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주변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마치 그 거리에 실시간으로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고개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리면 그에 따라 다른 방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음성도 들려야 한다. 

 

이것은 그저 가상현실체험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왜 그 이름을 쓰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부적인 차이가 좀 있지만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할 것이다. 나는 다만 가상현실체험의 진짜 의미는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가상현실이라는 이름대신 유령비행이라는 이름을 쓴다. 

 

일단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360도 영화로 기록하는 장비를 가지고 어떤 파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는 이 유령비행을 찍었다. 유령비행은 가상현실체험이기 때문에  나중에 그걸 보는 사람은 마치 유령처럼 그걸 찍은 사람을 쫒아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옆에 앉아있거나 나란히 걷는 것과 같다. 다만 아무도 나를 보지는 못한다. 그게 바로 유령비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영화와 유령비행의 차이는 간단하다. 유령비행에는 관점이 정해지지 않는다. 사진도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그걸 찍는 사람은 어떤 장면을 어떤 시각에서 보여줄까를 선택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이 우리가 사진작가니 영화예술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작품을 찍는 사람이 시각을 선택하는 것에 따라 결과물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몰입할때는 감독에게 속아서 종종 마치 그것이 그 사건을 보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고 하자.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 여주인공의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나오고 뭔가를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옆에 서있던 여자의 얼굴에 질투의 감정이 들어난다. 이런 것은 감독이 그렇게 보여주고 싶을때만 그렇게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체험을 감독의 시각을 통해서 변형시켜서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형은 오해를 만든다.

 

좋은 예는 작가다. 작가는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글을 쓰지 못하고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글에 의해 편견을 가지게 된다. 단어 선택하나가 바뀌면 이미지가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농민문학도 농부가 아닌 지식인에 의해 쓰여져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수 없는 편견을 만든다. 작가의 관점이 절대적이고 객관적 관점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것은 매체가 달라지면 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와 시나리오는 크게 다르다. 소설을 읽는 느낌은 영화로 실사화되면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영화속에서도 감독에 의해 결정되고 따라서 편견의 원인이 되며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관점이라는 것이다. 유령비행은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사람이 파티에 참석했다고 하자. 둘이 항상 붙어 있었다고 해도 그 두사람은 그 파티에 대해 반드시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대개 다르다. 그 둘은 서로가 생각하는 바와 관심에 따라 다른 방향을 주목하고 다른 감상을 가졌을 것이다. 같은 것을 영화로 본 사람은 감독의 관점에 따라서 그 사건을 보게 된다. 그러나 유령비행을 한 사람은 자기의 관점에 따라 그 사건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매체는 감독 혹은 제작자의 조건을 크게 완화시킨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듯이 누구나 유령비행의 기록기계를 들고 다니기만 하면 사건의 기록이 남는다. 가장 무식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도 유령비행을 찍을 수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체험될 수 있다. 관점을 만들어 내는 예술적 분석적 능력이 떨어져도 유령비행은 촬영될 수 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영화보다도 진짜 체험에 더 가깝다. 이것은 그림과 사진의 관계처럼 들리지 않는가? 누구나 영화감독보다 훌룡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는거 아닐까?

 

유령비행도 완전히 편견없는 체험을 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영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고 다른 재미를 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티브이는 체험프로그램으로 가득하다.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중의 하나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인데 이것은 그냥 몇명의 유명인들이 밥을 해먹는 것을 계속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가장 인기가 있다. 유령비행판 삼시세끼 프로그램이란 당신이 그들의 밥상옆에 유령으로 앉아서 참석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유령비행을 찍는다면 당신은 수없이 많은 일들에 유령으로서 참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와는 다르다.  유령비행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영화를 보기 힘들어 질 것이다. 답답하니까. 티비를 보는데 익숙한 사람은 라디오로 돌아가기 힘들다. 유령비행에서는 당신이 관점을 선택할 수가 있다. 그것에 일단 익숙해지고나면 영화를 보면 고정된 화면 바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냐고 답답해 할 것이다. 

 

유령비행은 글, 그림, 사진과 영화가 했던 것 즉 다른 매체들이 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한다. 바로 어떤 사람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한다. 다만 그것은 더욱 생생하게 그렇게 하게 할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나, 화가 사진작가나 감독만 하는게 아니라 어린애나 무식한 사람도  자신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오는 감동과 충격이 충분히 크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서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이런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런 미래는 우리의 코 앞에 있다고 믿는다. 가까운 장래에 구글 글라스 수준의 작은 기계를 착용하고 돌아다니면 누구나 유령비행을 촬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될수 있다. 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스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계속 여러번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시대의 바로 앞에 있는 것일 수 있다. 초등학교때의 생일파티나 운동회를 영구히 다시 체험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와는 또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래가 온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말할 기회가 없던 사람이 말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일들일 것이다. 그것은 미래사회를 바꿀거라고 믿는다.

%2022년에 이 글을 읽으니 저는 가상현실을 설명하고 있었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 예측이 맞은 셈이지만 가상현실이 아직도 대세가 되지 못하고 있으니 틀린 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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