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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by 격암(강국진) 2017. 5. 25.

계속 낮아지기만 한 한국의 출산율은 이미 2015년에 1.23이었다. 그런데 올해 1분기에도 작년에 비해서 15%나 아이가 태어나는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벌써 15년째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돈을 투자했는데 오히려 출산율이 떨어지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는 방식에는 차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지나치게 사회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태도만을 유지하는 것은 문제라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된 출발점이다. 그런 관점은 일단 우리를 어느 정도 눈멀게 한다. 어느 정도는 바로 그런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문제의 원인을 이룬다. 싸구려 논리에 중독되어 인간이기를 중단한 것이 원인인데 계속 그 원인을 싸구려 계산에서 찾으면 답이 나올리가 없다. 인간은 악셀을 밟으면 앞으로 나가는 자동차가 아니다. 인간은 밥을 한끼먹으면 정해진 양의 행복을 느끼는 기계가 아니다. 이러저러한 객관적 조건이 부실해서 애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분석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말하자면 실존주의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으로 회복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한국 사회의 미래 운운하기 이전에 우리 하나 하나가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인간답게 사는 정상적인 삶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출발하지 못할 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를 바람직한 미래로 데려다 줄 수 없을 것이다. 


낮은 출산율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왜곡할 정도로 이상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천천히 곱씹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며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싶어하고 무엇보다 가족을 이루고 싶어한다. 인간에게 그런 본능이 없었다면 예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날개로 하늘을 나는 동물은 인간일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낮은 출산율을 보여주는 동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그럴  가치가 정말 있는 것일까? 인간이기를 포기해도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기를 포기해도 정말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이를 낳는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수치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가 훨씬 더 증명하기 쉽다. 사실 부모가 되기는 커녕 섹스도 논리적으로는 미친 짓이다. 왜냐면 힘든 일이니까 그렇다. 결혼은 커녕 연애나 섹스의 파트너를 구한다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큰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고민하는가. 그러므로 이성간의 사랑이 곧 섹스이며 삶이 곧 쾌락이라고 생각한다면 점점 더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고 그 만큼 더 쾌락에 중독되는 이 시대에 진짜 섹스도 결혼도 그리고 아이를 낳는 일도 모두 그만두는 것이 논리적인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섹스가 없는 부부, 결혼이나 연애를 하지 않는 젊은이는 미래가 아니다. 현재다. 


우리가 비인간화되는 것은 물론 종종 가난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가난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가 우리를 더 비인간화하며 기술적으로 더 발달한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기술적 발전이 우리에게 매우 값싸고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얻을 수 있는 성적인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쾌락을 쉽게 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연애나 결혼이라는 것이 성립할까 하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우리의 가치관은 상상할 수 없는 속력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알콜 중독자나 도박중독자가 그런 중독에 빠지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이나 선택을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그리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몇십년전만해도 문화적인 이유도 있지만 주로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소위 성인물은 조잡했다. 영화에서 키쓰씬만 나와도 화제가 되던 그 시대에 음성적으로 돌아다니는 누드 사진이며 포르노물은 사실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에서 무한정의 성인물을 쉽게 구하고 있으며 VR 포르노물까지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꼭 성인물만 이런 문제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연애인들은 여러가지 컨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그들과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환각을 만들어 낸다. 유명 여배우나 가수가 그 속에서 애인에게나 보낼 법한 달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은 이런 환각을 만드는 초보적인 예에 불과하다. 


또한 결혼이나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두 사람이 만나서 드라마 속의 연애를 재현하는 것에만 열중한다면 그것은 어느정도 진짜 연애이기보다는 마치 두 배우가 만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을 한번하는 것에 더 가깝다. 진심따위는 이미 상관없다. 그들은 무슨 무슨 척을 하고 거기서 기쁨을 누릴 뿐이다. 하지만 이런 흉내는 결국에는 실패하는데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연애나 결혼은 결국 가사노동의 어려움이나 육아의 어려움, 생활에 있어서 중대한 결정을 하는 문제들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판타지 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또한 자신의 감정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기 시작한 지점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사이버 공간이나 텔레비전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땅위에서 산다. 그런데 땅위를 걷고 있어도 이미 문화 컨텐츠의 재생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는 땅위에 사는게 아니라 추상적인 문화물 속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여주인공이 인기드라마 도깨비의 남자주인공과 걸었던 길을 다른 남자와 똑같이 걷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되도록 똑같은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을 여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에만 빠져있다면 말이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이제 마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과 같아진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떤 사람들과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는데 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어떤 막장드라마의 대사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도 정확히 그 막장드라마의 주제와 같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지금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일까?


결국 삶의 추상화, 비인간화가 진행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도 우리는 마치 미디어를 시청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고 만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은 앞에서 말한 것과 판타지의 문제를 가진다. 그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균형이 망가져 있으며 결국 세부사항을 무시하고 만들어낸 판타지에 불과하므로 현실에서는 반복적으로 붕괴하고 만다. 결혼은 깨어지고 가족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극단적인 분쟁이 일어나고 돈과 기회는 낭비된다. 그리고 물론 고통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단순화된 판타지에 매몰된 사람은 악순환에서 대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도박에 모든 것을 잃고도 다음번 배팅에서는 대박이 터져서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심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출산율에 대한 한가지 대책은 책읽기나 글쓰기 혹은 혼자 산책을 하는 일을 권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자기 찾기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물론 물질이 부족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또한 상당부분 스스로 혹은 집단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재벌3세의 야망과 사랑이 나오는 드라마에 빠지거나 007영화에 빠져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부질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불만에 가득차기 마련이다. 내 배우자나 아이를 어떤 틀속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이 나는 뭘 할 수 있고, 나는 뭘 기대해야 하는가를 바꾼다.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야구선수의 경기를 부러워하는 식이 되어서는 답이 없다. 내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책읽기나 글쓰기 혹은 혼자서 산책하는 일이다. 


저출산에 대한 또다른 대책은 보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보급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때로 큰 돈을 벌거나 유명인이 되거나 역사적인 업적을 남기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노력의 문제라고만 강조하지만 실은 그것은 또한 상당 부분이 로또당첨같은 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은자는 성공하기 어렵지만 운없는 사람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대통령도 무슨 스파이나 재벌도 되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된다. 가족과 가끔 맛집을 찾거나 예쁜 수목원을 찾고 여름에는 세계적인 리조트에는 못가더라도 인근의 계곡에 가서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사람과 만나고 살기 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이웃이며 친척을 만나고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살 것이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즐기며 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지금 한국에는 출세지향적인 메세지가 너무 가득해서 이런 관점을 거의 범죄시하는 면이 있다. 구도의 삶이나 어떤 높은 가치를 위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쾌락과 소유를 성공의 잣대로 삼으면서 말이다. 이것은 결국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실패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적어도 아직은 성공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아직도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를 비인간화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기를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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