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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과업

by 격암(강국진) 2017. 5. 14.

한국사회가 처한 어려움의 원인은 여러가지이고 그것에 대한 처방도 여러가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으며, 한순간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동체 의식의 정립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오해받고 있다.  아마 내가 공동체 의식의 정립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공공의식을 높여서 길에 쓰레기 덜 버리는 것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 차원에서 좋은 사람되기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상적 헤게모니의 문제다. 


내가 말하는 공동체 의식의 정립이란 다른 표현들로는 국가 정체성 정립이며 상식의 정립이고 국민통합이다. 한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각하는 때는 와서도 안되고 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축구를 하려면 축구의 규칙을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듯이 하나의 사회공동체로서 제대로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우리 사회 내부에서 통하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규칙을 이해하고 알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소수파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지만 대다수 사람에게 상식으로 통하는 사상적 몸통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윤리적이고 법적인 규칙이란 게 모두 성문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똑같은 이유로 해서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정의 될 수 있는 것도, 그냥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헌법을 가지고 공화국을 세운다고 해도 그 나라가 무조건 잘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법을 지키지도 않는데다가 그 법의 해석도 매우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여성의 손을 잡는 것에는 비교적 관대하지만 그 여성을 강간하는 것에는 매우 분노한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문제는 우리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 보편성에만 기대어 정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론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설사 이론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시민들이 그런 복잡한 논리적 이유들을 모두 이해하고 외워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 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결국 그것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시민들의 공감대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어떤 행위는 그것이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다수의 사람들의 가치관에 비추어 매우 용서하기 어려운 범죄로 생각되기 때문에 매우 비윤리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뭘 믿고, 뭘 당연하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내가 이렇게 상대론적인 윤리관을 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윤리가 결정되어 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의 핵심적 문제점은 그런 태도가 우리의 주인의식을 말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미래는 어떤 이유로 해서 이러저러하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도 어떤 외적인 이유로 해서 지금처럼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언론들이나 지식인들의 주인의식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정부나 어떤 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인의식을 가지고 즉 그것을 내 일로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때 지식인이나 언론의 비판이란 무의미해 진다. 그런데 주인의식이 있는 비판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시험에서 95점 맞아온 학생에게 왜 백점을 맞지 못하냐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꼭 지금이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아주 많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를 정부나 제도비판에 그대로 확장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정부나 사회전체를 한 개인을 만나는 것처럼 친근하고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혹은 우리의 부하직원에게 왜 백점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대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잘 알고, 우리의 부하직원을 아주 잘 아는 경우는 때로 그렇게 채찍질 해주는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부모나 상사의 무한한 애정을 믿는 사람은 나는 네가 백점을 맞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는 말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차원에서는 상호간의 믿음과 이해가 매우 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이나 작은 집단에서 통하는 태도를 사회적 문제를 논할 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 우리는 결코 남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모두가 부모 자식처럼 믿고 이해하는 단계에 까지 이를 수 없다. 부모도 자식 사정을 다 모르는데 하물며 보통의 시민이 정부나 사회 전체를 보면서 내가 남들 사정 다 알고 있다고 자신 만만한 것은 과대망상이다. 반대로 정부가 시민 모두의 사정을 왜 부모자식처럼 다 이해 못해주냐고 원망하는 것도 지나친 기대다. 


그러므로 이것이 내 과업이기도 하다는 주인의식없이 그저 다른 사람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이 곧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태도를 취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 괴롭히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구한 이순신같은 장수에게 왜 좀 더 못했냐고 비판하는 일이 되기 쉽고 종국에는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만 하게 만든다. 

 

결국 주인의식없는 비판이란 오늘날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반대할만한 무한경쟁의 논리를 사회 모든 곳에 퍼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변명거리가 있다.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을 위기에 처하게 한 박근혜와 최순실도 자기 변명거리는 있다. 그러니 힘들다고 말하거나 어렵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저 성역없는 비판, 가열찬 비판, 주인의식없는 무한대의 비판이 좋은 세상 만든다는 논리는 허구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무한대의 시장경쟁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구시대적인 자유시장의 논리와 같다. 이 논리를 그렇게도 부정하는 진보세력이 이 논리에 쉽게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희극적이기 까지 하다. 


그런 논리는 이미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요즘 세상에서는 어디나 노동자를 보호하고 회사를 보호하고 지나친 경쟁을 제한하는 법이 있다. 무제한적인 경쟁이란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것이라 쿠데타나 사기도 무제한의 경쟁속에서는 허용되는 것이다.  그런 경쟁이 궁극적으로 어떤 이득을 가져오든 그런 때가 오기전에 모두가 경쟁으로 죽어버리고 만다면 좋은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즘은 어느 나라나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진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인의식 있는 비판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며 어떤 개인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축구를 하려면 축구의 규칙이라는게 있어야한다. 그러니까 축구의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지금 축구를 하고 있다는 의식 그리고 그 게임의 법칙이 뭔가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의식과 이해가 없다면 주인의식을 가진 행동이란 불가능하다. 지금 야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지금 사실 우리는 축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런 개인의 책임있는 행동은 가장 몰상식한 행동이 되고 만다. 말 그대로 야구라는 게임의 입장에서는 축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은 상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우리는 지금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혼돈속에서는 주인의식있고 책임감 있는 행동이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한국의 문제는 대부분 역사적 혼란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고 그때문에 사회의 몸통이 될만한 상식이 망가져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소수의 탐욕스러운 악당과 바보들이 만드는 문제도 문제지만 나라가 자꾸 갈라지고 민감하게 분열한다. 그 안에서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다. 역사교과서 논쟁이 벌어지고 지금이 왕조인지 공화국인지를 혼동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박근혜의 탄핵과 더불어 한국에는 아주 중요한 일이 한가지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몸통을 이루는 상식적 중도 집단이라고 스스로 자평하는 세력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 집단은 흔히 산업화세력이라고도 부르며 그 핵심에 박정희를 상징적 인물로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수없이 많은 비극은 이 산업화 세력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람들이 매우 몰상식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이 글의 문맥에서는 그 산업화세력이 정말로 몰상식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논하는 것은 핵심적이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21세기 한국의 상식적 시민세력의 자리를 차지할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그 세력이 정말 한국의 몸통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대답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것을 박근혜 정권은 보여주었다. 그들의 부정부패는 심지어 박근혜를 지지한 사람들에게조차 몰상식한 것이었고 따라서 다수의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에는 여전히 박사모가 있고, 홍준표를 지지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세대들이며 그 숫자도 이제는 과연 그들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을까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하게 만든다. 산업화세력이 한국에서 오랜간 큰 권력을 누려왔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다음 대선무렵이면 더더욱 약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10년후면 어떨까?


지금 한국은 큰 사상적 공백이 생겨났다. 이것은 기회이자 위기다. 이후로 한국에서 어떤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잡는가에 따라 한국의 미래는 엄청나게 바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사상적 공백속에서 생겨나는 논쟁이 불러올 혼돈이 큰 비극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만약 혼돈만이 계속되어진다면 저열한 독재사상이 부활하거나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등의 외세에 전적으로 기대려고 하는 사람들이 번성할 것이다. 


조선은 이러다가 망했다. 10년간의 민주정권이 망하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재창출된 것도 뒤돌아보면 결국 대안적 사상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참여정부가 틀리다고 외치는 것에만 몰두했고 거기에는 산업화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과 진보언론도 있었다. 심지어 민주화 세력으로 말해지는 민주당도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노무현이 싫다고 이명박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꼴이 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겪고 나서 우리는 이제 다시 민주정부를 세웠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도 나라가 혼란속에 빠지면 다음 기회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좋은 말을 알고 있고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인의식이 없는 비판을 하거나 자신의 힘에 대해 과대망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우리의 상식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지식이라고만 생각한다. 어떤 제도나 아이디어 하나가 이 나라를 완전히 바꿀거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새로운 공감대로 이어진 시민집단이 한국의 확고한 몸통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촛불로 광장을 채운 시민들을 가지고 있다. 그 수없이 많은 시민들은 나는 그저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 어떤 사상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말도 맞고 그게 바로 가장 큰 사상투쟁이라고 말하는 내 말도 맞다. 폭력투쟁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제시키고, 쓰레기를 줍고 경찰에게도 마실 것을 가져다 준 사람들의 상식적 행동들이 모두 사상 투쟁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그런 행동들도 친북적이고 좌파적이고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즉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에서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식들이 모여 나는 무슨 사상을 믿는 게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들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고 우리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서 티격태격하는 일도 있지만 크게 보면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오는 날. 그게 바로 공동체 정신이 정립되는 날이며 국민통합이 되는 날이다. 그때가 한국이 진짜로 살기 좋아지는 날이다. 그 날을 위해서 이 땅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노력도 꼭 필요하다. 그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상식의 집을 한블럭 한블럭 쌓아올리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블럭들이 새로운 한국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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