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3
알랭 드 보통, 말콤 글래드웰,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이 네 사람은 모두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작가들이다. 보통은 철학자이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쓴 사람이고, 글래드웰은 티핑 포인트와 아웃라이어로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핑커는 하버드 대학의 인지과학자이고 리들리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겸 정치가이다. 물론 핑커도 리들리도 많은 책을 썼고 그걸 베스트 셀러로 만든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멍크 디베이트라는 토론회에 참석해서 토론을 했다. 사피엔스의 미래라는 이 책은 그 토론을 기록한 것인데 재미있고 유익하다. 각자 혼자서 책을 쓸 때는 자기를 잘 방어하던 사람들이 서로와 부딪히면서 자신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들어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낄낄거리며 유쾌하게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이 토론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
멍크 디베이트에서 보통과 글래드 웰은 부정적인 답을 하는 쪽으로 핑커와 리들리를 긍정론을 펼치는 쪽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책을 읽게 되면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핑커나 리들리가 긍정론을 펼치는데 있어서 보다 체계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글래드웰이나 보통의 말들은 그다지 정돈이 되어 있지 않게 느껴지는데 특히 보통이 그렇다.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핑커의 말은 데이터에 기초한다. 수명, 건강, 물질적 번영, 평화 그리고 안전을 포함하는 10개 정도의 분야를 선정해서 그 수치를 나열하면서 핑커는 어떻게 봐도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리들리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을 지적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보면 여러가지 어두운 예언이 있었고 난관이 있었지만 언제나 인류는 혁신으로 그것을 극복해 왔다고 말한다. 즉 인류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리들리는 지금 우리의 미래도 역시 밝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정론을 펼치는 보통의 요지는 인간의 삶은 여러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으며 따라서 10개 정도의 분야를 보면서 좋아질거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은 겸손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지 말고 겸허하게 살자고 말한다. 글래드웰의 메세지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이다. 인류는 분명 어떤 측면에서 발전해 왔지만 위험도 더 커졌다는 것이다. 200년전에는 아무리 큰 전쟁이 나도 인류전체가 멸망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가능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평화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과거에 비해 오히려 더 증가한 위험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낙관해서는 안된다.
핑커나 리들리의 말이 훨씬 더 요지가 분명하고 간결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긍정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이미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 우리가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요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정론을 펼치는 보통이나 글래드웰은 잊혀진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훨씬 불명확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논지를 펼치는 모습은 핑커나 리들리의 모습이 매력적이지만 그 내용을 봤을 때 나는 보통이나 글래드웰의 경고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토론에서 던져진 질문을 이해하는 정도에 있어서 핑커나 리들리는 지나치게 뻔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글래드웰이나 보통이 말하는 것을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확실히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문명적 성과의 축적을 통해서 뛰어난 도구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자는 여전히 그대로다. 이것은 마치 몸을 잘 가누기 어려운 어린 아이가 점점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진 장난감을 가지게 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다. 기계로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유전자 기계는 수천년전에 비해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더 발달한 우리의 도구를 자랑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한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회복불능으로 망칠 가능성도 크게 키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인류의 미래가 밝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핑커나 리들리가 강조하려고 하는 인간의 성취 그 자체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의미하지 않는가?
게다가 핑커처럼 인류가 점점 더 좋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에는 분명히 커다란 위험이 있다. 우리가 자연속의 야생동물과 가축이 된 동물을 비교한다면 가축은 그 숫자도 많고 상대적으로 위험도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먹이가 되고, 공장의 식재료가 되는 가축이 자연 속의 야생동물보다 더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다른 야생동물의 위협이나 추위로부터 안전하다고 해서?
이것은 무리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 도구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인간의 도구에 적응하고 어찌보면 그 도구의 노예가 되고 있다. 즉 도구와 인간은 서로를 상호소유한다. 그러니까 점점 더 강력해지는 인간의 도구는 결국 인간을 '가축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도구를 쓰는게 아니라 도구가 인간을 써서 자신을 개량하고 수리하는 일을 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결국 문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가 아닌가? 이런 관점을 핑커가 나열하는 숫자로 반박할 수 있는가?
리들리는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인간이 항상 고난을 극복해 왔다고 말한다. 과거에 대해 말할 때 거기에는 사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200년전의 사람을 현대에 데리고 온다고 하자. 현대인들은 종종 그 과거의 사람이 현대인을 무척 부러워할거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더 많이 가진 것을 그 과거의 사람들에게 자랑하면 그 과거인은 그걸 보고 감동하고 현대에 있고 싶어할 거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왕조라는 질서에 익숙한 인간이 공화정을 하는 현대에 와서 새로운 질서를 금방 수긍할까? 경복궁이나 창경궁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을 보고 그들은 분노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들에게 자랑하는 그 발전들은 실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꼭 필요하냐고 과소평가되지 않을까?
이것은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인간과 우리의 사이에는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혁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혁명의 이쪽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을 가지고 과거를 보고 있으며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의 변화를 발전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 관점 때문이다. 그 말은 혁명이전의 관점으로 그 변화를 볼 때 그 변화는 반드시 발전으로 생각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느 시기를 잡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 중에 과거로부터 현대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사람이 얼마가 되는가를 조사한다면 그 결과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파라고 나올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미 다수라면 그것은 혁명직전에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는 지나치게 그런 혁명의 결과로 생긴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우리는 자동차를 가지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이런 걸 보여주면 그들이 그걸 어마어마하게 부러워할거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만에 기초한 과장이다. 핸드폰이 없는 시대에서 살던 사람은 핸드폰을 보면 신기해 하고 심지어 부러워하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그런 기계가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심지어 그런 기계때문에 불편하고 귀찮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없이는 살 수 없을 것같아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삶을 크게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에게 스마트폰을 자랑하는 현대인은 마치 마약중독자가 이 마약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줄 아냐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오히려 현대인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거나 불쌍해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과거인들은 매우 안타까워할 수 있다. 숲이나 깨끗한 물과 공기같은 것이 없는 현대도시에서 엄청나게 밀집되어 사는 현대인을 보면 과거인들은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물을지 모른다. 리들리같은 사람이 말하는 인간승리의 역사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승자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진짜로 중요한 질문이 또 등장한다. 이것이 역사라면 이제 우리가 백년이나 이백년뒤를 본다고 하자.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그 미래를 보자는 것일까? 그 미래가 밝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 밝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백년뒤의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미래가 밝다는 것인가?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 의미의 좋고 나쁜 기준이 존재한다라는 것은 당연한 가정인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의 관점이 더 중요한 것인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중의 다수는 이백년뒤의 미래를 끔찍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리들리의 말처럼 인류의 발전시기 어떤 때를 골라도 대개 이 말이 옳았었다. 수천년전의 사람들도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은가? 구세대는 신문명에 대해 대개 불만이 많다. 왜 우리는 우리는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혁명 뒤의 세계가 현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당연히 좋은 것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보통은 의미심장한 말을 반복해서 한다. 인간은 어리석고 유한하다. 미래에는 이런 것이 고쳐질지도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그것은 더이상 사피엔스라는 종이 아닐 것이다. 지금 발달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심리학자나 경제학자는 인간의 판단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증거를 산처럼 내놓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런 모순을 고쳐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과학이전의 인간, 문명 이전의 인간, 유사시대 이전의 인간을 생각하면 우리는 미신에 빠져있고 짐승같은 인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현대의 문명인은 분명히 그들로부터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확실히 인간은 문명 특히 문자나 기록의 힘에 의해서 전혀 다른 생물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던 어리석음을 문자의 힘으로 뽑아내서 이제는 언어없는 사고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이것이 혁명 이쪽의 사고다.
미래가 되어 인간판단력의 문제점은 다시 한번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고쳐질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은 다시한번 지금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뀔지 모른다. 그 혁명의 너머에 사는 인간은 지금의 인간을 보면서 어리석고 모순되기 짝이 없다고 혀를 찰지 모른다. 어리석은 판단들을 반복하면서 상처입고 울고 믿을 수 없는 낭비를 하고 사기꾼들에게 속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원시인들을 생각하면서 떠올리는 그런 느낌과 함께 떠올려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혁명의 이쪽에 있는 우리에게 과연 미래는 밝기만 한 것인가? 더 긴 수명과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될 그 미래인이 하루라도 빨리 되고 싶은가?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우리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과거의 인간들을 보면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집착과 믿음을 너무 빨리 비웃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현재의 우리가 당연히 중요하다고 믿는 어떤 집착과 믿음도 미래인들에 의해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절대 우리에게 사소하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다. 그런 미래가 우리에게 닥쳐올 때 우리는 인류의 미래는 밝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이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명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조금만 차분히 앉아서 생각하면 이런 점들을 다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찬반으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다보면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을 표현하기는 더 쉽지 않다. 그래서 토론회에서의 모습이 이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유명 작가들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 하나만 봐도 이 책의 가치는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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