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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이라는 감옥

한국이라는 감옥 4 : 고립된 국토

by 격암(강국진) 2018. 2. 8.

제가 했었던 여행들중에서 저는 차를 몰고 오래 동안 달린 여행들을 잊지 못합니다예를 들어 번은 미국의 뉴올리언즈에서 뉴욕까지  차를 빌려서 편도로 구불구불 달린 일이 있었고 한번은 일본의 사이타마에서 북해도까지 차로 왕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둘다 거리로 따지면 3천킬로미터쯤 되는 여행이었죠. 저는 여행들이 좋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게 뭐가 좋냐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일주일씩 차를 달리면서 세상의 넓음을 느끼는 일이 좋았습니다. 물론 미리 정한 일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고속도로를 전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한적한 국도를 달리다가 좋네하고 들어가서 구경하는 그런 여행이 저는 좋았습니다. 달려도 달려도 시선이 머무는 길의 너머에는 내가 모르는 또다른 지역과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일은 상쾌한 체험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이 섬이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게다가 그 안쪽도 상당히 균질한 문화를 가진 땅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차라리 북한지역이 바다였다면 우리는 훨씬 자유롭게 주변국가와 소통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통일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지금의 중국처럼만 북한과 자유왕래하면서 사는 날이 와서 북한을 거쳐서 만주로 러시아로 차를 달리는 시절이 온다면 우리는 그제서야 고립된 국토가 상상이상으로 벽이 높은 감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원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종종 차를 달려서 북한을 통과하여 중국이나 러시아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게 아니라 말이죠참고로 말하면 차로 북한을 거쳐서 북경까지 왕복하는 것이 3km 됩니다. 





제가 한국이 고립된 국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한국이 작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나라가 크다면 다양성의 문제는 어느 정도 저절로 해소되겠지만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죠. 세상 나라들이 모두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국토가 거대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걸 부러워 한다는 것은 애초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재벌총수가 아니었나같은 식의 투정에 불과합니다. 보기나름에 따라서는 우리땅도 넓습니다. 못믿겠다면 자기 동네를 걸어보십시요. 자기 동네의 지도를 펼쳐서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요. 자기가 얼마나 자기동네를 모르고 있었는지, 우리동네가 얼마나 넓은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고속도로를 차로 달릴때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제가 한국이 고립된 국토라고 말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 우리는 한국의 바깥과 멀고 그래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한국이 세상인줄 아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이 뭔지, 질문에 대한 정답이 뭔지를 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성공해야 하는지, 무엇이 성공한 삶인지, 우리가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지나치게 쉽게 정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소수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세상이 다수파의 의견대로 균일해지는 것을 지나치게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어쩌면 어느 나라사람보다도 가장 계몽주의적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정답이다 싶으면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그걸 퍼뜨리지 못해 야단입니다다들 화장하는 것이 유행이면 화장안한 사람한테는 이게 뭐냐고 성화고 대개  나이에는 결혼한다고 하면 결혼 안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자신이 일단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이 성공한 인생으로 가는 보증수표라고 믿으면 우리는 능력이 되면서도 서울대 안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질 못합니다이런게 싫어서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매사에 비교하고 평가하면서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 말을 듣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투기도 쉽게 일어납니다. 부동산투기도 투기지만 교육투기도 투기입니다. 어딘가에 새로운 학교가 생긴다더라, 거기가 좋다더라 싶으면 검증도 안된 학교에 너도 나도 뛰어듭니다. 열풍을 거부하고 다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국제중학교가 열풍이면 국제중학교로, 외국어 고등학교가 열풍이면 외고로 유학이 열풍이면 유학으로 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점은 좋게 발현될 때도 있습니다. 객관적 진리에 열정적이니까 정치참여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평등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이 나쁘게 발현되면 우리의 시야는 제한되고 다양성은 죽게 됩니다. 다수파가 소수파를 착취하고 가진 자들이 못가진 자를 착취하게 됩니다. 


기득권은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토론이건 선거건 취업이건 재판이건 공정하게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칙도 하고 그 이전에 규칙자체를 그때 그때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꿉니다. 그런데 정답이 하나라고 생각하고 경쟁에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면 결국 기득권마음대로, 주류마음대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겁니다. 서울에서 좋은게 전주에서도 좋은 겁니다. 요즘 유행이 그린이면  그린이어야 하고 요즘 유행이 바이오면 바이오여야 하며 요즘 유행이 인공지능이면 인공지능이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소수파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겉치례뿐인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의무만 가지게됩니다. 이건 독재적 문화이며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여유를 주지 않는 문화입니다.  


이것은 상당부분 한국이라는 지역을  세상으로 파악한다면 세상이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계산이 척척 나오는 것같은 것이죠.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유행가에 나오는 말처럼 바다가 육지라면 어떨까요한국주변에 바다가 없어서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그냥 땅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캐나다나 멕시코와 연결된 것처럼 말이죠. 독일이 프랑스며 벨기에며 스위스며 네덜란드며 폴란드와 연결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국경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에서도 1988 여행자유화이래 외국 여행은 자유로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바다가 육지인 상황과는 크게 다를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만 넘으면 선너머에는 우리와 다른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중국사람이나 러시아 사람들중 이런 이름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현대차가 최고라고요? 중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일본인들은 현대차를 사고 자국차만 살까요


바다가 육지가 아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세계로 여행을 나가며 그것도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만 여행이나 유명지 관광은 진짜 소통이 되는데 있어서 나름의 한계와 왜곡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해서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유명 관광지 둘러보고 간다고 해서 사람들이 정말 한국인의 삶에 대해 뭔가를 이해하고 간게 맞을까요? 심지어 옷이나 음식조차도 현지인들에게 인기있는 것과 관광지에서 파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여행가서 취업이나 육아나 정치에 대해 느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외국과의 경계로 둘러싸여 있다면 우리는 국경너머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거대한 무지를 지속적으로 느끼며 살게 것입니다. 강너머에는 우리와 전혀 다르게 사는 외국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것입니다. 누가 엘리트이고 누가 인재이며 누가 사회적 승자가 되어야 하는지가 지극히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소위 관행이라는 것이 전혀 당연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생생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감옥에 갇힌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국 여성분은 외국에 삽니다. 그분이 하루는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자신은 반드시 외국인과 결혼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만약 한국남자들이 자기를 조금만 매력적으로 느꼈다면 자신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당연히 나라마다 미의 관점도 다릅니다. 그리고 미남과 추남의 간격은 상상이상으로 좁습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같은 곳에 나오는 동양인 남자나 여성은 우리가 보기에는 매력이 그다지 없어보이고 한국에서 최고의 미남미녀로 불리는 사람들이 외국인의 눈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행하는 외모에 너무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같습니다. 아니 외모 자체에 너무 집중할 때도 많아 보입니다. 


사실 외부와의 접촉은 기회이면서 위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내적 역량이 부족할 지나친 접촉이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우리 사회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의 비극은 미국과 국경을 마주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놀랍도록 고립되어져 있는 나라입니다. 적어도 오천만명이 다양하게 행복하게 있을 정도의 다양성과 창의력을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고립되어보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지킬 힘도 있습니다. 가난한 최빈국가가 아닙니다. 연공서열에 대해말하면서 인터넷을 언급했지만 인터넷 기술은 이런 면에서 다시한번 한국에 축복이었습니다. 지금은 뉴욕타임즈가 이런 저런 말을 했다고 어느 신문이 거짓말을 하면 시민들이 바로 검색해서 확인해 있는 시대니까요. 구글 어스같은 프로그램을 써서 외국의 거리를 가상현실을 보는 것처럼 둘러볼 있는 시대니까요. 외국에서는 아이폰이 몇대가 팔리는지를 뭘 할 수 있는지 삼성폰이 얼마에 팔리는지를 바로 검색해서 보는 시대니까요. 신문사가 엉터리 가짜 외신을 만들어 내서 국민을 속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렇지 못했을  고립은 당연히 착취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언론사를 장악해서 맘대로 가짜뉴스를 양산해도 진위를 따지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때 모든 언론들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고 오직 외신을 통해서만 진실이 퍼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한국의 사상적 스승으로까지 말해지는 리영희 선생이 기자로써 우수할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전쟁때 통역장교로 일하면서 영어에 능통해졌고 인맥이 생겨서 외국자료를 가지고 진실을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다가 망했다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해외여행도 가고 수출입도 많이 하니까 한국은 조선과 완전히 다르다고만 생각합니다.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놀랍도록 폐쇄된 조선과 비슷합니다. 유학을 비판하는 교수들도  종종 놀랍도록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비슷합니다현대의 발달된 기술은 외국을 가깝게 만들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한반도 분단이 없었던 조선시대보다도 고립된 국토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정인보는 1933년에 양명학연론을 펴내면서 조선은 한마디로 자기를 강조하는 양명학을 하지 않고 객관에만 빠지는 주자학을 해서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객관을 강조하는 주자학의 세계는 조선의 국경을 닫아야만 지켜지는 이상한 객관적 세계였습니다. 조선은 자기도 몰랐고 남도 몰랐습니다. 조선말엽에 러시아며 중국이며 일본에 기대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21세기 한국에도 거리에 외국국기를 흔들며 정치운동하는 보수지지자들이 있습니다. 팩트와 논리와 객관을 강조하지만 자기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본질주의적인 함정에 빠진 진보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겨우 세워진 민주정부에게 힘든 성과와 온갖 절차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에서 예송논쟁을 하던 선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한국의 어떤 측면들은 21세기 세계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공주의가 그렇죠.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이 한국의 최대교역국이고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지금도 마르크스 책읽으면 사람이 미치는 아는 것같은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세계가 전두환이나 박정희같은 군사 구데타 세력의 우두머리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무력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것은 현대한국의 수치였습니다. 한국언론이나 박정희만세를 부를 뿐이고 외국은 당연히 김대중대통령을 높이 평가하지요. 그래서 그분이 노벨상을 받은 거아닙니까. 입만 열면 빨갱이, 종북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제게는 사문난적운운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통일에 대해서 말할 사람들은 자주 독일의 경우를 거론합니다만 저는 전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지도를 펴보십시요. 서독은 한국처럼 고립된 섬이 아니었습니다. 물리적 고립이 한 원인이 되어 한국이 아직도 빠져 있는 정신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의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심지어 경제적 효과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통일비용 계산기 두들겨서 흑자니 적자니 하는 계산은 허무한 것이죠


고립된 국토라는 약점은 분단으로 심해졌고 인터넷 기술로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은 기술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수단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답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런 공간이 만들어 지고 나면 그때의 우리는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좁은 감옥에서 사람들이 비좁게 몰려있는 것같았어하고 말이죠. 우리에게는 이런 해방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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