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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노벨상으로 가는 길

by 격암(강국진) 2015. 10. 8.

15.10.8

또 노벨상의 시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왜 한국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런데 나는 한국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놀랍지 않을 뿐더러 어느정도는 누가 이 정도 시기에 노벨상을 받을까봐 걱정된다. 지금 누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해지고 한국의 학문적 발전에 해를 끼치기 딱좋을 것이다. 아직도 후진국 근성에 젖어있는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라는 이름에는 과도하게 부풀려진 권위가 붙어있다. 만약 수상자가 나오면 거기서 나오는 영향력을 이용해 먹고자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면 결국 우리는 그 정도 밖에 안된다. 그래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을 때 그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이 부자나라가 되고 싶다면 한국은 오히려 물질에 대해 잊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더 부자되는 것에 대해 잊어버리고 삶의 질에 대해 고민하고 문화가 풍부한 나라가 될때 한국은 부자나라가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 모두 부자됩시다같은 말이나 반복하고 있으면 한국은 지금 이상의 부자나라가 되지 못할 것이며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국이 노벨상을 타고 싶다면 노벨상같은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학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투자도 저절로 이뤄질 것이고 언젠가는 노벨상을 탈만한 업적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지극히 어렵다. 

 

과학자란 전문가다. 그리고 전문가는 특정 분야의 일에 오랜동안 매달리고 쌓아올린 사람이다. 설사 어떤 천재가 20대에 한 일이 엄청난 업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천재가 앞의 사람이 쌓아 올린 학문적 업적을 연결하여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부품을 조립해서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해도 애초에 부품들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그게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환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천재물리학자 뉴튼도 그래서 스스로를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는가. 

 

다시 전문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전문가란 한분야를 파고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그 사회가 안정적이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을때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뭔가를 하고 싶으면 그것을 수십년간 결과없이도 파고 들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만 가끔 가다가 엄청난 것을 발굴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전문가인 직장상사가 와서 이거해라 저거해라 왜 이런 것은 하지 않는가 하고 말하면 진짜 전문가가 나오기 어렵다. 특히 노벨상운운할 창조적인 전문가는 말이다. 

 

왜냐면 비전문가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어떤 분야를 바라보는데 엄청난 업적이란 패러다임을 깨는 것에서 대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지적해서 새로운 분야의 문을 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소위 세계적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은 돕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혁신적인 사람을 억압하기 쉽다. 

 

나는 언젠가 한 공무원과 나눴던 대화를 인상깊게 기억한다. 그분은 서울대의 한교수가 양자물리학 교과서를 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말하기를 양자물리학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교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화가 웃기는 것은 물리학에는 양자물리학 분야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대물리학에는 그렇다. 백년전쯤에 하이젠베르크나 보어가 양자물리학을 만들던 시절에는 양자물리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는 말이 의미를 가졌을지 모른다. 지금은 양자물리학은 이미 받아들여져서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소수의 학자들만이 양자물리학의 재해석을 가지고 고민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 공무원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그 서울대 교수님이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국은 지적인 사회가 아니고 그것은 특히 권력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그렇다. 솔직히 말해보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상당수가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부정부패로 협상을 해서 돈을 쌓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그런 사람들과 어떤 연줄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우리나라에 빌게이츠가 있는가? 나는 가장 지적인 대통령들을 노무현과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둘다 고졸이다. 한국 사회가 정말 지적인 인간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그런 인간을 길러내는 사회가 맞는가?

 

이 말은 인문학이나 과학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없는 사람이 학문의 미래를 주물러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도 사회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사회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해와 대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왜곡은 한정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런 대화도 기억한다. 정부에 연구비를 타쓰는데 시대가 바뀌면 키워드가 바뀐단다. 그래서 자기 연구를 무조건 그 키워드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키워드는 예를 들어 바이오나 그린이다. 이런 일들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의 대화도 안 통하는 사람들과 연구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학자들의 가슴은 썩어들어간지 오래다. 학자란 합리주의자일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성과 합리는 통하지 않는 영역에서 허우적 거리는 일, 정치나 선전같은 것에 휘둘리는 일은 그들에게 고통스럽다. 진짜 가치있는 시도에는 돈이 안들어가면서 4대강같은 것을 비전문가들이 결정해서 밀어부치고 돈이 낭비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치 않을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말하면 학자는 전문가라서 그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때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은 물론 그 사회가 전반적으로 학문의 가치를 인정하는 합리주의적인 사회일때 성장할 수 있다. 노벨상을 받는 나라들 즉 미국이니 일본이니 중국이니 하는 나라들은 나라가 아주 크거나 그 문화적 분위기가 다양성을 포용하는 데가 있는 나라다. 한국은 훨씬 작은 나라가 걸핏하면 담합으로 다양성이 죽어가게 만든다. 지금도 현정부는 북한정도나 그렇게 한다는 국사 국정교과서를 꼭 해야 한다고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현 국사학자의 80%가 좌파라고 말한다. 하는 짓을 보면 진정한 친북은 현정부인것 같다. 독재자의 자식이 정권을 잡은 것만 같은게 아니라 하는 짓도 비슷하다. 이러면서 왜 한국은 노벨상이 안나오냐고 묻는다.

 

우리는 세계최초로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만들었다. 페이스북의 선조격인 서비스도 한국에는 있었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말라죽는다. 그러면 이명박 같은 사람이 닌텐도 게임기를 들고 와서 한국에서는 왜 이런거 못만드냐고 질문한다. 한국은 왜 노벨상을 못받는가라는 질문은 참 자주 반복되는 질문이다. 나는 가끔씩은 그 질문에 화가 난다. 우선 합리주의가 통하는 사회가 되자.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자. 그러기 전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먼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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