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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1의 힘

by 격암(강국진) 2015. 10. 28.

15.10.28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해야 했던 것은 도량형의 통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사회의 기초에는 '1은 1이다'라는 것이 있다. 만약 인간이 그저 가족단위정도에서만 살아간다면 도량형의 통일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직접적인 대면과 체험의 공유를 통해서 그리고 원숭이 집단에 우두머리의 원숭이가 있듯 누군가가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아서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수백명이상의 사람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서 1인 것은 저기서도 1이다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들이 곰은 곰이고 사과하나는 사과하나로 인식을 해야 소통이 가능하고 물건을 주고 받는 것이 가능해 진다. 황제로서는 그래야 내가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은 1이다가 가능하지 않으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때로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 접촉했을 때 크나큰 적대감이 형성되는 예들에 부딪힌다. 그 적대감의 근원은 차별에 있고 다시 말해서 1은 1이다가 안되는 것에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10인 것이 유태인에게 1이 된다면 팔레스타인과 유태인은 하나의 사회를 이룩할 수가 없다. 부자에게 1인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0이라면 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통상 이런 저런 사회적 약속이 그 사회를 유지하는 구심력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1은 1이다라는 인식이 모두에게 있지 않으면 사회적 약속은 만들어 질 수 조차 없다.

 

이같은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런 사람들이 사물을 대충 본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1은 1이 아니다. 1.3도 1이고 0.9도 1이다. 왜 그렇게 대충이냐고 지적하면 우리는 사람이 융통성이 없다는 대꾸를 듣기 쉽다. 그들은 왜 1은 1이다라는 것에 사람들이 집착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통신호를 대충 대충보면서 길을 건너면서 대도시에서는 그것이 거대한 참사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골노인 같다.

 

큰 사회를 이뤄보지 못한 야생의 인간이라면 현대인들의 소유개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땅을 소유한다거나 돈의 형태로 소유가 영원한 것이 되어 한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적 재산권같은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해하기 어려움의 근원에는 1이 1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있다. 1은 문명의 기초다. 튼튼하지 못한 벽돌로 높은 빌딩을 쌓을 수가 없듯이 1이 얼마나 정확히 1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가에 따라 우리가 거대한 시스템을 건설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정된다. 땅의 소유라던가 지적재산권같은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런 추상의 개념은 사과나 소한마리를 소유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우리가 보다 쉽게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에서 1이 1이다라는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추상적 소유권은 더 많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은행이 없으면 사회는 망할 것이다. 우리는 신용기관이란 걸 통해서 막대한 가상의 부를 창출한다. 정부가 만원짜리 한장이라는 화폐를 만들면 그 화폐는 돌고 돌면서 그 몇배 몇십배의 신용가치로 변하게 된다. 옛날에는 정부조차 금을 쌓아 놓지 않으면 신용을 얻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정부가 만드는 돈자체가 추상적이다. 그리고 그 추상적인 가치는 신용기관을 통과하면서 훨씬 커진다. 

 

대학입학시험에 부정이 많으면 시험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학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게 되고 인재가 교육받고 전문가로 클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조선이 망할 때 먼저 망하기 시작한 것이 과거제도 였다. 엉터리기준이라도 기준이 있으면 인재들이 그 기준을 맞춰서 나라에 나아가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둘 망가지면 길이 없다.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한국도 요즘 사실 그렇다. 인재를 뽑는 기준을 다양화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기준은 현실적으로 그저 부자들이 자기 자식 좋은 대학보내려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1의 힘이라는 것도 무한대인 것은 아니다. 1이 아닌 것을 1로 강제하는데서 나오는 에러가 축적되어 문제가 만들어 진다. 사실 어느 하나의 사과도 같은 사과가 없고 어제의 사과와 오늘의 사과는 서로 다르다. 또 사랑은 1인가 3인가? 우리가 1은 1이라는 사실에 너무 집착하면 측정하기 어려운 것을 환상으로 무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약해지고 그러다가는 폭주한다. 그것은 1960년대의 서구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처럼 신비주의적이고 자유방임적인 록스타에 대한 열광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1이 꼭 1이어야 한다는것을 믿지 않아도 곤란하지만 그것으로 너무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면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돌이 금으로 바뀌고 금이 똥이 되고 마는 것이 일어난다. 정교한 언어로 법체계를 만드니 언어를 가지고 장난치는 법조인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실종된다. 자유의지는 무지와 불확실성의 산물이다. 즉 판단과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불확실성이 존재하니까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로보트와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무슨 윤리를 논하고 가치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지구가 로보트에 의해 채워지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면 로보트를 모두 폐기처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가난하거나 힘없는 사람들, 저교육층은 마치 산업폐기물처럼 치워없애야 하는 쓰레기로 인식될 수도 있다. 강이며 산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간단히 없애버릴 것이다. 천년된 나무 앞에서 50년을 산 포유류 동물이 그 가치는 백만원이라는 둥 1억이라는 둥하고 말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의 힘을 존중하면서 유한한 인간을 잊지 않는 중도적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1은 1이라는 것은 문명적 가치다. 우리는 그것에 깊은 존경을 표하면서 살되 그 힘이 무한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인간은 그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1이 아닌 것을 1로 쉽게 말하는 서투룸을 서둘러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계산이 종종 틀린다. 그리고 항상 계산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계산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탑위에 올라선 사람이 자기 발밑의 돌을 빼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 문명의 힘은 대부분 1은 1이라고 철저히 따르는데서 나온다. 그것에 의존하여 먹고 마시고 소비하면서 1은 1이다라는 사실을 대충 다루면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 우리는 절제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1은 1이다라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그 반대로 방종하게 살고 자만하면서 살면서 1은 1이 아니라라고 행동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위협이 된다. 상식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무너지면 고통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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