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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과 감수성

by 격암(강국진) 2017. 5. 3.

매사가 그렇지만 대통령선거같은 행사앞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그 질문이 이 대선은 누가 이길 것인가라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렇게 이해하고 느끼게 되는 일이 워낙 많은 것같다. 지금도 이런 지적에 대해 당장 비현실적이다 운운하면서 대선은 누가 대선을 이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것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대선은 누가 이길 것인가라는 질문이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도 조금 다른 질문들을 던지게 되고 종종 그 조금 다른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만약 대선이 누가 이길 것인가에만 대한 것이라면 60% 국민의 지지만 있다면 40% 국민이 뭘 원하는 가는 상관없어질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어떤 후보는 적극적으로 내가 저 40%에게서 돈과 에너지와 피와 땀을 짜내서 60%의 국민을 배불리게 만들테니 나를 찍어주시요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대선이란 곧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기 위한 행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게 정말 당연한 일이고 그저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일까?


소수자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은 결코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는 당연히 희생시킨다라는 원칙이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것을 원칙으로 삼으면 소수의 특권계층을 제외한 모두가 희생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대개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는 소수다. 우리가 게이나 장애인이나 외국인이 아니라고 해서 소수가 아닌게 아니다. 사실 교육, 직업, 생활장소에서 무엇보다 사상에 이르는 여러가지 주제들에 있어서 모두가 다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은 오히려 극히 드문 소수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선거에서는 표의 숫자가 중요해 지지만 다수와 소수로 나눠서 소수를 희생시킨다는 원칙이 통과되면 세력이 큰 쪽이 세력이 약한 쪽을 먹어버리는 약육강식이 당연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니까 인구와 돈이 많은 수도권을 위해서는 지방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같은 논리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재벌을 키우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들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통하게 되고, 개발을 위해서는 그 지역의 원주민들이 희생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이 되기 쉽다. 그러다가 외국자본이 한반도를 개발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을 몰아내버려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오면 도대체 어쩔 셈인가?


이 같은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대선이 단순히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악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를 외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현실을 모른다 운운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 사회를 좋게 만드는 세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누구도 티끌하나 없이 깨끗할 수는 없다. 후보 개인의 통제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선거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정치인이나 후보는 좋은 후보가 아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서 당선되려고 하는 사람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나라가 망가지던 말던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하겠는가. 그런 유혹에 잘 넘어가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또 어떤 것을 정당화할까? 그래서 목표보다는 수단이 훨씬 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다. 


대선이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감수성이다. 대선은 권력으로 결정나지 않는다. 21세기 한국에서 권력으로 정권이 들어서지는 않는다. 권력이상으로 대선은 감수성에 대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는 나같은 사람은 그 난리를 겪고도 그런 정권을 창출한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각 후보에게는 각자 나름의 감수성이 있고 모든 유권자들은 나름의 감수성이 있어서 그 감수성이 서로 맞아 들어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냥 각 후보에게는 지지층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후보와 지지자들의 감수성이 맞아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어떤 후보에게 지지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볼트에는 너트가 있고 개에는 개의 무리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확실히 정해진, 논리적이고 사실에 기반한 어떤 연결고리가 후보와 지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착각을 준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특히 대선같은 큰 선거에서 대중은 후보와 아주 추상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이상으로 이미지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 것은 과학의 세계가 아니라 문학과 사상과 예술의 세계에 더 가깝다. 


많은 사람들이 대선 토론회에서 심상정이나 유승민이 제일 토론을 잘한다고 말한다. 그런 평가는 주관적인 것이지만 설사 그런 평가가 옳다고 해도 심상정이나 유승민이 지지율을 높이지 못하고 누가 봐도 거의 참사 수준의 토론을 하는 홍준표가 유력 후보로 떠오르는 현실은 정치가 단순히 사실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실 유승민이나 심상정이 홍준표보다 아는게 많다거나 토론을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다면 전국 토론 대회를 열면 유승민이 1등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확실히 어림도 없다. 아니 아예 외국인을 데려다가 대통령은 왜 안시키나. 그 사람이 토론 더 잘할 수도 있는데. 이런 지적이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왜 대통령 출마자격에 국적을 따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는 책임과 신뢰의 문제다. 가장 많은 것을 알고 가장 논리적인 인공지능 토론 기계가 나온다고 해도 인간은 그 인공지능에게 투표해서 인공지능이 대통령이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자기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지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의 감성을 정말 똑같이 느낄 것인가, 특히 유권자를 소중히 여길 것인가에 대해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논리와 사실로 선거에 이기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의 선거는 결국 공식적이고 논리적인 현대 사회 아래에서 억압되어진 사람이 다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법에 따라서 살면 왠지 손해만 보는 것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수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시스템을 다 갈아 엎어버릴 것같은 트럼프를 선택한 것이다. 트럼프의 막말은 그의 지지자들이 현실 시스템에게 느끼는 억압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으로 트럼프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결론을 낸게 아니라는 말이다. 


일단 대선이 감수성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나서 나는 대선은 이 감수성의 통합을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성향을 진보와 보수라는 1차원적인 축위에서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면 편의상 그렇게 한다고 해보자. 그러니까 극우가 있고 중도보수가 있고 중도 진보도 있는가 하면 극좌파도 있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중도적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보수를 붙이건 진보를 붙이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비판하지만 또한 그들의 왼쪽에 있는 사람들도 싫어한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는 2분법적인 진영싸움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소위 우리진영 안에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내가 지지하는 어떤 중도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이해가 안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당신이 중도적 좌파라고 하자. 당신은 중도적 우파나 극우들이 중도적 좌파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실과 논리가 중도적 좌파후보의 뛰어남을 증명해 주고 있는 데 말이다. 그런데 그럴 때 우리는 극좌파를 보면서 나는 왜 저 극좌파를 지지하지 않을까를 질문해야 한다. 그건 단순하게 말하면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 저 사람들 무책임한 사기꾼들 아니던가? 아. 그런데 이 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같다. 우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우리도 그 사람들과 그리 많이 틀리지는 않은 것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서로 의심하는 것이다. 이 불신을 깨지 않으면 대선은 앞에서 말한대로 다수의 횡포에 대한 것이 되기 쉽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라를 운영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저 불운이었다던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이명박을 겪고도 박근혜를 뽑는 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경험이 좋은 후보를 뽑는데 도움이 된다라는 것은 그리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후보를 뽑는다. 이 믿음은 아주 약간의 사실위에 거대한 문화적 정신적 감수성이 지은 건물같은 것이다. 사실은 대선에서 작은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자기가 쓴 교육비 내역을 나열하면서 내가 너에게 못해준게 뭐가 있냐고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숫자에 매달리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 도대체 왜 그들은 우리를 믿지 않을까하는 질문에 매달려야 한다. 물론 이번 대선은 워낙 기간도 짧고 다 끝난 마당이니 이런 일을 새삼 더 하기는 늦었지만 정치나 대선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국민 다수가 자신이 잊혀지지는 않았으며 자신의 존재가 사회의 시선아래에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무시당해서 잊혀지고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만큼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숫자 싸움이 선거의 핵심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고 지금 대선처럼 짧은 대선에서는 감수성의 확장과 통합은 커녕 더 확고하게 불신을 키워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후보도 몇명 있다.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후보의 행보를 보면 이 후보는 아예 감수성 따위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다. 그냥 자기가 옳으니 자기 말대로 하고 모두가 싸움을 멈춰라는 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그냥 유치한 애들싸움으로 파악하는 것같다. 설사 미국같은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국의 그것보다 더 고도로 발달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없이 어떻게 질서가 서겠는가. 그것은 마치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애정도 없어도 그 국가는 잘 돌아간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핵심은 애정이고 관심이고 자부심이다. 


대선은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려고 하는 후보가 당선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후보가 짧은 대선에서 하지 못했던 감수성의 확장과 통합이라는 문제를 계속 추진해 주었으면 한다. 물론 유권자들도 자신만의 불신의 늪에 빠져있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길로 스스로 나와야 할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므로 무한한 신뢰라는 것은 허상이기는 하다. 감수성의 완전한 확장과 통합이란 우리가 이뤄나가야 하는 목표이지 언젠가는 달성되어져 끝나는 그런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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